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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은 시인 / 치자꽃이 피었다
무릎이 깨졌을 때도 사랑이 깨졌을 때도 어머니의 처방은 한결 같았다
한숨 푹 자거라
한숨 푹 자는 동안 거짓말처럼 무릎도 사랑도 아물었다
잠 밖에서 어머니는 수은 방울 같은 내 눈물을 쓸어 모아 어디다 감추셨는지
한숨 푹 자고 나면 눈물은 말라 있고 사랑이 아문 자리에 치자꽃이 피어 있었다
어머니가 달랜 모든 상처는 순결했다
맑은 시간이 치자꽃의 꽃말을 우려내고 있다
이화은 시인 / 가족력
독사는 새끼에게 유산으로 독을 물려주며 어떤 마음이었을까
부를 대물림하는 재벌 아버지처럼 또는 물려줄 건 빚 밖에 없다는 찢어지게 가난한 부모 같았을까
지 어미를 닮아서 독하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을 것이다 독하지 않은 독사는 이미 독사가 아닌 것을
돈이 독이 되기도 하고 가난이 돈이 되기도 하니
독도 잘 쓰면 약이 된다는데 고혈압으로 돌아가신 아버지와 당뇨로 고생하셨던 어머니를 고스란히 물려받아 매일 아침 점호하듯 핑크와 화이트의 알약을 꿀꺽 노래처럼 삼키는데
물려준다는 것 이 수직의 흐름을 아무도 꺾을수 없다
독사가 곡기를 끊고 동안거에 들었을 때 누대에 걸쳐 대물림 해온 지겨운 독을 기억하고 싶었는지도 몰라
그래서 해마다 허물은 벗어 보지만 허물은 허물일 뿐 피는 신의도 낭만도 뭣도 아니다 냉정한 돈이며 빚이며 명일 뿐 결국 독이다
우리는 모두 독사의 자식들이다 라고 한다면 도덕 동네의 군자님들에게 돌 맞아 죽으려나? 죄 없는 자만 아니, 독 없는 자만 내게 돌을 던질 것이다
이화은 시인 / 왕관의 무게를 견뎌라 왕이었던 자가 왕을 벗어도 왕관의 무게는 평생 벗지 못한다는데 나도 모르는 새 나도 왕이었나 목이 무거워 견딜 수가 없다 조금만 고개를 숙여도 통증이 發光한다 의사는 아무에게도 고개를 숙이지 말라는데 뺏뺏이 머리를 쳐들고 미사를 보았다 神앞에서도 고개를 숙이지 않으니 어느 거만한 왕이 살다 가셨나 돌아보면 밥도 왕이었고 꽃도 왕이었다 가난도 왕이었고 청춘도 왕이었다 시도 사랑도 왕이었다 폭군이었다 나는 그들의 충직한 백성이었고 신하였고 졸개였다 빛나는 왕관의 그늘에서 대대손손 목을 꺾고 살기를 원했는데 그 왕들은 다 어디로 흘러갔을까 지금은 통증이 어설픈 왕 노릇을 한다 낭만도 품위도 권위도 없는 왕의 눈치를 보며 매일매일 반역을 꿈꾼다 요즘 내가 살아야 할 유일한 이유다
이화은 시인 / 수상한 시
짧은 시 몇 행이 시보다 긴 수상 경력을 무겁게 매달고 있다 제 몸집보다 큰 똥 덩어리를 영차영차 힘겹게 굴리던 말똥구리를 기억한다 쇠불알을 찬 듯 아무래도 아랫도리가 너무 무겁다 감자가 알이 굵어지면 지상의 줄기는 시드는 법 수확의 계절은 아직 먼데 서리 맞은 듯 오늘 저 시의 신색이 수상하다
이화은 시인 / 바늘 같은 내 몸에 황소 같은 병이 오네
엄마의 그 기막힌 비유를 그땐 무심히 흘려 버렸는데 엄마 몸에 찾아왔던 그 황소가 내 몸에도 들었어요 무릎을 밟고 심장을 밟고 저벅저벅 오장육부에 소 울음소리 자욱해요 바늘 같은 내 몸을 어디다 숨겨야 할까요 당신의 바늘이 내 옷깃에 숨어들었을 때 나는 매정하게 털어 버렸는데 당신의 아픈 바늘은 딸이라는 이름을 꿰매고 또 꿰맸지요
이화은 시인 / 난처한 관계
내 남자는 내게 옷을 벗으라 하고 나의 神은 몸을 벗으라 한다 초저녁 묽은 어둠속에서 무심히 복숭아의 껍질을 벗기는데 명치끝에 직입했던 질문 하나가 따끔거린다 손목의 맥을 짚던 한의사가 성관계는 몇 번이나? 하루? 일주일? 한 달? 한 생? 내 몸 어디에 그런 횟수가 낱낱이 기록되어 있단 말인가 급하게 뒤집어 입은 헌 속옷 같은 대답을 대충 던져주었는데 성(聖)이었나? 선행과 자비를 물었던 것인가 복숭아 단물이 줄줄 흘러내리는 손가락 사이가 새삼 화끈거린다 문득 귓속이 허전하니 메밀꽃 진 자리 처럼 매미 울음이 없다 제 울음 끝을 다시 뒤집어 찢곤 하던 울보들도 드디어 울음의 몸을 벗은 것인가 바람이 어둠의 맥을 짚는 저녁 다 발라먹은 복숭아씨 하나를 놓고 하나와 한 번은 다른 말이라고, 하루 종일 나는 이상한 숫자의 벌거벗은 의미들과 너무 오래 관계되어 있었다
이화은 시인 / 들러리 시인에게
영국 윌리엄 왕자의 세기적인 결혼식에 들러리를 섰던 왕세자빈의 여동생「피파 미들 튼」의 뒤태가 너무 아름답다고 세계의 이목이 집중하고 있다는데
선배 시인들의 시상식이다 출판기념회다 꽁지에 불붙은 들짐승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박수 치다 보면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기도 하고
어떤 시인은 *한 나라에 시인은 세 명이면 족하다고 한다 그 외에는 모두 모국어의 거름일 뿐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세 명의 시인 외에는 모두 들러리라는 셈인데
들러리가 거름이라면! 모두 다 나무가 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감나무는 지전 같은 두터운 이파리를 떨어뜨려 스스로 제거름을 마련할 줄 안다
지금 세계가 들러리를 주목하고 있다 시인이여 들러리 시인들이여 뒤태 고운 시나 쓰며 한 번 잘 썩어 보자 부르튼 모국의 입술을 적셔줄 세 명의 시인을 위해 꽁지 빠지게 박수 한 번 제대로 쳐보자
이화은 시인 / 쓸쓸한 중심
꽃은 그 나무의 중심이던가 필듯말듯 양달개비꽃이 꽃다운 소녀의 그것 같아 꼭 그 중심 같아 中心에서 나는 얼마나 멀리 흘러와 있는가 꿈마저 시린 변두리 잠을 깨어보니 밤 사이 몇 겁의 세월이 피었다 졌는지 어젯밤 그 소녀 이제는 늙어 아무 것의 한 복판도 되지 못하는 내 중심 쓸쓸히 거기에 시들어
이화은 시인 / 쑥 캐기
쪼그리고 앉아 쉬하는 자세가 가장 좋다
멀리서 보면 제 것을 들여다보는 듯, 허나 정말로 들여다 볼 필요는 없다 쑥이 다 올려다보고 있다
고로 바지보다는 통치마를 입어라 입어보면 안다 동의보감에도 나와 있다 아니 눈 먼 소녀경이던가?
적당히 자란 연애를 자르듯 칼질은 정확해야 한다 싱싱한 추억으로 국을 끓여 먹을 수도 있다
오금이 저리거든, 오금 저렸던 기억들을 한 칼 한 칼 마음에 저며라 인생 공부에 칼 같은 도움이 된다
쑥 캔 자리는 돌아보지 마라 칼잡이가 뒤를 돌아보면 이미 프로가 아니다
허리가 몹시 아플 것이다 그러나 그 이상의 후유증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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