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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영숙 시인 / 어느 유곽에서
씨암탉하려고 아껴둔 토종 중병아리 한 마리, 멀건 대낮에 때아닌 군홧발 들이닥친 투계족들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보쌈당했다. 비밀요새에 진을 치고 있는 비닐하우스 계사 바들바들 떨고 있는 그녀를 끌어내 내동이 친다. 턱주가리벼슬 길게 늘어진 소대장 투견이 쭉 찢어진 살기 도는 눈으로 욕정에 굶주린 웅성대는 소대원들을 단숨에 제압한다. 채 볏이 돋지도 않은 정수리를 날카로운 부리로 꽉 물고 육중한 몸집을 헌 짐짝처럼 털썩털썩 싣는다 하루에도 수백 번, 제 뱃속 묵은 찌꺼기 밑바닥까지 박박 긁어 시원하게 욕심을 내깔긴다 군표軍票를 지급받은 졸개들, 얼마 만에 보는 암평아리에 서로 차지하려고 계급장 떼고 난투극이다 계사 안은 포격당한 꼴리는 쌈닭들 투견장이다.
토종 중병아리, 오전 내내 힘겹게 품은 피 묻은 초란을 낳고 정수리 짓이겨진 채 엉거주춤 걷는 그녀 뒤로 소대장중대장분대장병장상병일병이병 완전 무장한 투견들이 일사분란 줄을 선다.
한영숙 시인 / 독처(獨處)
창살과 창살 사이 십칠 년간 이빨 드러내며 서로 으르렁거렸던, 수컷이 떠나던 날 수원시 권선구 금곡리 농막 우리 안은 생전 처음 굳게 자물통 채우는 침묵의 소리를 내고 있다
늙은 털빛까지 검버섯 만발한 백구였지만 늘 입맛만은 투실투실 유지했다. 그러나 며칠째 입도 안 댄 고봉밥 단내 맡은 불개미들이 장꾼마냥 이고 지고 떼를 지어 북적인다
파릇파릇 싹 올라오는 봄 언저리, 등 뒤편에서 바라본 암컷의 멍한 긴 목덜미에 먹장 하늘이 통째로 내려앉았다.
ㅡ 『공정한시인의사회』 (2022, 4월호)
한영숙 시인 / 집으로
밤늦은 전철 안 봄비가 저벅저벅 검은 장화발로 들어선다 피로에 젖은 하루들이 무릎과 무릎을 맞댄다 옆 좌석에 앉은 늙은 사내의 깊게 패인 미간에서 그간 군중고독 속 깊이 살라낸 니코틴 고뇌들이 그 젖은 몸에서 빗발처럼 뿜어져 나오고 있다 무엇이 저리도 꽁초 비벼대도록 자욱한 하루들이었는지 내 온몸 용고뚜리로 쿨럭이고 있다 매캐하게 빠져나간 어느 역에서 중년 향수남이 이미 흠뻑 젖어버린 내 무릎을 타고 그 빈자리를 채운다 은은히 발효되지 않은 싸구려 향수들이 우산꼬챙이에서 빗물처럼 똑똑 떨어지고 순간순간 노출된 그의 사생활 일부가 봄비와 뒤섞여 철로에 간간이 뿌려진다. 연일 고된 하루 일과에 절어있는 나는, ‘잠시 어느 누군가의 기댈 어깨가…’ ‘들어갈 집이 없다는…’ 문자 한통을 서로 주고받는다. 얼마 남지 않은 기지국을 향해 마지막 전동차는 미끄러지듯 빗속을 질주하고. 꼬박꼬박 들어가야 할 집은 있지만 언제나 그녀 마음속은 빈집. 거기엔 용귀돌이도 싸구려 향수남도 일절 기거할 수 없는 오직 일급수만 수십 년째 유유히 흐르는 빈집. 전철 안 비어있는 좌석들에(凹凹凹凹凹凹…) 등짝 들썩이며 봄비에 젖어있는 고요 하나(凸) 홀로 웅크리고 있다.
-계간 『예술가』2012년 여름호 발표
한영숙 시인 / 비둘기아파트에는
행복동 언덕배기 비둘기 임대아파트에는 때아닌 철재 바리케이드 가로 놓여있다. 조금 더 평수 큰 일반 아파트 엄마들이 쳐 놓았다. 3층에 사는 네 살배기 예솔이는 젖니를 드러내며 ‘엄마! 나하고는 친구들이 안 논대 나랑 놀아줘’ 와락 허리춤을 잡고 늘어진다. 갑자기 그녀의 명치끝에 녹슨 대못 몇 개 거칠게 박힌다. 집 나간 남편 뒤통수 본지도 가물가물하다.
숯불갈비집에서 종일 다리품 팔며 자신의 生처럼 눌어붙은 불판들을 수도 없이 갈아 끼우며 지글지글 끓어오르는 매콤한 연기를 늦은 밤 집에까지 끌고 온, 잠 안 자고 기다리던 눈망울들 금세 붉게 번졌다 엄마 혼자 숯불고기 몰래 먹고 왔다고 잠 속에서까지 투정 부린다.
아침 햇살들이 멍든 곳 날달걀 굴리듯 그 볼에 정성껏 굴린다. 간지럼 참지 못해 목젖까지 웃어젖히는 작약 세 송이, 모처럼 온 집 안이 화사하다.
한영숙 시인 / 고라니 장비를 해체해 간 놈이 도대체 누구지?
용인 산자락 밑 고구마 밭에는 한철 넝쿨들이 허공을 향해 뻗어나가고 있다 꼿꼿이 목을 쳐들고 있는 손바닥만한 넙적한 잎들이 누군가의 목구멍으로 푸릇푸릇 뿌리 내린다 고랑마다 찍혀 있는 발자국들이 새순 돋는 상추밭에도 시금치 밭에도 솔직한 물증들로 남아 있고 고라니는 그렇게 목숨을 연장해 나가고 있다 솔직한 밥상, 모처럼 자연이 웰빙 식사 한 끼 보시 한다는 것 한철이 다 가도록 성찬은 계속되었다 무서리가 치고 어린 순들이 수그러들 무렵 거뭇거뭇 고꾸라진 저것, 꼭 달덩이만한 구멍 속에서 오장육부 장비들이 쥐도 새도 모르게 감쪽같이 적출되었다 새끼 데리고 와서 외식을 즐기더니 새끼 나온 그 뱃속에 내 밭떼기 600평까지도 순식간에 도축해 간 그는 누구인가 제가 받아먹은 만큼 또 다른 누구에게 보시를 하였는가
고구마 밭에 그녀를 묻는다.
한영숙 시인 / 사육
눈 코 입, 달린 사람 누구나 한번쯤 거리를 후끈 설치고 다녔을 털가죽 옷 한 벌, 한파 거칠어질수록 티브이 속 먼 나라 인공 사육장에는 거꾸로 매달린 야생 너구리들. 동료들이 훤히 지켜보는 쇠창살 너머에선 제 마지막 남은 자존감마저 날 선 면도날에 슥슥 벗겨진다 아무렇게나 방치된 벌건 육신들은 얼어붙은 흰 눈 위에서 더운 김을 가파르게 토해낸다. 녹물 흐르는 비좁은 철창 속 갓 태어난 새끼들이 천진난만 어미 젖 치댈 때 혹한의 가죽들을 능숙하게 발라내는 공포들. 쉴 새 없이 사육되고 있는 철창과 철창 사이.
윤기 번들한 부드러운 생목숨들이 제 몸 안에서 평생을 붙박이로 살아가야 할 희멀건 시간을 모피 숍에서 원적지보다 수백 곱 웃돈 얹어 흔쾌히 지불한다.
한영숙 시인 / 헐거움에 대하여
멀리서 보면 나무들로 가득 차 있는 숲 날리지 못하도록 새순을 돌돌 감으며 원심기 페달을 밟아대는, 가까이 가 보면 나무와 나무는 서로의 팔과 팔이 겹치지 않는다 동료의 팔이 길다면 다른 각도로 자신의 팔을 벌려 신록 반 스푼 넣고 헛둘 헛둘 여유롭게 페달을 돌리면 푸른 솜사탕이 봉글봉글 가지마다 단내를 날린다 땀내 나는 겨드랑이 한 귀퉁이 지나가는 어린 새들에게도 통째로 내어준다 편안히 새끼들에게 달콤한 하루를 내어주는 붙살이질도 또한 소소한 재미다 눈도 뜨지 않은 새 생명이 솜사탕 입가에 묻혀가며 쉴 새 없이 재재재 뜯어먹는. 빡빡이 조여진 새 나사처럼 사방이 콱 막혀 있다면 새들도 더는 둥지를 틀지 않을 것이다 조이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참깨섶 같은 서울 환승역, 어깨와 어깨들이 하루에도 수만 번 부딪치지만 그가 산 몇 번지 누군지 통 기억나지 않는 요즈음, 녹음 우거진 숲을 바라보면서 바람에 날려 온 솜사탕 몇 덩이 슬며시 뜯어먹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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