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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승하 시인 / 죽림정사에 와서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9. 28.
이승하 시인 / 죽림정사에 와서

이승하 시인 / 죽림정사에 와서

 

 

아주 오래

길이 집이었다

집도 절도 없이

비가 오면 비를 맞으며 걸었고

눈이 오면 눈길을 미끄러지며 걸었다

누우면 천정에는 수많은 별

길을 가리키고 있었다

그곳으로 가면 우물이 있을것이고

저곳으로 가면 설산이 나타날 것이다

 

난생처음

집을 원했다

비바람 피할 수 있는 집

머물면서 설할 수 있는 집

등 따뜻하고 밥 지을 수있는

대나무로 둘러쳐진

이부자리가 있는 너와 나의 도량

빔비사라 왕이여

우리는 그대의 덕을 받았다

하지만 때가 되면 사람은 모두

행장을 꾸려 길로 나서야 한다

이 죽림정사를,기원정사를

등 뒤에다 두고 또다시

구걸의 길 구법의 길 구도의 길

집은 다리를 약하게 하는 법이니

모든 집은 재물이니

나 다시 문 열고 나서야 한다 여래여

어느 길이나 죽음을 향해 나 있겠지만

 

ㅡ불교문예 2023 봄호

 

 


 

 

이승하 시인 / 국립과학수사연구원, 부검하다

 

 

시체를 통해 죽음의 이유를 밝혀야 한다

잘 죽어야 하는데 그대 못 죽었다

요즘 드라마에도 뉴스에도 나오는 ‘국과수 부검’이란 말

고무장갑을 끼고 메스를 든다

막 부패하기 시작한 시체

더 부패하기 전에

이 세상에는 미해결의 주검이 있다

한 번 죽는 것도 억울한데 두 번을?

아니! 영혼이라도 원한 없도록

타살이냐 자살이냐

타살이면 어떻게? 누가?

자살이면 어떻게? 왜?

장기 하나하나를 들어내어

사인을 찾아낸 뒤 사인한다

하나하나 적출했다가 하나로 봉합한다

이제 그대 안치될 수 있다면…… 안락하게

이제 그대 평화로울 수 있다면…… 영원히

잠들어라 죽음의 이유를 내가 밝혔다

죽을 수 있는 무궁무진한 경우의 수

사람이 시체를 먹고 산다

……오늘은 복날이니 삼계탕을 먹어야겠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이승하 시인 / 잃어버린 성을 찾아서

 

 

창씨는 해도 개명은 하지 않았다

히라누마 도오쥬우[平沼東柱]

일본 본토에 가 공부한다는 것이 그다지 욕된 일이었을까

성씨를 고쳐 신고한 날 1942년 1월 29일

그 닷새 전에 시를 썼지 「참회록」을

여백에 낙서할 때의 기분이 어땠을까

―시인의 고백, 도항증명, 힘, 생존, 생명, 문학, 시란? 不知道, 古鏡, 비애 금물*

 

조상을 부정하라고 한다

히라누마 도오쥬우!

하이!

매일 매시간 일본 교수가 출석부 보며 부른 낯선 성

대답할 때마다 떨리는 입술

육첩방은 남의 나라 내 나라가 아닌데

시를 썼기에 요시찰인물

시를 썼기에 1945년 2월 16일 오전 3시 16분

후쿠오카 형무소 캄캄한 독방에서

크게 한 번 외치고 쓰러져 죽었다

윤—동—주—!

 

*윤동주(1917〜1945)는 1942년 1월 24일에 쓴 시 「참회록」 아래에 이런 낙서를 해놓았다.

 

-시집 『사람 사막』 중에서

 

 


 

 

이승하 시인 / 도스토예프키, 형장으로 끌려가는 동안

 

 

죽음에 대한 공포보다

무서웠으리

사채업자에게 진 노름빚보다

무서웠으리

내가 죽어도

울어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

 

*도스토예프스키(1821~1881)

 

-시집 『사람 사막』 중에서

 

 


 

 

이승하 시인 / 청국장

 

 

할머니가 메주를 뜨는 날은

온 동네에 고약한 냄새가 퍼지는 날이었다

할머니가 간장을 쑤는 날은

온 동네의 개들이 짖어대는 날이었다

 

그보다 열 배는 더 고약한 냄새

청국장을 보글보글 끓이는 날은

창문 다 열고 선풍기까지 동원하지만

냄새는 옷에도 몸에도 가방에도 배어

우리는 학교에 가서 얼레리꼴레리

바지에 똥 싼 아이 취급을 받았다

 

냄새는 고약하지만 맛은 죽여주는 청국장

할머니 손끝은 참으로 요술쟁이여서

이맛살 찌푸리며 한 숟갈 뜨면

미소가 번지면서 숟갈질이 바빠졌다

 

메주콩을 더운물에 불렸다 물을 붓고 푹 끓여

말씬하게 익힌 다음 보온만으로 띄운 청국장

콩 사이사이에 볏짚을 넣고 띄우면

똥 색깔 똥 냄새 할머니처럼 퀴퀴한 청국장

 

할머니 돌아가신 뒤

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것이 사라졌다

 

 


 

 

이승하 시인 / 말의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없다

 

 

엄마가 아기에게 말을 가르치고 있다

엄마 까꿍 어부바 엄마 아빠 냠냠 쑥쑥

아기는 엄마 입을 흉내낸다 따라한다

그래서 모국어인 것을

 

말 없는 말이 밤새 천리를 가고

입 없는 말이 천냥 빚을 갚는다고

엎질러진 물 같은 거짓말이 거짓말을 낳고

소문이 확신이 되고, 낭설이 정설이 되고

 

필화와 설화가 사람을 죽음으로 몰아간다

모함의 감옥에 가둬 손가락질하고

구설의 도마에 올려 난도질하고

죄가 없어도 처형되는 경우가 있다

 

김덕령장군

자기변명도 한마디 하지 못하고 죽었지만

길이 되었다 충장로가

사당이 되었다 충장사가

 

이순신 장군

고문 당하고 백의종군했지만

길이 되었다 충무로가

사당이 되었다 현충사가

 

세객이여 유세객이여

세치에 불과한 혀로

선업을 쌓아도 고작 10년 내지 20년인 것을

그러니 그대 고요하라

말의 사막에는 오아시스가 없다

 

 


 

이승하 시인

1960년 경북 의성 출생.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문학박사). 1984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1989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소설 당선. 시집 『사랑의 탐구』 『우리들의 유토피아』 『욥의 슬픔을 아시나요』 『폭력과 광기의 나날』 『박수를 찾아서』 『생명에서 물건으로』. 시론집 『한국의 현대시와 풍자의 미』 『생명 옹호와  영원 회귀의 시학』 『한국 현대시 비판』 『한국 시문학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소설집 『길 위에서의  죽음』. 시선집 『젊은 별에게』. 현재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 학과장. 2019년 제29회 편운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