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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명수 시인 / 동전 한 닢
오늘 낮, 차들이 오고 가는 큰길 버스 정류장에 10원짜리 동전 하나가 길바닥에 떨어져 뒹굴고 있었다 육중한 버스가 멎고 떠날 때 차바퀴에 깔리던 동전 하나 누구 하나 허리 굽혀 줍지도 않던 테두리에 녹이 슨 동전 한 닢 저녁에 집에 오니 석간이 배달되고 그 신문 하단에 1단짜리 기사 눈에 띌 듯 띄지 않던 버스 안내양의 조그만 기사 만원 버스에 시달리던 그 소녀가 승강대에 떨어져 숨졌다는 소식.
-(2006년, 2007년 태성고등문학 ) 수록
김명수 시인 / 낙과
달려 있는 열매와 떨어진 낙과 사이 무심(無心) 흐른다 가지와 바닥 사이 머무는 평정 열매들은 모두에게 한 번의 일생 시간과 자연은 무방하다지만 바람은 이따금씩 태풍이 되고 푸른빛에 붉은빛이 희미하게 지나갔다 아직 못다 익은 과피의 흔적 낙과는 떨어져도 나무 아래 떨어진다 비바람 흔적 찾을 길 없다 낙과가 스스로 비바람이거늘
김명수 시인 / 다시 들국화에 부쳐
내 마음 다다를 곳 어디 있다면 가을볕 외진 언덕 어느 산자락 들국화 고요히 피는 산자락 그 꽃 홀로 피어나 향기 지니고 그 꽃 홀로 제 향기 지니지 않고 청명도 향기도 서로 물드는 내 마음 다다를 곳 어디 있다면
김명수 시인 / 무지개 아이가 걸어간다 혼자서 어여쁜 꽃신도 함께 간다 이 세상에서 때 묻지 않은 죽음이여 너는 다시 무지개의 칠색으로 살아나는가 아이가 걸어간다 아이가 한밤중 불 같은 머릿속 다 헹구고 간밤의 비바람 폭풍우 다 데리고 오늘은 다소곳이 걸어간다 눈물도 꽃송이도 다 데리고 걸어간다 아가야 네가 남긴 환한 미소 내 가슴에 남겨준 영롱한 기쁨 그런 것 모두 다 한데 모아 오늘은 비 개이고 맑은 언덕 아이가 걸어간다 혼자서 하늘나라로 하늘나라로 무죄의 층계를 밟아 오른다
김명수 시인 / 우리나라 꽃들에겐
우리나라 꽃들에겐 설운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코딱지꽃 앉은뱅이 좁쌀밥꽃 건드리면 끊어질 듯 바람 불면 쓰러질 듯 아, 그러나 그것들 일제히 피어나면 우리는 그날을 새봄이라 믿는다 우리나라 나무들엔 아픈 이름 너무 많다 이를테면 쥐똥나무 똘배나무 지렁쿠나무 모진 산비탈 바위틈에 뿌리 내려 아, 그러나 그것들 새싹 돋아 잎 피우면 얼어붙은 강물 풀려 서러운 봄이 온다
김명수 시인 / 발자국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김명수 시인 / 조개무덤
조개껍데기 조개껍데기, 빈 조개껍데기 썰물 지는 바닷가에 수북히 쌓여있는 진주를 품지 못한 빈 조개껍데기 바닷가 공동묘지에 새로 쓴 무덤 하나 묘비 없는 무덤하나
<시와사람> 2003년 겨울호
김명수 시인 / 내 오래도록 오르내리는 산길 중턱에
내 오래도록 오르내리는 산길 중턱에 튼실한 아름드리 참나무가 두어 그루 서 있다오 어느 때는 가끔, 가쁜 숨가라앉혀 나무 곁에 다가가 가만히 걸음 멈춰 두 팔로 나무를 감싸 안아보지요 그리고 부드러운 나무들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인다오 아마도 그런 날은 쓸쓸한 날이거나 우울한 날일게요 또한 그런 날은 가망 없는 기대가 우리를 실망케 한 날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나무를 안아보면 한자리에 뿌리내린 아름드리 참나무는 언제나 변함없이 묵묵하지만 그러나 나는 이따금 느낀다오 마치 우리가 철없던 어린 날 엉뚱한 잘못으로 부모님께 꾸중을 듣고 혼이 났을 때 근엄하면서도 자애롭던, 그리고 언제나 말수가 적으시던 백부나 조부님이 조용히 우리 곁에 다가와 우리 등을 감싸주던 그때 그 순간처럼 내가 나무를 안는 것이 아니라 나무가 나를 안아주는 것이라고 그 순간 나는 알 수 없는 평온함을 느끼면서 나무와 내가 한 몸이 되는 순간을 맛본다오 그리하여 나는 꽃피는 봄날, 혹은 가을날 비록 우리네 하루가 덧없이 속절없이 흘러갈지라도 나도 또한 든든한 아름드리나무들로 인하여 새로운 힘을 얻어 세간의 도시로 발걸음을 돌린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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