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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춘희 시인 / 난독의 구름문장들
시퍼런 힘줄 세운 가시연꽃 허공에 절 한 채 올려놓고 용맹전진이다 사흘밤낮 쏟아진 폭우에도 끄떡없이 맨손과 맨발로 적도의 심장을 향해 내게는 눈길 한번 건네지 않고 난독의 구름 문장들 끌어 당겨 창을 내고 진흙 펄 외벽에 심우도 그려 넣고 침향 그윽한 바람소리 풍경으로 들였다 아득한 화엄세계 제 몸의 가시 부러뜨려 날마다 새겨 넣고 그 여자 오늘은 연밥으로 달려 있다 -시집 『초록이 아프다고 말했다』 2018. 천년의시작
최춘희 시인 / 까마귀가 있는 아침
무덤 밖에서 목쉰 소리로 하루가 밝았다고, 아침이 왔노라고 시끄럽게 울고 있다 밤새 어디 숨어 있다가 날이면 날마다 찾아오는 것일까 검은 사제들, 죽음의 정령들, 한 시대의 예언자들 무기도 전략도 없이 휴식도 질주도 없이* 지치지도 않고 영혼 없는 삶의 낡은 문고리를 쪼아대며 울부짖고 있음이여 때때로 희미하게 빛이 든 적도 있었지만 내가 잠든 이곳은 깜깜하고 습하고 더럽다 맹목적 믿음 속에서 열렬히 부활을 꿈꾸던 시대는 먼지처럼 사라졌다 불안은 박테리아처럼 밤을 갉아먹고 어둠 속에서 거인처럼 몸을 부풀린다
반복되는 시간의 지리멸렬한 풍경을 뚫고 어김없이 날아드는 검은 부고장들 주술에 걸린 밤의 장막을 찢어내고 힘차게 솟구치는 까마귀 떼 * 토마스 트란스트뢰메르 「헤엄치는 검은 형체」에서
최춘희 시인 / 코끼리새를 알고 있다 잠들지 못하는 밤마다 지구 밖으로 외출 하였다 딱딱한 퇴적층을 뚫고 우주 저 멀리 날아갔다 수술대 위에 누워 전신마취 당한 한 여자를 알고 있다 그 여자는 고도비만이다 마다가스카르 섬에 살았다는 날개가 있어도 너무 무거워 날지 못한 거대한 새의 유전인자가 그녀의 몸에 바코드로 찍혀있다 300만 년 전에 멸종된 알리바이를 찾아 오늘밤도 부재 중 이다 어둠의 신화가 입 벌린 그곳에 블랙홀이 자라고 있다
최춘희 시인 / 맨홀
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들은 있다 먹잇감을 노리는 포식자처럼 발톱을 숨기고 엎드려 있다 악취와 오물과 가스로 뱃속을 가득 채운 세상에서 버려지는 온갖 것들 쌓이고 쌓여 언젠가는 어둠을 뚫고 폭발할지 모르는 도시의 블랙홀 탐욕이 우리를 삼키듯 절망이 그들을 지하땅굴 깊숙이 봉인하였다 난파된 영혼으로 갈가리 찢겨나간 붉은 심장을 움켜쥐고 거리를 헤매는 자여 발밑을 조심하라 무심코 내딛는 그 발밑에 호시탐탐 입 벌린 화염지옥이 있다 방심한 일상의 길목에 덫을 놓고 기다리는 사냥꾼처럼 그들은 언제 어디서든 발목을 낚아채 무덤 속에 던져버린다 길이 끝나는 곳에 구원의 십자가는 빛나고 있을까 캄캄하게 뚜껑 닫힌 정지된 시간도 환한 날빛으로 살아나 푸른 공기를 폐쇄된 혈관 가득히 넘쳐흐르게 하는 그런 날들 있기는 한 것일까
- 2014년 <현대시> 12월호
최춘희 시인 / 바닥이 없다면 하늘도 없다
벽 안쪽으로부터 조금씩 빗물 스미더니 슬금슬금 바닥에서 천장까지 검은 갈퀴손 조심스레 도둑고양이처럼 뻗어 가더니, 지하 셋방 가득 막무가내 참았던 속울음 쏟아낸다 울증과 조증사이 경계를 잃어버린 한 사내 뿌리도 없이 떠돌던 부랑의 날들 허공을 숙주삼아 곰팡이 꽃으로 맹렬하게 독을 피워낸다 우기의 먹먹한 창틀 갉아 먹으며 배고픈 빗줄기 방 하나를 다 제 뱃속에 들여 놓고도 성에 안차서 허기진 입 한껏 벌리고 딱딱하게 부푼 공갈빵 세상 짐승처럼 뜯어 먹고 있다 썩어 문드러져 습기찬 틈 비집고 사방 벽으로 막힌 어둡고 축축한 방에 유령처럼 누워있다 갈 곳 몰라 서성이던 그 밤의 골목길에서 애써 외면해 버린 불안과 공포 절뚝이며 찾아오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겠다는 듯 쓰나미로 몰려오는 깜깜한 폭우의 시간들
얼굴이 지워진 늙은 무녀가 불빛 한 점 없는 세상에서 물에 퉁퉁 불어터진 달빛 영혼을 뜰채로 건져내고 있다
최춘희 시인 / 투신
자두나무에 꽃 피었다
붉고 고운 자두 빛 진한 향기 허공을 밟고 내려와 춤을 추고 그 아래 젖은 눈 들어 지워진 발자국 훔쳐보는 내가 있다
만개한 저 꽃향기 건지려고 투망 던지듯 너를 던진 것이냐 시여,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을 때 눈 떼지 말고 받아주렴 혀 빼물어 더럽다 하지 말고 경계 없는 너른 품새에 자리 하나 마련해 주렴
팔 벌려라, 꽃아
팔 벌려라, 꽃아
최춘희 시인 / 허깨비가 허깨비를
멀쩡한 낯짝으로 바쁘게 걸어 다녀도 저것들은 다 헛것이다
어둠 저 귀퉁이에 숨어 있다가 불빛아래 모여드는 하루살이 떼처럼 은전 몇 푼에 구세주를 팔듯 하루치 황금 몰약을 위해 육신을 던져버린 유다의 무리들
허깨비가 허깨비를 끌어안고 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밥을 먹고 세수하고 양치질하고 회사에 가고 옷을 걸치고 걸어 다녀도 어디에도 없는 거짓 실체
지하 동굴에 무릎 꿇고 엎드려 허깨비 천국을 경배하며 보이지 않는 구원을 향해 두 손 높이 들어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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