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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서지월 시인 / 슬픈 밤이 오거든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8.
서지월 시인 / 슬픈 밤이 오거든

서지월 시인 / 슬픈 밤이 오거든

 

 

슬픈 밤이 오거든

그대여

창을 열고 별을 보라

 

나는 거기 지상의 괴로운 꽃으로

피었다가 하늘의 별 되어

울고 있으리니

 

그대가 만약 창을 닫고

쪼그리고 앉아 하염없이 명상에

잠기신다면

나는 나는 별 사닥다리 타고 내려와

 

그대 창가 부서지는 이슬 되리니

밤은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가슴과 같은 것

 

실로 우리가 우리의 가슴을

어루만지지 못할 때

그대는 지상에서

나는 하늘에서 하염없는

눈물 흘리리

 

 


 

 

서지월 시인 / 밥그릇​

 바람이 부는 것은

 몇 천년 전이나 지금이나 꼭 같다.

 단군할아버지짓적 박달나무 가지끝에서부터

 불던 바람이

 하사받듯 차례로 징검다리를 건네온 것이

 目下, 수 천년

 귓구멍 뚫린 콧구멍 뚫린

 살풀이 한다.

 바람 부는 날, 청솔방울

 몸 데울 때는

 다락에 올라서 피리를 불자

 밥그릇이 넘치도록 피리를 불자.

 밥상 위의 밥그릇,밥상 밑에 밥그릇, 부뚜막 위에 밥그릇, 부뚜막 밑에

 밥그릇, 장독간에 밥그릇, 마당가의 개밥그릇..…

 어디를 가나 밥그릇은 하나씩 놓여 있다.

 하나씩 놓여 있는 밥그릇에 六情의

 唐菊花는 피고​

 한 그릇씩 한 그릇씩 떠받들여 온 香불, 숙원이여.

 내 물려받은 하나의 밥그릇에도

 朝夕으로 김이 서리고

 그 唐菊花같은 香불같은

 풀리지 않은 새벽 강의 김이 서리어

 바다로 밀려난 뱃머리에서나

 산으로 올라간 상여꾼의 북소리 끝에도

 그 김이 서려 있는 걸 나는 보았다.

 오늘 아침 밥상 위에도 맨 그 검은 서리고 새 바람 아닌 새 바람이 이 밥그릇으로 내림하는 수작을 알아차린 나는 두 귀가 번쩍 띄었다.

 

 


 

 

서지월 시인 / 내 첫사랑 女子의 외가집 산골의 흐릿한 날 밤

- 그 열일곱번째 시​

 

내 첫사랑의 외가집 산골에

내 손톱 깎아준 응경이와 함께 어느날 밤

별도 없는 흐릿한 날 밤 찾아가

오돌오돌 떨면서 개울가에 자리깔고 앉아

한참이나 주위를 빙 둘어보았는데도

잎 다진 나무와 텅빈 숲 그리고

으시시한 적막이 우릴 자꾸 에워싸고 있었는데요

눈이 올듯 하면서도 눈이 오지 않는 하늘에서는

世上事는, 이와 같이 만났다가 언제

헤어질지 모르는 거라고 우리 둘만의 비밀로

눈 딱 감고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았는데도

바라뵈는 산등성이가 응경이의 가는 허리 같았고요.

발아래 깔린 시냇물 소리는

살아있다는 증거하나로 우리가 추운 날씨에도

견디어낼만한 체온의 살데우는 피의 흐름 같았어요

말은 안해도

누워있는 저 산등성이는 그대로 누워있는것 같지만

안으로는 우리와 같이 꿈틀대는 미동이 있어

오랜 세월을 지탱해 온 게 아닐까요

지금은 바람 한 줄기 불지 않고

가녀린 떨림만 옷깃을 여미게 하는 밤이지만 말이어요

 

 


 

 

서지월 시인 / 새각시풀꽃

 

 

시절 좋을 때 꽃가마 타고

시집갔을 새각시풀꽃

연지도 안 찍고 풀밭에

나앉아 있네

 

조랑말 타고 오던 신랑

민들레꽃 새길 난 사잇길로

무슨 일 있어 고삐돌려

비켜가 버렸나

 

헌신짝 같은 낮달을

명경처럼 치어다보며

새각시풀꽃 저만이 피어서

울고 앉았네

 

 


 

 

서지월 시인 / 세월

 

 

저 나무들이 아프고

저 풀잎들이 아프고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 소리가 아프다

 

자작나무 가지를 옮겨 다니는

새소리가 아프고

바위틈 기어 오르는 다람쥐

발바닥이 아프고

 

빠져나가는 개울물 소리가 아프고

건너다 보이는 비탈의

꽃나무 앉은 걸음이 아프고 아프다

 

 


 

 

서지월 시인 / 쪽빛 하늘

 

 

1.

그리움에 사무치면 저런 빛깔일까

오늘따라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었네

사랑이여, 어디에서 방황하고 있는가

새들도 날아와 깃을 치는데

그리움이 물들면 저런 빛깔일까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어 말이 없네

 

2.

그리움에 눈 감으면 저런 빛깔일까

오늘따라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었네

사랑이여, 어디에서 눈물짓고 있는가

나비들도 날아와 꽃을 찾는데

그리움이 지치면 저런 빛깔일까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어 말이 없네

 

3.

그리움에 맘 달래면 저런 빛깔일까

오늘따라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었네

사랑이여, 어디에서 침묵하고 있는가

바람도 불지 않고 허공뿐인데

그리움이 병들면 저런 빛깔일까

하늘은 쪽빛으로 물들어 말이 없네

 

 


 

 

서지월 시인 / 여름비

 

잠 오지 않는 밤 내게

비가 또닥또닥 내리고 있다고

말해준 사람이 있었네

 

그 女人을

남들도 이쁘다고 하는데

멍든 풀잎세월 함께 해 온건 아니지만

 

호젓한 산길 가다가

이름없는 풀대궁에

산나비 한 마리 찾아와 앉듯

그렇게 만나는게 인생이듯

 

아아, 비 한 방울 오지 않는

사막같은 내 마음에

이제, 비가

또닥또닥 내리고 있어요

 

 


 

 

서지월 시인 / 달맞이꽃과 철조망

 

 

언제부턴가 달맞이꽃이 철조망을

넘어다 보고 있었습니다

철조망은 달맞이꽃이 자신을 의식하고

있는지, 아는 듯 모르는 듯 꿈이 푸른 옥수수밭

옥수숫대 키우기에 여념 없었습니다

 

휘돌아 흐르는 두만강은 반백년 넘도록

그대로인 물굽이를 이루며 수많은

잔돌들을 품안에 안았다 버렸다 하며

누워 흐르긴 마찬가지였습니다

 

달맞이꽃이 두만강 이쪽에서 철조망 저쪽을

목 빼들고 넘어다 보고 있습니다

철조망이 달맞이꽃을 가로막고 있는 것 보면

둘이서 해결할 일이 아닌 듯 싶습니다

 

-만주기행시 「두만강에서 부르는 노래」에서

 

 


 

서지월 시인

1955년 대구 달성 출생. 대구대학교 국어교육 학사. 1985년 《심상》, 《한국문학》 신인작품상에 시가 당선 되어 등단. 시집 『江물과 빨랫줄』 『소월의 산새는 지금도 우는가』 『백도라지꽃의 노래』 『지금은 눈물의 시간이 아니다』 등. 현재 대구시인학교, 한중문예창작대학 지도시인. 2002년 중국 장백산문학상 등을 수상. 한민족사랑문화인협회작가회의 공동의장.  남서재 대구시인학교 지도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