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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초혜 시인 / 적막한 저녁
내가 무너져 끝도 없는 진흙창을 헤매도 다그치지 말고 비판도 삼가고 그냥 넘겨 주십시오 웃음이 풀어져 희죽거리면 먼저 희죽거려 주고 울음이 헤퍼져도 못 본 체 해 주시지요
그렇다고 내가 자유로워 지는 것은 아닙니다 골수에 묻은 어두운 눈물도 있고 내 속에서 끓이는 증오도 있습니다 그건 또 아무 것도 아닙니다
정작 두려운 건 에너지가 자꾸 죽음 쪽으로만 기우는 것입니다 제 집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죽음이라면 그리 겁날 건 없지만 그곳에 이른 나의 여러 모습들이 나를 무섭게 합니다
김초혜 시인 / 가을의 시
묵은 그리움이 나를 흔든다
망망하게 허둥대던 세월이 다가선다
적막에 길들으니 안 보이던 내가 보이고
마음까지도 가릴 수 있는 무상이 나부낀다
김초혜 시인 / 손자를 위하여
하루에 삼천 번을 만난대도 어찌 반갑지 않으랴 웃는 모습도 우는 모습도 참으로 눈부셔라
봄 다음에도 봄만 오게 하는 아이야 잎이 나고 자라고 꽃이 피고 만개해
앞으로 오는 100년 내내 봄 이거라
김초혜 시인 / 먼 길
길을 떠나기 전에 묻고 싶었으나 길을 떠난 후였고
길을 걸을 때 묻고 싶었으나 숨이 가빴다
지금 길이 없기에 길을 잃지 않는다.
김초혜 시인 / 세상 가는 길
생명의 새벽이 어둠이라고 오랫동안 많은 사람 오고 간 이 길
처음에 끝을 얻지 못할 줄 어찌 압니까
삶의 피안에 죽음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마음의 마음으로부터 사로잡힌 마음 끌어내려고
언제나 제자리걸음 그렇게 이 세상을 오고 갑니다
김초혜 시인 / 세월
그대가 존재하는 까닭은 오래되었다 나의 어디에나 그대는 있다 오래되어 쓰지 못하는 만년필에도 있고 쓰임새가 없어 버려진 손수건에도 있고 책갈피에 넣어둔 냉이꽃에도 있다 그대와 일상언어로 주고받던 웃음에도 있고 햇살이 쏟아지는 아침에도 있고 싹트는 소리가 들리는 봄밤에도 있다 달그림자에 꽃그늘이 아름다운 밤에도 있고 눈이 내려 쌓이는 밤에도 있고 한밤중 잠들어도 그대는 온다 삶의 마지막 순간 의식 없는 의식 속에도 그대가 올 것이다 그러나 그대와 내가 없다면 해가 진들 달이 뜬들 무슨 소용이랴
김초혜 시인 / 동백꽃 그리움
떨어져 누운 꽃은 나무의 꽃을 보고 나무의 꽃은 떨어져 누운 꽃을 본다 그대는 내가 되어라 나는 그대가 되리
김초혜 시인 / 밤바다
부서지는 것이 어디 너뿐이랴
부서져 파도가 못 되어 울고 섰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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