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인주 시인 / 암자를 불사르다
꽃대궁 뻗은 산길 벼랑을 탄다 안간힘으로도 잡히지 않는 수직, 천길 아래 흔들리는 뿌리 바위를 뚫어내린 곳 신흥사 계조암을 오른다 세상 모든 근원이 저토록 단단한 침잠이라면 한 잎 갈대에 기댄 내 등은 새삼 얕은 바람에도 어찌할 바 모른다 캄캄한 억겁 오래 전에 건너온 인연 하나가 내 안에서 간당거린다 이 해독할 수 없는 약한 끈이 나를 지탱해온 명줄이라니!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풍상고초가 절벽에 내리 찧는 단풍으로 쏟아진다 그 풍경의 안쪽 수만 겁 흔들림을 쌓아 만들어진 암자가 있다 마른 나뭇가지 찬 바위에 불꽃을 피우는 영묘한 금당 해거름이 눙치는 빛과 어둠의 은밀한 교합 화들짝 벙그는 한 송이 꽃으로 설악은 있다 뜨거운 공양, 산그늘 한 채 고스란히 살랐다 숨어 피던 명자나무 사뭇 몸 달아 발부리 어쩔 줄 모르는 흔들바위다
이인주 시인 / 깊이
당신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길이 있다
바늘구멍에서 시작된 심방을 엿보는 각방
구멍은 소문이라는 배율을 낳고 구멍은 자해라는 무덤을 낳고
주둥이 터진 말이 밑 빠진 독과 등가일 때 고독은 늙어간다 오독으로 불어난 허기가 굴참나무 가지 끝 하늘마당에 걸리면 온갖 별들이 공중돌기를 한다 질시와 편견 사이 나무를 흔든다
빠지면 죽는 절구통인 줄 모르고 알몸으로 뛰어내리는 도토리
그 무구를 흠모라 부르는가 당신도 견디고 나도 견디는
서로 놀란 등을 맞대고 깎고 또 깎아 만드는 자수정 가장 깊은 밤의 광채를,
나는 알지만 당신은 모르는 길이 있다
-간시전문지 <애지> 2020년 가을호
이인주 시인 / 대립되는 것들의 비늘에 대하여
분액깔때기로 식용유와 물을 분리해내는 실험을 한다 무거운 물층 가벼운 기름층 계급 같은 입자의 비늘에 대해 생각한다 떠돌 수밖에 없는 기름방울 웅크린 채 장력 펼치는 물방울 계통도를 훑어 올라가면 싱싱한 민생 어족의 비늘 한 움큼 슴벅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둔한 내 손기술로 층과 층을 살포시 걷어낸다 자칫 흔들리면 보이지 않던 비늘들 일시에 곤두선다 눈부신 저항을 위해 오래 감추어온 가스라기들 아우성을 본다 살아 있다는 건 저렇게 감춰지지 않는 반대급부가 한순간 빛으로 날아오르는 것 그리고 이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 층 아래층을 걷어내며 가벼운 것들의 요동과 무거운 것들이 받쳐내는 조용한 어룽을 본다 팽팽하게 맞선 힘들의 경계면 물살 차고 오를 열목어 같은! 잠시 숨 모두고 바라보면 찬란하게 고집하는 어떤 응어리가 열림콕 끝 무지개다
이인주 시인 / 빈자리
아들이 선인장 세 개가 심어진 화분을 보내왔다
아빠뿔 엄마뿔 아기뿔이라 이름지었다
한 달이 지나 엄마뿔이 병들어 아리게 뽑아냈다
막강한 뿔이 두 개나 건강하니, 랄라
엄마는 행복했다
이인주 시인 / 茶山에 기대어
초당에 앉아 한나절 蓮池를 바라본다 못물에 풀린 구름이 저보다 환한 하늘을 삼키고 시치미 뗀다 눈치 챈 금빛 잉어가 주둥이를 내밀어 다급한 맥박을 전한다 공중에 흩어지는 물고기의 숨 같은 초서들, 이 식어갈 때 애써 원망하지 않는다 눈귀를 닫아건 세상과 고인 세상에 몸 적시는 그대들도 나도 탁한 당쟁의 못물에 갇혀 어지럼증 앓고 있나니, 이 아픈 耳鳴을 언제쯤 풀거나 공명도 부귀도 이미 먼 북방의 풍문처럼 아득하고 나는 한갓 시골벽지에 몸이 매인 몸 문지방을 넘은 뜻만 하늘만큼 자라 날마다 펼 수 없는 부피를 韓紙에나 넓힐 뿐 바람을 갈아 칼을 벼린들 무엇 하나 내가 쳐내야 할 숲은 난마로 얽혀 밤이면 가슴에 채이는 물소리가 쇠 끓는 소리처럼 나를 끓이는데.... 목민심서, 목멘 심사... 오후엔 우이봉에 올라 멀리 흑산도를 바라본다 파도에 홀로 몸 말리고 있을 형님, 나보다 뜻이 깊고 진중한 군자의 표현에 닿으려 굽이굽이 격랑이는 편지를 띄운다 뜻은 같으나 몸이 같지 않음의 비애를 이리도 한합니다 대장부 한 세상이 광풍에 찢기는 돗 폭 같습니다 갈매기 떼가 한 하늘을 이등분하며 다시 전하지 못할 말을 물고 섬 쪽으로 가라앉는다 황혼이 마지막 기운을 동백 숲으로 쏟아 붓는다 내 기어이 오늘밤엔 울혈의 사연 밀어 올리는 저 동백의 숨은 개화를 엿보리라 우련한 달빛 등지고 붉은 꽃눈을 닮은 처사 하나가 백련사로 접어든다
이인주 시인 / 잉여
늦둥이 하나 낳으면 잉여라고 이름 짓겠다 떨어지지 않는 애물단지 과분하게도 가치창출의 꽃이라네 넌출넌출, 홍냥홍냥 이 가지 저 가지 앵겨붙는
귀룽열매 눈망울 순한, 햇빛 좋은 날 소풍 같은 아이야
사랑이 밑밥인 밥통잉여가 엄마의 업이다 월척의 꿈 놓아건지는 낚시다 너는 전승의 꽃가지를 확, 분질러 버리거라 장벽이나 구획 따위에 물리지 않는
잉여, 물색 다른 그님은 한 생이 붕어해도, 잉어해도 해갈 안 되는 물고기
우리는 소시랑게 눈흘김 얄랑얄랑 너름새 넣어 노들강변 한허리 감아 도는 잉어이고 싶었다
한목숨 수족관 잉여로 치부되기는 순간이란다 저인망 논리가 바닥가지 털기 전에 절체절명이여, 그 아리아리한 효율 토란 알토란 낳기를!
이인주 시인 / 그 새가 사는 법
새는 입을 열지 않는다 새는 음악을 몸으로 산다 새는 나뭇가지에 앉지만 체중을 싣지 않는다 간혹 잎사귀 사이로 숨는 바람을 날쌘 부리가 번역해낸다 가지와 가지를 건너뛰어 우듬지에 앉는 새 물관 속에 흐르는 집을 짓는 새 똥을 갈겨 뿌리를 실하게 돋우기까지 사계절이 필요하다 공중에 뜬 길을 나무에 앉히려 날개의 첫음절이 하늘에 닿는 날 나무가 뿌리째 흔들린다 위기에서 위기로 지를지를 둥지에서는 알아챌 수 없는 분절음 눈빛만 봐도 깃털의 부류를 짐작해내는 새의 수장은 날마다 지푸라기 경전을 쉴 새 없이 엮는다 순종과 잡종 사이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지푸라기를 발견한 새가 경전을 물려받아 새 왕국을 열어간다 새는 입을 열지 않는다 새의 몸엔 춤을 알아보는 각이 있다 새는 꽃 진 자리에 앉지만 오달진 열매를 쪼아 먹는다 간혹 잎사귀 사이로 터진 하늘을 감은 눈이 읽어낸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차영미 시인 / 여기, 오독이 내리고 외 3편 (0) | 2025.09.29 |
|---|---|
| 박제영 시인 / 개밥그릇 외 7편 (0) | 2025.09.29 |
| 권행은 시인 / 잠들지 않는 길 외 6편 (0) | 2025.09.29 |
| 이지호 시인 / 읍소하는 남자 외 6편 (0) | 2025.09.29 |
| 신명옥 시인 / 플라토닉 러브 외 7편 (0) | 2025.09.2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