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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구재기 시인 / 풀씨 한 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6.
구재기 시인 / 풀씨 한 알

구재기 시인 / 풀씨 한 알

 

 

아침 햇살이

가슴으로 번지기 시작하면

나는 네 발걸음에 밟히는

풀씨 한 알이고 싶다

 

축축한 흙 속에

조근조근 뿌리를 내려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지켜 나가고

다시 넝쿨로 번지어

너의 가슴을 감싸고 싶다

 

자칫 한삼넝쿨처럼 되어

너의 아픔일 즈음이면

박주가리 같은 흰 젖을 물리고

포근히 감싸 안았다가

다시 기도하듯 날리고 싶은

씨알 하나

 

내 마음을 내기 전

혹시라도 겨울이 온다면

내 안에서 한 치도 벗어날 수 없는

뿌리와 싹이 그대로 한 몸

깡마른 풀씨 한 알이고 싶다

 

 


 

 

구재기 시인 / 목마르다

 

 

우물이 깊을수록

두레박의 끈은 길다

심한 목마름에

한 두레박의 물을 길어 올려도

목마름을 위해서는

한 모금의 물만 필요할 뿐

 

하늘의 구름 사이

밝은 달이 우물에 빠지면

그때마다 나는 급히 목마르다

서둘러 두레박을 내리지만

끈이 긴 두레박의 물은

쉽게 내 입술에 닿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아

그대가 사랑한다는 말을

아무리 들려주어도, 쉽게

나의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다

차라리 깊이 빠져드는

한 덩이 달이 되고 싶다

 

 


 

 

구재기 시인 / 사랑은 매일 걷는 길가에 있다

 

 

그냥 걷는 길가에서

하늘을 본다

움푹 파인 곳마다

물은 깊은 호수로 고이고

그 속에 하늘이 내려와 있음을 본다

 

매일매일 하늘을 굽어보면서

길을 걸어가면서

 

아무리 굽어보아도

높은 하늘인 것을

그 깊이를 알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대여, 사랑은 그렇게

매일 걷는 나의 길가에 있다

소나기가 지나간 자리를 보듬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 먼저 와 있다

 

 


 

 

구재기 시인 / 사람들 사이에서

 

 

존재하지 않는

낯선 나를 만납니다

엘리베이터로 오르내리면서

수없이 만나고 만날

사람들 사이에서

저절로 열리는 문밖으로

또 다른 나를 끄집어 냅니다

목마르게 그리워하며

찾아가고 싶은 사람들

내 생명의 고행처럼

하루에도 수십 번은 더

모였다가 흩어지는 동안

나를 세우고 무너져가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나로부터 단 한 번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러나 분명히 존재하는

사람들 사이로, 하늘의 구름이

끊임없이 그늘을 내립니다

낯선 나 하나가, 또

그늘 아래 동그마니 서 있습니다

 

 


 

 

구재기 시인 / 어린 것들은 하늘 높은 줄만 안다

 

 

아침 햇살이 시끄러워

문을 열고 나가 보았더니

나팔꽃들이 무리지어

햇살 모으기에 정신이 없다

씨알 너덧 뿌려 놓고

대나무 가지채로 꽂아 두었더니

어린 넝쿨이 언제

저리도 하늘 높이 솟아올라

이리도 야단스러울까

그러고 보니 담장 너머에서는

어린 호박 넝쿨이 솟아올라

울안을 엿보고 있다

오, 솟아오르는 것은

모두 어린 것들

 

참죽나무를 타고 하늘로 오르는

하눌타리의 저 어린 넝쿨, 머루넝쿨, 다래넝쿨, 댕댕이넝쿨,

으름넝쿨, 칡넝쿨, 담쟁이넝쿨, 등넝쿨, 청미래넝쿨, 능소화넝쿨,

박주가리넝쿨…

하나 같이 솟지 않는

어린 넝쿨이 있으랴

저런 고이얀!

어린 것들이란 하늘 높은 줄만 안다

 

문득 넝쿨의 밑동을 본다

온몸이 갈라지고 터지고

검버섯처럼 돋아난 버겁에 싸여

혼신을 다하는 상처투성이

제일로 큰 상처로 앉아

돌아가신 아버지가 웃고 계신다

 

 


 

 

구재기 시인 / 시(詩)

 

 

쓸모없는

구절들만 모아

그 구절들로만 이루어진

백 편 천 편의 시보다

한 그루의 나무가 곧 시다

 

꼭 쓸모만큼

잎 돋우고

꽃 피우고

열매 맺고

가진 거 다 버리고는

 

깊은 동안거에 들어간

겨울나무가 곧 한 편의 시다

 

 


 

 

구재기 시인 / 고구마를 캐면서

 

 

넝쿨을 젖히고 거두어낸 뒤

이랑이랑 고구마를 캐내기 시작하면서

가장 옹골지고* 오달진* 덩저리가 묻힌 데마다

땅거죽이 빠각빠각 터져 있음을 보았다

맑은 햇살 아래에 드러난 뒤

굵은 것일수록 살가죽이 갈기갈기 찢겼음을 보았다

깊고 어두움의 땅 속에서

얼마나 푸르고 짙푸르게 하늘을 그려왔던가

얼마나 담차고 줄기차게 어둠과 맞서왔던가

그 동안 응어리져 살아온 탓인지

이랑이랑 끊임없이 알차게 솟구치는 열기로

고구마를 캐는 데에도 헉헉 숨이 찼다

땅이란 본래부터 비어있는 여인

봄이 비바람을 견디어야 가을이 되듯

이 굳세고 질긴 피땀의 줄기로 땅을 뒤덮어 버리고

굵은 씨알을 기르면서 비로소 어머니가 되었다

어머니, 오늘에서야

젖가슴의 그리움과 피땀의 향기, 그 차이를 알았습니다

 

* 옹골지다: 실속 있게 속이 꽉 차다.

* 오달지다: 허술한 데가 없이 야무지고 실속이 있다.

 

 


 

구재기(丘在期) 시인

1950년 충남 서천 출생. 공주교육대학, 한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충남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1978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농업시편』 『바람꽃』 『아직도 머언 사람아』 『삼 십리 둑길』 『둑길行』 『 빈손으로 부는 바람』 『들녘에 부는 바람』 『겨울은 옷을 벗지 않는다』 『콩밭 빈 자리』 『千房山에 오르다가』 『살아갈 이유에 대하여』 『강물』 등. 제2회 충남문학상, 제6회 시예술상 수상. 제3회 신석초문학상. 현재 충남시인협회 회장. 홍성군 갈산고등학교 교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