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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선 시인 / 정동진
바다는 흑암 속 거친 숨소리로 수평선까지 달려가 하늘과 몸 섞으며 밤새 뒤채이다가 밝아오는 날빛에 흥건히 붉은 양수 터뜨리며 불끈 힘주어 햇덩이 순산하고는 알몸으로 퍼질러 앉아 절절 땀 흘리며 미역국 마시고 있다
정영선 시인 / 논우렁이
온 몸 비틀어 제 살 속 잉태한 모래알 같은 새끼들 목젖 아프게 토해놓고 허물어지는 육신아
철없는 새끼들 식어빠진어미 속살 마지막 한 점까지다 뜯어먹고 늑골 넓히며 우렁우렁 등껍질 키워갈 때
둥둥, 물 위로 떠오르는 껍데기 살아 온 날 결코 가볍지 않은 뜨거운 생의 무게
정영선 시인 / 주남저수지에 와 보시라
그대, 주남저수지에 와 보시라 가을날 조붓한 코스모스 길 밟으면 손끝에 와 닿는 순금빛 들판 서툰 소리꾼의 휘몰이 장단에 머리채 흔드는 억새 풀섶에 겅중대는 다리긴 방아깨비 호수에 잠방대는 물잠자리 흘레에 물빛도 숨 멎나니
그대, 주남저수지에 와 보시라 해질녘 호젓이 둑길 걸으면 노을이 맨몸 담글 때 붉어지는 호수의 낯빛 간당간당 가지 더 늘어뜨리는 수양버들 앞서거니 뒤서거니 꽁무니 좇는 쇠물닭 새끼들 어둠을 끌어당기는 가창오리 군무 지우며 그려내는 바람의 물무늬에 그대 취하리니
그대, 무시로 주남저수지에 와 보시라 날빛 따라 옷을 갈아입는 호수는 비 오면 오는 대로 갠 날은 갠 대로 그가 풀어내는 몸짓과 언어가 다르며 아침과 한낮, 저물녘 표정과 메시지 또한 다른 주남저수지에 그대 한번 빠져보시라
정영선 시인 / 바람새로 우는
흑 흑, 바람의 혼이 울고 있다
어디서 왔는지 나뭇가지에 우쭐대며 물구나무 서는 바람 신들린 듯 칼춤 추다 꼬리 감추는 바람 모두 떠난 가지 끝에 쪼그려 머리채 흔들며 우는 또 다른 바람
한번 떠난 바람씨는 돌아올 줄 모르는데 바람 맞은 여자는 또 다른 바람 낳아 헛바람 콧바람 엉덩잇바람으로 묏바람 들바람 냇바람이 들어 소소리바람 건들바람 된바람 몰아치다 길바닥에 치마 벗고 회오리바람으로 나뒹굴다 떠난 자리
바람새로 우는 그대
정영선 시인 / 꽃멀미나 할란다
이 봄날, 섬진강으로 핸들잡은 바람난 여자가 간다 늘상 고향 쪽으로 벋어있는 촉수에 꽃 기별 와 저당 잡힌 내일의 태엽 풀어 달려간다, 가서 꽃멀미나 할란다
휘어진 섬진강 허리춤에 감겨 모롱이 돌 때마다 뭉텅뭉텅 안겨오는 분내음 진저리나게 피어 꽃 사태 난 매화 향에, 나 꽃멀미나 할란다
화개장터 지나 구례마을 산수유 푸수수 꿈꾸는 꽃 돌담 위 아른거릴 때 골목길 걷다 말고 꽃그늘에 앉아 무심코 올려다보면 노란 멀미 아득 이는
쌍계사 십리 벚꽃 타닥타닥 팝콘처럼 튀면 무장무장 따라 피는 순백의 하동 배꽃 강바람에 하롱하롱 흰나비로 날으는 실컷 나 꽃멀미나 할란다
꽃자리같이 내 탯줄 자른 땅 꽃내에 취해 스러져나 볼란다
정영선 시인 / 슬픈 짐승*
지하철 계단에 얼굴 묻고 동그랗게 말은 몸에게 먼지 속에 서서 이 먼지, 저 먼지를 쫓아 전단지 내미는 손에게 신발이 편해야 한다는 발의 노래를 들려준 게 오늘 한 일이다
채널마다 비추는 아프리카 아이들의 큰 눈은 물동이를 인 빼빼로 검은 여인은 왜 그리 빨리 마음을 횡단하고 잊히는가 새벽 깬 잠은 왜 이리 오래 마음에 눌러 앉아 한 뼘 잠을 연연해하는가 오늘 한 고민이다
검은 털의 짐승에 가슴이 씹힌 걸까 흡혈귀에 피를 빨리면 흡혈귀 되듯 무정에 물려 무정이 된듯
꽃으로 눌러 놓은 짐승이 기지개를 켠다 둘레를 유리벽으로 두른 우리에 쪼그리고 앉아 자기애로 말린 공벌레 사람이 그리울 때면 불빛 찾는 염소 두려우면 숨는 생쥐 먹이에 울어대는 하이에나를 본다
펼친 기억의 층층 페이지에 활자가 없다 따뜻한 심장 뜨거운 열정인 줄 알았던 건 모두 붉은 꽃에서 빌린 이미지
웃음 담은 열기구를 올린 듯 위에서 마구 웃어댄다
짐승에 송두리째 먹힌 걸까
안에 있는 내가 밖의 짐승을 거울 보듯 본다
*모니카 마돈의 소설 제목에서 빌려옴.
-계간 『모든 시』 2019년 여름호 발표
정영선 시인 / 아름다움이 우리를 구원할 때
무늬목으로 가린 골목 저쪽에 그는 살고, 나는 이쪽에 산다 동에서 서만큼이나 먼 우리의 양극을 양팔 벌려 안는 은행나무가 서 있다
늦가을 비 오면 우수수 쏟아지는 은행잎 비를 우산 받고 가는 뒷모습을 보인다 그는
오고 간 아픈 말들 빙벽을 사이에 둔 애정이 가을 외투를 한 겹 껴입는 기억은 아름답다 핸드폰이 불러오는 돌담을 넘는 꽃나무 사진처럼
등의 빨간 방울을 본 적 없어 무당벌레만 모르는 무당벌레의 무늬처럼
우리 사는 아름다움을 우리만 모를 때가 있지 않을까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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