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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인주 시인 / 암자를 불사르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9.
이인주 시인 / 암자를 불사르다

이인주 시인 / 암자를 불사르다

 

 

꽃대궁 뻗은 산길 벼랑을 탄다

안간힘으로도 잡히지 않는

수직, 천길 아래

흔들리는 뿌리 바위를 뚫어내린 곳

신흥사 계조암을 오른다

세상 모든 근원이 저토록 단단한 침잠이라면

한 잎 갈대에 기댄 내 등은

새삼 얕은 바람에도 어찌할 바 모른다

캄캄한 억겁 오래 전에 건너온

인연 하나가 내 안에서 간당거린다

이 해독할 수 없는 약한 끈이 나를 지탱해온 명줄이라니!

주마등처럼 스쳐가는 풍상고초가

절벽에 내리 찧는 단풍으로 쏟아진다

그 풍경의 안쪽

수만 겁 흔들림을 쌓아 만들어진 암자가 있다

마른 나뭇가지 찬 바위에 불꽃을 피우는

영묘한 금당

해거름이 눙치는 빛과 어둠의 은밀한 교합

화들짝 벙그는 한 송이 꽃으로 설악은 있다

뜨거운 공양, 산그늘 한 채 고스란히 살랐다

숨어 피던 명자나무 사뭇 몸 달아

발부리 어쩔 줄 모르는 흔들바위다

 

 


 

 

이인주 시인 / 깊이

 

 

당신은 알지만 나는 모르는 길이 있다

 

바늘구멍에서 시작된

심방을 엿보는 각방

 

구멍은 소문이라는 배율을 낳고

구멍은 자해라는 무덤을 낳고

 

주둥이 터진 말이 밑 빠진 독과 등가일 때

고독은 늙어간다 오독으로 불어난 허기가

굴참나무 가지 끝 하늘마당에 걸리면

온갖 별들이 공중돌기를 한다

질시와 편견 사이 나무를 흔든다

 

빠지면 죽는 절구통인 줄 모르고

알몸으로 뛰어내리는

도토리

 

그 무구를 흠모라 부르는가

당신도 견디고 나도 견디는

 

서로 놀란 등을 맞대고

깎고 또 깎아 만드는 자수정

가장 깊은 밤의 광채를,

 

나는 알지만 당신은 모르는 길이 있다

 

-간시전문지 <애지> 2020년 가을호

 

 


 

 

이인주 시인 / 대립되는 것들의 비늘에 대하여

 

분액깔때기로 식용유와 물을

분리해내는 실험을 한다

무거운 물층 가벼운 기름층

계급 같은 입자의 비늘에 대해 생각한다

떠돌 수밖에 없는 기름방울

웅크린 채 장력 펼치는 물방울

계통도를 훑어 올라가면

싱싱한 민생 어족의 비늘 한 움큼

슴벅이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둔한 내 손기술로 층과 층을

살포시 걷어낸다 자칫 흔들리면

보이지 않던 비늘들 일시에 곤두선다

눈부신 저항을 위해

오래 감추어온 가스라기들

아우성을 본다 살아 있다는 건 저렇게

감춰지지 않는 반대급부가 한순간

빛으로 날아오르는 것 그리고 이내

서늘하게 가라앉는 것

층 아래층을 걷어내며

가벼운 것들의 요동과

무거운 것들이 받쳐내는 조용한 어룽을 본다

팽팽하게 맞선 힘들의 경계면

물살 차고 오를 열목어 같은!

잠시 숨 모두고 바라보면

찬란하게 고집하는 어떤 응어리가

열림콕 끝 무지개다

 

 


 

 

이인주 시인 / 빈자리

 

 

아들이 선인장 세 개가 심어진 화분을 보내왔다

 

아빠뿔 엄마뿔 아기뿔이라 이름지었다

 

한 달이 지나 엄마뿔이 병들어 아리게 뽑아냈다

 

막강한 뿔이 두 개나 건강하니, 랄라

 

엄마는 행복했다

 

 


 

 

이인주 시인 / 茶山에 기대어

 

 

초당에 앉아 한나절 蓮池를 바라본다

못물에 풀린 구름이 저보다 환한 하늘을 삼키고

시치미 뗀다 눈치 챈 금빛 잉어가 주둥이를 내밀어

다급한 맥박을 전한다 공중에 흩어지는

물고기의 숨 같은 초서들, 이 식어갈 때 애써 원망하지 않는다

눈귀를 닫아건 세상과 고인 세상에 몸 적시는

그대들도 나도 탁한 당쟁의 못물에 갇혀 어지럼증

앓고 있나니, 이 아픈 耳鳴을 언제쯤 풀거나

공명도 부귀도 이미 먼 북방의 풍문처럼 아득하고

나는 한갓 시골벽지에 몸이 매인 몸

문지방을 넘은 뜻만 하늘만큼 자라

날마다 펼 수 없는 부피를 韓紙에나 넓힐 뿐

바람을 갈아 칼을 벼린들 무엇 하나 내가 쳐내야 할 숲은

난마로 얽혀 밤이면 가슴에 채이는 물소리가

쇠 끓는 소리처럼 나를 끓이는데.... 목민심서, 목멘 심사...

오후엔 우이봉에 올라 멀리 흑산도를 바라본다

파도에 홀로 몸 말리고 있을 형님,

나보다 뜻이 깊고 진중한 군자의 표현에 닿으려

굽이굽이 격랑이는 편지를 띄운다

뜻은 같으나 몸이 같지 않음의 비애를 이리도 한합니다

대장부 한 세상이 광풍에 찢기는 돗 폭 같습니다

갈매기 떼가 한 하늘을 이등분하며 다시 전하지 못할 말을 물고

섬 쪽으로 가라앉는다 황혼이 마지막 기운을 동백 숲으로 쏟아 붓는다

내 기어이 오늘밤엔 울혈의 사연 밀어 올리는

저 동백의 숨은 개화를 엿보리라 우련한 달빛 등지고

붉은 꽃눈을 닮은 처사 하나가 백련사로 접어든다

 

 


 

 

이인주 시인 / 잉여

 

 

늦둥이 하나 낳으면 잉여라고 이름 짓겠다

떨어지지 않는 애물단지

과분하게도 가치창출의 꽃이라네

넌출넌출, 홍냥홍냥

이 가지 저 가지 앵겨붙는

 

귀룽열매 눈망울 순한, 햇빛 좋은 날 소풍 같은 아이야

 

사랑이 밑밥인 밥통잉여가 엄마의 업이다

월척의 꿈 놓아건지는 낚시다

너는 전승의 꽃가지를 확, 분질러 버리거라

장벽이나 구획 따위에 물리지 않는

 

잉여, 물색 다른 그님은

한 생이 붕어해도, 잉어해도 해갈 안 되는 물고기

 

우리는

소시랑게 눈흘김 얄랑얄랑 너름새 넣어

노들강변 한허리 감아 도는 잉어이고 싶었다

 

한목숨 수족관 잉여로 치부되기는 순간이란다

저인망 논리가 바닥가지 털기 전에

절체절명이여,

그 아리아리한 효율 토란 알토란 낳기를!

 

 


 

 

이인주 시인 / 그 새가 사는 법

 

 

새는 입을 열지 않는다

새는 음악을 몸으로 산다

새는 나뭇가지에 앉지만 체중을 싣지 않는다

간혹 잎사귀 사이로 숨는 바람을 날쌘 부리가 번역해낸다

가지와 가지를 건너뛰어

우듬지에 앉는 새

물관 속에 흐르는 집을 짓는 새

똥을 갈겨 뿌리를 실하게 돋우기까지 사계절이 필요하다

공중에 뜬 길을 나무에 앉히려

날개의 첫음절이 하늘에 닿는 날

나무가 뿌리째 흔들린다

위기에서 위기로 지를지를

둥지에서는 알아챌 수 없는 분절음

눈빛만 봐도 깃털의 부류를 짐작해내는 새의 수장은

날마다 지푸라기 경전을 쉴 새 없이 엮는다

순종과 잡종 사이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지푸라기를 발견한 새가

경전을 물려받아 새 왕국을 열어간다

새는 입을 열지 않는다

새의 몸엔 춤을 알아보는 각이 있다

새는 꽃 진 자리에 앉지만 오달진 열매를 쪼아 먹는다

간혹 잎사귀 사이로 터진 하늘을 감은 눈이 읽어낸다

 

 


 

이인주 시인 (1965-2021)

1965년 경북 칠곡 출생. 경북대 화학과 및 同 대학원 졸업. 2003년 《불교신문》 신춘문예와 2006년《서정시학》을 통해 등단. 시집 『초충도』. 2002년 수주문학상, 2003년 신라문학대상, 2008년 평사리문학대상, 2010년 목포문학상 수상. 대구 정화중학교, 정화여고 교사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