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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연희 시인 / 지난 여름 바닷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7.
정연희 시인 / 지난 여름 바닷가

정연희 시인 / 지난 여름 바닷가

 

 

뜨거운 태양이 정열을 부르고

파도 소리가 가슴을 적시는

지난여름 바닷가

 

하얀 파도가 부서지는

시원한 솔바람 사이로

향기롭던 우리의 속삭임

물결처럼 일렁인다

 

바람에 흩어져 버린

우리의 지난날

그리워 다시 찾은 바다에는

정다운 우리의 이야기가

파도에 실려 가슴을 뛰게 한다

 

 


 

 

정연희 시인 / 붉은 달

 

 

눌린 베레모처럼 납작한 봉분

정수리에서 부스럼 같은 붉은 흙이 흘러내렸다

점령자처럼 억새풀이 차지한 가세 기운 집

묘비도 없다

 

함부로 밟힌 질경이풀 흔들리는 그 끝에

문패 없는 변두리 골판지 집이 있다

비탈길에 오물이 진물처럼 고인 달동네

아기 옹알이와 당찬 청년의 발소리 사라진 골목

빈터에 늙은 호박이 펑퍼짐한 엉덩이 뭉개고 있다

젖줄에 댄 늦은 꽃

더 이상 잉태는 없다

아파트딱지 놀이에 투기장으로 이전된 노인의 거처

고치 속 애벌레처럼 웅크리고 잠든 집 허적하다

수퍼문이 붉게 익는 밤

들고양이가 뻔질나게 담장을 넘는다

 

무덤 앞에 켜 놓은 개망초 메꽃 쑥부쟁이 촛불 환하다

누군가 도토리 밤 돌배... 한 상 진설陣說했다

제주祭主는 엎드린 들고양이

백발 풀어헤친 억새풀이 눈가를 훔치고 있다

 

-《현대시학》 2023. 3-4월호

 

 


 

 

정연희 시인 /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

 

자작나무 숲에

숨겨 놓은 하늘 우물이 있다

천년을 햇살로 빚은 샘이 거기 있다

누가 중세의 무거운 우물 뚜껑을 열었을까

유라시아의 여름 바다를 건너온 새

우물 언저리에서 맴돌고

오후 3시에

어린 순록이 다가와 등을 내밀 것 같은 그곳

우물을 내내 올려다보다 비밀의 숲을 건너갔을까

푸른빛이 금빛으로 다시 색색으로 숲의 눈동자가 얼비치다 사라졌다

지하도 환한 등불 아래 손을 내밀던 아이

아무런 표정 없는 눈

목마른 그를 어디서 본 듯 한데

우물 뚜껑처럼 눈거풀이 순간 닫쳤다

생은 곧 길만 있는 게 아니어서

미로를 헤매는 시간이 있다

닫힌 우물

돌아서는 가슴 얼마나 적막했을까

내 발등으로 하얗게 쏟아지는

거기,

번쩍거리는 나뭇잎으로 두레박을 엮는 이가 있다

 

 


 

 

정연희 시인 / 시그넷 링 인장

​오래전 러시아 연인들이 정혼할 때

자작나무 수피 연서를 나누는 의식이 있었다는데

나무 향이 사라지듯 사랑의 감정도 희미해질 때

봉인해 둔 약속을 다시 불러냈다 한다

결대로 일어나는 껍질을 벗기며

이것은 종이가 아니라 옷에 가깝다는 생각

우리 옛사람들은 난을 치고 글을 지어

정인의 치마에 정표로 건네고 떠났다는데

당신의 이름과 내 이름 사이 단 하나의 문장이 떠오르지 않아

길을 놓친 새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다

나는 남쪽 들녘을 떠돌고

당신은 북쪽 언덕에 머물러 있으니

나무의 옷 한 조각 얻어 환영 같은 시간들 지워 볼까

자작나무 검은 상처 자국은 시그넷 링의 봉인 자국

무수히 달이 차고 기울어도

접힌 채 옹이처럼 풀리지 않는 편지

오로지 당신이 시그넷 링 인장을 뗄 수 있겠다

​​

-시집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

 

 


 

 

정연희 시인 / 봄은 사랑으로 오는 마법

 

​하늘이 마법처럼 푸르르다

내 마음도 봄꽃처럼 싱그럽게 피어나

작은 가슴 환희로 날아오른다.

파란 바탕의 흰 구름은

꿈을 꾸듯 오선을 그리며

초록빛 음표들이 상큼한 봄을

경쾌하게 노래하고 있다.

상쾌한 햇살은 눈부시게 빛나고

새콤달콤한 봄 여인

꿈처럼 달콤해진 입술로

파릇한 연두빛 향기를 마신다.

봄은 사랑으로 오는 마법

그대 향한 향기로운 내 마음

나는 봄 소녀처럼 설렘 가득해

그리운 사람에게로 사뿐사뿐 걸어간다.

 

 


 

 

정연희 시인 / 잔등노을

 

 

소 잔등에 부르르

바람이 올라타고 있다

곱슬거리는 바람을 쫓는 꼬리는

등뼈를 타고 나간 장식

억센 풀은 뿔이 되고

오래 되새김질한 무료는 꼬리 끝에서 춤춘다

 

스프링을 닮은 잔등 속 간지러움은

온갖 풀 끝을 탐식한 벌

한 마리 꽃의 몸속에 피는 봄

연한 풀잎이 키운 한 마리 소는

쌓아 놓은 풀 더미 같고

잔등은 가혹한 수레의 우두머리 같다

 

논두렁 길 따라 비스듬히 누운

온돌방 같은 소 한 마리

눈 안에 풀밭과

코뚜레 꿴 굴레의 말[言]을 숨기고

쫓아도 달라붙는 등에를 외면하는

저 순응의 천성

가지런한 빗줄기가 껌벅 껌벅거린다

 

융단처럼 펼쳐놓은

노을빛 잔등이 봄빛으로 밝다

주인 닮은 뿔처럼 몸 기우는 날은

금방 쏟아질 것 같은 잔등의 딱지가

철썩철썩 박자를 맞추고

저 불그스름한 노을은

유순한 소의 엉덩짝을 산처럼 넘는다

 

 


 

 

정연희 시인 / 나무가 전하는 바람의 말

침묵 속에는 더 많은 소리가 들어 있다

 

침묵을 모르는 너는

너무 많은 이름을 가졌어

생성과 소멸의 큰 눈으로 방황을 하지

 

어디에도 없고 어디에나 있는

푸른 춤사위를 만드는 조련사다

 

너의 길은 늘 특별한 순간들

직진의 습성이 휘돌아 오면

들판은 굽이치는 바다가 된다

 

초식의 생이란

흔들리고 휘어지고 뿌리가 뽑혀도

무수한 팔을 뻗어

부러지지 않는 세상을 기원하는 것이 전부다

 

고요는 고요한대로

별들은 내려와 수런수런

안으로 자란 흉터를 끌어안고

못다 쓴 일기를 쓴다

 

너의 길을 따라가다 울퉁불퉁해진 글씨체

옹이진 매듭을 풀어 가면

마디마다 움트는 꽃순들 웃는 소리

폭풍 소리로 쓸려간 곡절이 노래가 된다

 

 


 

정연희 시인

충남 홍성에서 출생. 성신여대 국어교육과 졸업. 2007년 《현대시학》을 통해 〈붉은 구상나무의 요술장갑〉외 4편으로 등단. 시집 『호랑거미 역사책』 『불의 정원』 『내 발등에 쏟아지는 숲』.