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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정윤 시인 / 위로의 하루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7.
서정윤 시인 / 위로의 하루

서정윤 시인 / 위로의 하루

 

 

오늘 하루 수고했어

내일은 더 푸를 거야

도저히 희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지날 때도

끝은 반드시 온다고 말했어

이 안개의 끝만 지나면

푸른바람이 부는 햇살

만날 수 있을 거야

거기를 향해 쉬지 않고 가야해

내일은 반드시 온다고

벌써 오늘의 밤이 지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잖아

아직은 버텨야 해, 풀잎처럼

마른 풀잎의 자존심을 빌려서라도

 

 


 

 

서정윤 시인 / 가끔은

 

 

가끔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내가 그대 속에 빠져

그대를 잃어버렸을때

나는 그대를

찾기에 지쳐 있다

 

하나는 이미 둘을 포함하고

둘이 되면 비로소

열림과 닫힘이 생긴다

 

내가 그대 속에서 움직이면

서로를 느낄 수는 있어도

그대가 어디에서

나를 보고 있는지

알지 못해 허둥댄다

 

이제 나는 그대를 벗어나

저만큼 서서 보고 있다

가끔은 멀리서

바라보는 것도 좋다

 

 


 

 

서정윤 시인 / 작은 것의 노래

 

 

태어나면서 오늘 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것이 정해졌다면

내 삶 조종하는 그분을 죽여야 한다

들꽃의 노력은 별에서 온 것이고

죽음 앞에 엎드린 갈대의 울음이

산을 넘어 무지개 기둥 잡으려 할 때

살아온 날들도 빛나기 시작한다

겨울은 봄 앞에 잠시 무릎을 꿇지만

결국은 이기는 게임을 한 것이다

겨우 숨만 붙어 있어도 견디기만 한다면

밀알이 된다

 

세상에 넘어지지 않는 삶이 있을까

벽에 부딪히지 않는 사랑은

담을 넘지 못하는 울음이다

버리고 싶은 어제는 그림자로 매달리고

내일은 자꾸 어긋나는데

그래도 참아보자고 다독인다

 

 


 

 

서정윤 시인 / 무지개

 

 

너나 할 것 없이 고통스러운

아직은 그때가 아니길

얼마나 원했는지 모른다

미처 자유롭지 못한 나에게

연약한 날개를 그려주고

그렇게 날아갈 수 있길

하늘이 까매지도록 바랐다

 

전혀 깨닫지 못한 아픔이

나보다 크게 부닥쳐 오면

유리를 지나가는 마지막 모습

내 살아온 삶만큼 허전하다

아무리 뜨거운 돌멩이를 던져도

그는 저만치서 나를 보고만 있고

내, 이 초라한 모습으로

전신을 태우며 날아가는데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는

풀 한 포기

바람이 불 때마다 쓰러지고

황혼으로 사라진 그대를, 나는

온 어둠을 뒤지며 헤매고 있다

 

 


 

 

서정윤 시인 / 바람 부는 날의 약속

 

 

꽃향기를 멀리 데려주겠다고 했다

울음의 흔적 지워야겠기에

심장에 새겨진 사랑에

초록바람 입혀 손을 잡는다

 

인생에 진실이 있다고 우기는 친구에게

욕심을 제거하면

비눗방울밖에 없지 않느냐고 해도

자신의 속마음을 포장하기에 바쁘다

 

사랑은 신의 영역에 속하더라

물봉선 씨앗 심는 것은 내 일이지만

그 씨앗의 이름 불러 눈 뜨게 해서

꽃으로 세상을 보게 하는 건

농부의 손을 넘어선

신의 빗방울이다

사랑은 그 빗방울을 느끼는 것이다

 

사랑의 삶은 너무 짧고

견디기 힘든 설레임이기에

비눗방울로 날려 보내기로 했다

그렇게 약속은 떠나갔다

 

 


 

 

서정윤 시인 / 섬의 노래

 

 

나의 관을 안고 노랠 부른다

꽃이 피면 지는 것이 당연하듯이

내 태어날 때 연초록 얼굴이었다

어느 새 갈색 팔다리로 삐걱거리며 걸을 때마다 흔들린다

내일 죽을 것처럼 사랑했어도

백골로 누운 먼지일 뿐이다

 

나뭇잎보다 반짝이는 삶은 아니어도

거적때기에 누워 손가락질 당하지 않는 하루를 살아얄 텐데

신의 나라에 발을 걸친들 무슨 의미가 있겠나

욕심을 내려놓지 못한 채 그리움으로 위장하였다면,

사랑으로 죽어도 좋다고 말했던 꽃의 시절처럼 허무하고

느닷없는 번개에 굵은 가지 한두 개 잃었어도

결국은 살아남았다

씨앗 날아가 새 땅에 깃발을 펄럭이는 목선이었다

 

황야의 척박함일수록 기도가 샘 솟아나고

극한지역에 뿌리내린 꽃이 더 아름답다

신전의 기둥을 잡고 울어도 응답은 없고

모든 문제의 답은 내 안에 있었다

수도원 마당을 차지한 침묵의 꽃으로

내 남은 날의 노랠 채운다

 

 


 

 

서정윤 시인 / 자두나무는 다 괜찮다고 말한다

 

 

자두나무도 단풍이 있다

예쁘진 않아도 최선을 다한 순수함

겨우내 모은 생명의 힘 밀어 올려

붉고 실한 열매 매달아

'와와' 소리지르며 보내고 나면

팽개쳐 둔 그냥 나무였다

 

단풍나무가 새빨간 드레스로 한것 뽐내는 오후

자두나무는 유행 지난 한복 깨끗이 다려 입고

친척 결혼식에 온 엄마였다

자두 열매 다 보내고 허리 무릎 아파도

참으며 티 안 내려고 "괜찮다 괜찮어" 만 말한다

 

나무들 색이 다 다른 것 보인다

내면의 아름다움 볼 수 있는 눈 이제 생겼는데

가을은 저만큼 지나가 버렸다

 

-시집 <자두나무는 다 괜찮다고 말한다>

 

 


 

서정윤(徐正潤) 시인

1957년 대구 출생. 영남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 1984년 <현대문학>지에 김춘수 선생님에 추천에 의해 작품 <화석> <겨울 해변가에서> 등을 발표. 김천 성의여종고의 교사. 밀양 밀성중·고등학교. 시집 <홀로 서기> <점등인의 별에서>. 대구영신고교 교사. 2012 제26회 금복문화상 문학부문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