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권이화 시인 / 흔들의자가 있는 여름궁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8.
권이화 시인 / 흔들의자가 있는 여름궁전

권이화 시인 / 흔들의자가 있는 여름궁전

 

 

계단을 내려가듯이 계단을 올라가듯이

 

풍선을 안고 두근두근 숲속으로 들어가는 것

나비가 태양의 물가로 나와 나풀나풀 날아보는 것

광대 같은 얼굴로 대리석 기둥에 서서 나팔을 부는 것

그 여름 신들의 정원에 간 적 있었지

 

둥글고 단단한 손으로 꽃을 가꾸다 새를 키우다

우리도 모르는 어둠에 갇힐 때

나는 흔들의자가 있는 궁전에 있다

마음밖에 갈데없어 어둠을 다 먹어치워야 할 때

그 여름의 비밀 같은 궁전

 

캄캄해지는 저녁의 숲으로 나비가 날아온다

어둠을 끌고 가는 별처럼 질문처럼

서로 다른 말로 찬란히 넘어져 뒤돌아볼 때

 

계단을 올라가듯이 계단을 내려가듯이

정오를 알리는 금빛 돔의 종소리

 

이따금씩 떠오르는

여름궁전 같은 것이 문을 열고 문을 닫는다

 

 


 

 

권이화 시인 / 도원

 

 

배가 동굴로 들어갔다

푸른옷 입은 사람들이 강가에서 춤추며 노래했다 복숭아꽃은 만발해

손님들이 오고 나는 아이가 되었다

 

아버지는 지금 어디에 계실까 이곳에 오래 살아

신선이 되었다는데

술은 흘러넘치고 복숭아는 익어간다

 

잠시 배에서 내리자 동굴이 훅 사라졌다

 

물가에서 서성거리다 한 노인을 보았다

노인은 무릉도원으로 가는 배를 기다리다 벚꽃 지고 눈 내려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흰옷 입은 사람들이 손을 흔들었다

언제부터 물가에서 놀기 시작했을까 공손히 복숭아꽃을

흔들어 주었다

 

배가 다시 올라왔다 찰랑거리는 내 발로는 닿을 길 없어

나는 행선지를 물었다

종착역은 세외도원입니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기를 망설이던 노인을 떠올린다

사는 곳은 어디일까

아버지가 준 녹슨 거울을 비추어 보다가

 

나는 밖으로 나왔다

 

 


 

 

권이화 시인 / 눈발처럼 흩어진 양들의 저녁

 

 

아직 할 일이 많은데

 

아픈 양을 데리고 물가로 나와 꽃의 발소리 듣는다

어쩌다 고요히 마을에 흘러와 양을 기르다 가볍게 물을 건너갔나

꽃과 양의 아침이 양떼구름 가득 저녁으로 온다

 

양은 아직 몸을 추스르지 못한다

 

나는 어렸고 시간은 많았으나

나의 전 생애로 내리는 가는 비 오는 소리

이 물가에 세워둔 꽃노래 멈추지 않고

 

열린 창문을 통해 밖에서 바라보면*

어느 양치기가 양떼를 몰고 물을 건너 마을로 오는 소리

한 아이가 TV 앞에서 양의 행렬을 지켜보는 창밖으로

허공을 후벼대듯 눈발이 날린다

그 창밖에선 오월의 흰 꽃이 피고 한 늙은 사나이는 휘파람 불며

집으로 돌아가고

 

나는 아직 일이 많고, 양은 몸을 추스르지 못한다

 

한줌씩 뼈를 늘려가던 초롱불빛이 눈발처럼 흩어진 양들의 저녁

우리는 팔십이었고 당신은 마흔이었다

한때 흰 꽃이 핀 창문들 일제히 문을 닫았다

 

아픈 양을 데리고 물가로 나와 꽃의 발소리 듣는다

 

*보들레르, 「창문들」

 

 


 

 

권이화 시인 / 아침의 노래

 

 

바다에 갔다

갓 부쳐낸 계란프라이와 싱싱한 야채샐러드가 차려진 아침이었다

세상의 모든 비밀의 궁륭을 벗은

어머니의 식탁이었다

 

릴케가 장미에 붙인 한 곡의 마티나타 같이

 

닿을 듯 닿지 않을 듯 바다의 안쪽으로 멀리 흘러가보았다, 마침

성에서 장미가 피기 시작했고

천개의 태양이 높이 떠 있구나, 그렇지만 무슨 소용

어머니는 사라져 새는 제자리로 돌아가지 못하고

나는 먹을 수가 없네

 

라벨이 죽은 왕녀에 붙인 한곡의 마티나타 같이

 

보일 듯 보이지 않을 듯 바다 바깥으로 멀리 흘러왔다 흘러가는,

그대 마리아여

일요일에는 로마로 가 영화를 보고

만종이 울릴 때 감자 바구니 앞에서 기도를 할 수 없겠구나

세상의 모든 아침 나는 그대를 본다

나무에 잎이 타고, 새의 울음 무성해지는 뜨거운 물방울을 싣고

기차가 바다로 흘러간다

흘러오는 동쪽의 언어가 아름다워

 

아침에 붙이는 한곡의 마티나타 같이

 

 


 

 

권이화 시인 / 유리 안은 깨진 장미와 나비

 

빈 유리잔을 보면 그 속에 노란 달을 띄우고 싶어요

 

얼굴을 가린 장미에게 얼굴을 찾아주고 싶어요

 

축축한 골짜기의 첫 눈은 몇 겹의 나비 그늘로 쌓여 있어요

 

한쪽에서 검은 달을 만들며 캄캄해지는 사람이 있어요

 

아침마다 투명하고 여린 나비가 태어나듯

 

오늘도 유리창 너머 하얀 상제나비가 푸른 공중으로 날아가요

 

나비 나비 흰나비, 여긴 봄이에요

 

마음과 입이 마주치듯 유리잔에 긴 빨대로 살짝살짝 검은 달의 즙을 빨아먹으면

장미가 피고 나비가 날아가 비어서 채워지는 세계도 있겠지요

 

옆구리를 빠져나간 시간이 얼음같이 차가워지고 있어요

 

유리 안을 헤아리니 먼 하늘에서 비가 쏟아져요

 

장미담장을 넘어 간 나비 쪽으로 모래시계를 돌려놓고

 

내일 아침엔 저 빈 잔에 노란 해를 띄우면 안 될까요?

 

 


 

 

권이화 시인 / 탄생

 

 밤이 오렌지색 네 이마를 들여다볼 때 내 잠 속 오렌지꿈 잠들지 못하고

 

 이 동네 잠시 피고 지는 꽃들 속에서 처음 본 달빛이 낯설어 너는 울음을 터트렸지 그러나

 

 산 너머 팬파이프를 부는 요정에게 따르릉 전보를 치는 아버지 옆에서 달의 솜털을 뽑아 날개옷을 짜다 혼곤히 잠든 여인이 있었고

 

 달빛에 홀려 놀러 나온 큰유리새가 날개옷 겹겹마다 깃을 붙였는데

 

 뽀로롱뽀로롱 오렌지꿈 밤새 달로 가는 달빛마을 할아버지는 구부러진 손으로 예언서의 먼지를 털어냈다

 

 먼 오렌지 뜰로 날아가 새 신전을 세울 네 샛노란 깃에 달빛을 촘촘히 달았지

 

 꽃의 인사를 바쁘게 전해주는 바람이 포로롱포로롱 달동네의 환한 겨드랑이 사이로 월광소나타를 연주하곤 했다

 

 


 

 

권이화 시인 / 생은 도시의 한가운데

 

 

장미의 둘레를 돌다 문득 뒤돌아볼 때

마주치는 사람이 있다

 

보면 볼수록 보이지 않는 초록장미가 붉게 타고 있다

 

그는

뒷굽과 밑창을 갈아 끼우며 숨을 후 욱 뽑아 콧등을 문지르던 사람

그의 도시가 무릎까지 가시로 차오르던 계절

 

빨강 구두네요,

장미 표정을 닮은 눈사람을 데리고 밥을 하는 틈틈이

장미를 가꾸는 사람은 얼마나 아름다울까요?

 

빨강 구두는

새의 날개에서 시작한 장밋빛 전설 같은 나의 도시

 

뒷굽이 깨진 구두를 들고

장미가 활짝 핀 둘레길을 걷고 있다

 

 


 

권이화 시인

1961년 경북 안동 출생. (본명: 권오성) 중앙대 예술대학원 문예창작전문가과정 수료. 2014년 『미네르바』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어둠을 밀면서 오래 달리기>. 공저 <세상의 존귀하신 분들깨>. 제12회 동서문학상. 현 미네르바 편집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