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차영미 시인 / 여기, 오독이 내리고
마트폰마다 빗방울이 다녀갑니다 장마같은 비, 어디선가 취한 혼잣말이 굴러갑니다 그녀는 행성 사이를 돌고 있고 나는 사람들 사이 간격을 맴돌고 시집이 눅눅한 걸음을 걸어갑니다 그녀는 행성에 잘 도착했을까요?
을 마시고 시를 펼칩니다 우산 떨구는 소리가 들리고 옆 사람이 마스크 안에서 웃습니다 시어들이 나를 쏘아보고 여기는 환승역, 술에 취한 동료가 선을 침범해도 토닥이기로 합니다 집은 우리를 찾을 수 있을까요?
무언가를 잃어버립니다 메모장을 열기도 전에 시어를 잃거나 우산을 잃거나 나이가 들면 두근거리지 않는 선의를 얻기도 합니다 쫑알거리고 지나는 아이를 웃으며 바라보는 그런 것, 어쩌면 버퍼링*이 서성거리는 것, 보일까요?
*완충, 완화 장치. 동영상이 끊어지는 현상이 발생할 때, 일시적으로 데이터를 기억해 다음 데이터와 원활하게 연결시켜 준다.
차영미 시인 / 다이어리
등을 돌리고 있었다 365일이, 달의 궤도를 번득이던 첫날 속에 생일이 있고, 뭉텅 비어버린 날, 가득한 메모 안으로 기억은 사라지고 깊은 펜은 아직 번지지 않았다 누군가가 떠나간 날이 있고
숫자들 사이로 눈에 익은 이름들이 걸어갔다 네가 걸어오던 시간은 표시되지 않았다 오래된 사각거림들, 묵직하게 떨어지는 계절이 번들거리고 변명은 너무 짧았고 빚진 마음은 어디로 보낼까
거꾸로 상상을 기르고 익숙해지지 않는 연습을 시작했다 경로를 이탈하고 포장이 많아지면 페이지를 덮는 것이 쉬워질까
80그램 속지와 빈 다이어리가 각각 도착했다 묵은 인연은 아직 배송 중, 이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차영미 시인 / 아직
고요가 소음을 부르고 지표면으로 내려앉는다 하얀 골목위로 까치 두 마리 걸어다니고 낡은 단풍이 계단을 점령한다 거친 빗자루가 새벽을 쓸고 간 자리 흉터처럼 질긴 눈발을 펼치고 있다 깨진 병 하나 아직 골목 끝에서 퍼석거리고 오토바이 소리 밤새 배달앱을 질주하는 사이,
고장난 감정이 들썩인다 당신을 만나러 가야 할 날짜를 뒤집는다 문자도 볼 수 없는 눈으로 말조차 하지 못하고 병실에 누워 있는, 함께 있어도 말은 점점 줄어들고 기다림은 배반하지 않을까, 말라버린 위로가 숙제처럼 무거워지고 말이 많이 필요한 날 말끝을 자꾸 잘라먹는다
폭설이 오기 전 당신을 만나고 핑계처럼 글썽이면 말없이 토닥이는 마른 손가락 당신, 아직 거기에
-웹진 『시인광장』 2025년 2월호 발표
차영미 시인 / 안부에 대하여
작달비가 종일 내린다 바늘 만한 구멍 사이로 이야기가 빠져나가고 당신에게 묻지 못하는 것은 삼켜지지 않는다 죽어 버린 악의를 대체 어디서 물을 수 있을까?
아침에 부고가 날아오고 죽음이 보도되고 병원 예약 문자가 한 켜씩 쌓인다 위로라는 이름으로 변명을 전하고 한 발자국도 디딜 수 없는 안녕이 돌아다닌다
정물이 되어가는 불안속으로 당신의 침대가 삐걱인다 씨줄과 날실 사이 도피를 꿈꾸던 새벽 너머 도착한 흔적들, 읽지 않은 문자가 졸음을 떨구고
떠날 준비를 했던 당신과, 떠남을 당했던 당신, 소음의 바다를 떠도는 아직 안부를 연습 중인 이름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김종해 시인 /시詩를 버리다 외 6편 (0) | 2025.09.29 |
|---|---|
| 김명은 시인 / 마른 풀잎 부표되다 외 8편 (0) | 2025.09.29 |
| 박제영 시인 / 개밥그릇 외 7편 (0) | 2025.09.29 |
| 이인주 시인 / 암자를 불사르다 외 6편 (0) | 2025.09.29 |
| 권행은 시인 / 잠들지 않는 길 외 6편 (0) | 2025.09.2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