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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남주 시인 / 개같은 내 인생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6.
김남주 시인 / 개같은 내 인생

김남주 시인 / 개같은 내 인생

 

<개같은 내 인생>

이것은 영화 제목이다

길을 가다 말고 내가 훔쳐 본

개처럼 끌려다니고

개처럼 두들겨맞고

사슬에 묶여 개처럼 감금당하고

이것이 지나간 내 십년의 인생이었다

그런데 아니 그러면

사람을 개처럼 끌고다니고

사람을 개처럼 두들겨패고

사람을 사람의 손과 발을 사슬로 묶어

개처럼 감옥에 쑤셔넣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어떤 사람들일까

그런 인생은 어떤 인생일까

<개같은 내 인생>

딱 들어맞는 말투다

나와 내가 시달리고 사는 이 세상에

개같은 이 세상살이에

-시집 <솔직히 말하자> 1989

 

 


 

 

김남주 시인 / 노래

 

이 두메는 날라와 더불어

꽃이 되자 하네

꽃이 피어 눈물로 고여

발등에서 갈라지는

녹두꽃이 되자 하네

이 산골은 날라와 더불어

새가 되자 하네

새가 아랫녘 윗녘에서 울어예는

파랑새가 되자 하네

이 들판은 날라와

더불어 불이 되자 하네

불이 타는 들녘 어둠을 사르는

들불이 되자 하네

되자 하네 되고자 하네

다시 한 번 이 고을은

반란이 되자 하네

청송녹죽靑松綠竹 가슴으로 꽂히는

죽창이 되자 하네 죽창이

 

 


 

 

김남주 시인 / 시에 대하여

 

 

할머니는 산그늘에 앉아 막대기로 참깨를 털고

어머니는 따가운 햇살 등에 받으며 호미로 고추밭을 매고

아버지는 이랴 자랴 소를 몰아 논수밭에서 쟁기질을 하고

나는 나는 학교 갔다 와서 산에 들에 나가

망태 메고 꼴을 베기도 하고 염소를 먹이기도 했지요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할머니가 개를 터시다 말고 막대기를 훼훼 저어

메밀밭을 해치는 산짐승을 쫓는 시늉을 하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김을 매시다 말고 사금파리를 주워

고추잎에 붙은 진딧물을 긁어내는 것을

나는 보고는 했지요 어린 시절에

아버지가 쟁기질을 잠시 멈추시고 꼬챙이를 깎아

황소 뒷다리에 붙은 진드기를 떼어내는 것을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 시절 우리 식구들이 미워했던 것들---

산짐승 진딧물 진드기 같은 것이 자주 나오지요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내 시에는

그런 것들을 내치느라 일손을 잠시 놓으시고

우리 식구들이 대신 들었던 것들---

막대기 사금파리 꼬챙이 같은 것이 많이 나오지요

 

-『사상의 거처』, 1986

 

 


 

 

김남주 시인 / 사람의 얼굴

 

 

푸른 옷의 사내는

철창에 기대 담 쪽을 내다보며

이제나 올까 저제나 올까

면회 오겠다던 님을 기다리고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면사포도 없이

양친 부모 승낙도 없이

혼자서 결혼한 여자는

면회가 되면

혹시라도 특별면회라도 되면

간수 몰래 남편 될 사람

손등이라도 한번

어루만질 수 있을까

담 곁에서 애를 태우고

그러나 어쩌랴 이것도

분단과 식민지의 밤이 빚어낸 사랑의 한 얼굴인 것을

 

 


 

 

김남주 시인 / 세상은 고이 잠들고

 

 

세상은 고이 잠들고 적막한데 자지 않고 깨어나 일어나

유령처럼 어둠 속을 배회하는 것이 있다

하나는 그 꼬리에 반딧불처럼 불을 켠 불온의 사상이고

하나는 그 머리에 탐조등처럼 쌍심지를 켠 관헌의 눈이다

잡히지 말아라 불온한 사상아 네 꼬리가 잡히면

어둠이 운다

뜬눈의 봉사

네 어머니가 운다

 

 


 

 

김남주 시인 / 아우를 위하여

없는 놈은 농자금도 못 타 쓴다더냐

있는 놈만 솔솔 빼주기냐

조합장 멱살을 거머쥐고

면상을 후려치던 아우야

식구마다 논밭 팔아

대학까지 갈쳐 논깨

들쑥날쑥 경찰이나 불러들이고

허구헌 날 방구석에 처박혀

그 알량한 글이나 나부랑거리면

뭣한디요 뭣한디요 뭣한디요

터져 분통이 터져 집에까지 돌아와

내 얄팍함에 귓창을 찢었던 아우야

내 사랑하는 아우야

오늘 밤과 같이

눈앞이 캄캄한 밤에는

시라도 써야겠다

쌓이고 맺힌 서러움

주먹으로 터지는 네 분노를 위하여

고이고 고인 답답함

가슴으로 터지는 네 사랑을 위하여

차마 바로는 보지 못하고

밥상 너머로 훔쳐보아야만 했던

내 눈 속 네 얼굴을 위하여

시라도 써야겠다

오늘 밤과 같이

눈앞이 아찔한 밤에는

-시집『鎭魂歌』, 청사, 1984,

 

 


 

 

김남주 시인 / 똥파리와 인간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떼 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보라고 똥 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 지어 사는 똥파리를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을 깊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내 고향이란 옛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똥파리에게나 인간에게나

똥파리에게라면 그런 곳은 잠시 쉬었다가

물찌똥이나 한번 찌익 깔기고 돌아서는 곳이고

인간에게라면 그런 곳은 주말이나 행락철에

먹다 남은 찌꺼기나 여기저기 버리고 돌아서는 곳이다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게 별것 아닌 것이다

똥파리와 별로 다를 게 없는 것이다

 

 


 

김남주(金南柱) 시인 (1946∼1994)

1946년 전라남도 해남 출생. 전남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7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등단. 1979년 남민전 사건으로 15년 형 선고를 받고 9년째 복역 중 1988년 12월 가석방으로 출옥. 1991년 신동엽(申東曄) 창작기금을 수상. 시집 ≪진론가 鎭魂歌≫·≪나의 칼 나의 피≫·≪조국은 하나다≫, 시선집 ≪사랑의 무기≫·≪솔직히 말하자≫·≪마침내 오고야 말 우리들의 세상≫·≪학살≫·≪사상의 거처≫·≪이 좋은 세상에≫, 산문집 ≪시와 혁명≫, 등. 1994년 2월 13일 췌장암으로 별세(향년 47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