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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지호 시인 / 읍소하는 남자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9.
이지호 시인 / 읍소하는 남자

이지호 시인 / 읍소하는 남자

 

 

한 남자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있네

한 남자는 손을 맞잡고 연신 조아리고 있네

날개를 접고 지상에 내려앉은 비둘기.

아이가 먹다 흘린 과자 부스러기를 먹고 있네

흔들리는 목적이 있어야 접었다 폈다 하는 날개가 있네

간절함이 가득 묻어 있는 손

불안한 손바닥끼리 맞잡고 있네

맞잡는다는 것, 혼자서도 가능한 일이네

기울어진 중심점은 비굴함 쪽으로 기울어져 있네

상대의 열려 있는 틈으로

사내의 비굴함이 들어가려 안간힘을 쓰고 있네

또르르 떨어지는 나뭇잎에 펴졌던 날개의 기억은 날아가고

휘휘 젓는 아이 손에 눈치만 보고 있는 날개

얼음도 녹일 것 같은 뜨거움이 손에 가득하네

축축한 땀이 배어 나오는

가랑비같이 속을 알 수 없는 손이네

저 포개진 손에서 얼마나 많은 좌절이 들었다 갔는지

세상의 온갖 허전함을 다 맛 본 손

좁은 틈에 껴 있는 먹이를 낚아채듯

차가운 비굴이 손을 빠져 나가네

말과 다르게 미끄럽지 않은 비굴이네

이 비굴을 아껴야겠다는 듯

주머니에 양손을 넣고 사내가 걸어가네

뒤뚱거리다 종종거리는 비둘기 같네

 

 


 

 

이지호 시인 / 그날에

 

 

마른 울음을 움켜쥔 두 손 마주할 수 없어

낮게 더 낮게 허리 구부리다 엎드립니다

 

이지러진 인간의 섬뜩한 손길에

비뚤어진 폭력의 악랄한 발길에

해사한 열다섯 소녀는 죽음 같은 죽음을 살았습니다

꽃의 이름에 남겨진 멍에는 다시 꽃으로 피어납니다

어둠을 풀면 길고 긴 숨결이 풀려나오고

달은 차오르듯

사람이 사람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맨발

 

끊임없이 묻는 말이 진심 어린 사과로 돌아오는

그날에

일어서겠습니다

 

 


 

 

이지호 시인 / 오전의 무게를 올려놓습니다

 

 

일반 우편 오전은 느리기만 합니다

특산품 견본이 유일한 장식이지요

사서함 칸칸마다 늦은 며칠이 들어 있어요

마분지 서류 봉투로 마을의 덧문은 열릴까요

송곳 개성도 대패로 밀었을

취급소 직원, 햇살이 은니에 묻어 있습니다

문자의 무게를 재는 직

오늘도 몇 번 저울 근처에 손이 갔지만

한 번도 말을 올려놓은 적 없습니다

몇 편의 시를 올려놓고 수십 번

그건 다만 문자의 무게일 뿐일까요

늘 날아간 답신

 

맑은 날에는 흘러가는 작은 구름 떼어다 붙이고

흐린 날에는 먹구름 몇 장 붙여 놓는

 

고정된 주소가 있다는 위안으로

오전의 무게가 몰리는 곳

 

뒤늦은 선풍기가 왕복할 때마다 우편 번호 책

충청남도 어디쯤엔 강풍이 심하게 불고 있습니다

철마다 피는 꽃들

오늘의 우표는 노란 국화꽃입니다

 

우편 차가 출발하고

앞마당 그늘이 따라갑니다

몇 그램의 시가 날아간 오전입니다

 

 


 

 

이지호 시인 / 독거

 

 

 오이넝쿨 사이

 말라 있는 꼭지, 더 이상 줄기도 없는 꽃의 한 지점을 지키고 있다

 

 방문은 문밖 외부로부터 온다 안으로 찾아오는 이 없이 꼭지 쪽 방문이 전부다

 

 무성하던 이파리 시들고 말라 가는 꼭지에도 늙은 오이는 제 속내를 식량으로 질기게 견딘다

 

 조로증 환자 같이 겉만 늙은 품종이 있다 탱글탱글 씨앗과 촉촉한 물 살 깎아 보면 여전히 속은 푸르다

 

 노각을 다듬어 무치면 아삭아삭하고 향긋한 맛 친정엄마 말소리 같고 어적어적 쌉쌀한 맛 시어머니 눈매 같다

 

 친정엄마와 시어머니가 같이 들어 있는 맛 늙은 맛이 이렇게 맛있는 줄 몰랐다 맛에도 양쪽의 맛이 들어 있어야 맛있다는 것을 알았다

 

 푸르던 잎 꼭지도 지고 찾아오는 이 없는 끊어진 양쪽의 맛

 동기간 끊어진 늙은 오이가 오늘 아침 모로 누워 미동도 하지 않는다

 

-시집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 2021. 걷는사람 시인선

 

 


 

 

이지호 시인 / 색色을 가지다

 

 

푸른 그늘 밑으로 오디가 쏟아진다

생리 중이다

붉게 물든 오디물이 질기다

 

뽕나무 사이 숨어서 처음 오디를 따먹던

단맛보다 손맛으로 자꾸 따는 습관이

가슴으로 옮겨 오면서

며칠 동안 내 말에는 검붉은 물이 들어 지워지지 않았다

후드득 떨어지던 열다섯

 

처음으로 色을 가진다는 것

 

말은 빙빙 도는 걸 즐겨 기억을 따르지 못한다

어느 풀숲으로 쓰러져도

그 풀숲의 색이 되어야 하는

계절을 몸에 모신다는 것

 

수평선을 바라보는 의자처럼 바람 속에 오래 있었다

구름을 보고도 문득 色이 찾아노는 날을 세고

 

개인 날, 나머지 계절의 그늘이 말라간다

부끄럽지 않다는 듯

소리를 떨어내는 오디의 후일

낮은 달이 나무 사이를 지나는 때

유난히 반짝이는 눈동자가 잠시 한눈을 판다

 

지금쯤 오디가 후드득 떨어질 때가 되었다

 

-시집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 2021. 걷는사람 시인선

 

 


 

 

이지호 시인 / 돼지들

 

 

 어느 날 돼지들이 사라졌다.

 노란 우의를 입은 사나이가 피리를 불었다고 했다. 꽥꽥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며 돼지들이 따라나섰다고 했다. 돼지를 몰고 가는 바람의 목관에 몇 개의 구멍이 있었다고 했다. 그 구멍 속으로 돼지들이 산 채로 묻혔다고 했다.

 마을에 낯선 투명한 음계들이 떠다닌다.

 마을의 지하 군데군데가 팽창하고

 증오는 모두 네 개의 발자국을 가졌다는 소문이 돌고

 막걸리잔에 붉은 핏발들이 가라앉았다.

 골목엔 안개가 돌아다니곤 했다고 했다. 그 위로 은하 같은 봄꽃이 떨어지고 몇몇은 돼지발굽 모양이라고 우기기도 했다.

 돼지들이 사라진 마을에 꽥꽥대는 고요가 돌아다닌다고 했다. 텅 빈 돈사마다 기르던 예의를 가두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고 했다.

 병든 발굽을 하고 봄이 지나가고 음계의 어느 쉼표에도 돼지들이 살지 않는다.

 포클레인 몇 대가 지방도를 따라 꽥꽥거리며 지나갈 뿐

 사라진 돼지들이

 우적우적 마을을 먹어치우고 있다.

 그리고 어제

 최씨 성을 가진 한 사내가 빈 돈사에 목장을 맸고 오늘 마을 입구로 포클레인 한 대가 천천히 들어오고 있다.

 

- 2011년 <창작과비평> 신인상 당선작

 

 


 

 

이지호 시인 / 조각보 田

 

 

뒷산에 올라 정성스럽게 꿰어진 조각보를 본다

한 조각 한 조각

단단한 알곡이 한 살림 질펀하게 차렸던 곳

빈 땅

조각보가 빈 계절을 덮고 있다

누군가의 귀가를 기다리는 듯

바람의 차가운 숨결에 귀 내어 놓는다

밤마다 조각보를 지으며

한 땀 한 땀

상침질로 식구들을 하나로 연결하는 손길

고왔던 연분홍 한철도 붙어 있고

뒤뚱거렸던 아이의 지나간 시간이 남아 있는 드레스 한 자락도 붙어 있다

몸을 거쳐 간 것이 조각보를 만든다

밥상 위에 빈 시간을 덮고 있는 조각보

불과 몇 시간 전에도 치열했던 밥상이

휴식에 든 땅처럼

바람의 발자국 소리라도 앉히려 하지만

형체가 없는 것들은 머무르는 것을 거부한다

밖으로 말라가는 희미한 걸음의 귀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저 곳은

갈색의 단색처럼 보이지만

알고 보면 무수히 많은 색들이 경쟁하던 곳

지금은 휴식이나 새참이 있던 곳에

빈 밥상처럼 나무들이 간혹 서 있을 뿐이다

태산처럼 무거운 질문에 깃털처럼 가벼운 답변같이

보일 듯 말 듯 덮고 있는 조각보가

묵묵히 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아토포스』2022-겨울(창간)호

 

 


 

이지호 시인

1970년 충남 부여 출생. 충남대학교 식품영양학과 졸업.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대학원 석사 졸업. 2011년 제11회 《창비신인시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말끝에 매달린 심장』 『색색의 알약들을 모아 저울에 올려놓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