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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사라 시인 / 가족 박물관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7.
이사라 시인 / 가족 박물관

이사라 시인 / 가족 박물관

 

 

한 개의 꽃이 활짝 피었다가 또 지는 중이다

방 안에서

마루 끝에서

건널목 저편에서

그때마다 꽃 그림자가 피는 밤

 

오래도록 꽃이 피었다가 지면

가족은 가족사진이 되고

액자 유리에 납작해진 가족은

드디어 조화가 된다

 

만 년 동안 살아 있다고 전해지는 밤에도

눈이 오고

봄이 오고

또 눈이 오고

한 사람이 눈길을 걷다가

눈이 덮어버린 길이 궁금해지고

궁금하지 않던 그 길이 궁금해지고

 

삽 하나 들고

부드러운 것은 부드럽게 파헤치고

날카로운 것은 날카롭게 피헤치면

박물관 하나가 나타난다

관 속에 조용히 누워 있는데도

가족은

그가 살아 있다고 믿는 밤

 

신화를 쪼고 있는 부리 단단한 새도

잠들지 못하는 밤

흰 눈과 흰 뼈로 만나서

뽀드득뽀드득 소리를 내는 꽃밭이 아름답다

 

 


 

 

이사라 시인 / 결

 

 

세상에는

아름다운 사람들이 많다

 

깃털 같은 마음으로

사막에 집을 짓는 건축가도 있다

눈빛 속에 사람을 심는 예술가도 있다

 

태어나서 무엇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어디든 지붕만 얹으면 살아나는 것이 집이라며

 

물이 물결을 만들듯이

나무가 나뭇결을 만들듯이

결이 보일 때까지 느긋하게 살면서

사람결을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지붕 고치듯 마음만 고치면

몇백년을 훌쩍 넘긴 마음도 가질 수 있다

 

 


 

 

이사라 시인 / 세상의 창 안에는

 

 

그는 요즘 날마다 발바닥을 내게 보인다

발의 바닥을 보인다

그의 바닥이 이제는 공중이다

 

노인 요양원 창밖에서

공중으로 나는 새들이 가끔 창 안을 들여다보고

 

평생 발의 바닥이 든든했던 기억도 놓친 채

발보다 먼저 오래된 몸이 눕는

시간이 오고

그는 다시는 걸을 일 없는 삶을 시작한다

 

밤에도 새들은 창 안을 기웃거리고

 

밤낮을 허공으로 향하는 그의 바닥이

곰 발바닥처럼 갈래갈래 시큼하다

내 눈시울도 그렇게 젖어든다

 

누구도 피할 수 없는

몽롱한 시간이 지나가는 한세월이 간다

눈을 뜨면 헛것에 둘러싸이는

그의 기억이 거칠기만 한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랑한다 사랑한다

 

발바닥으로 쓰다듬던 반질반질한 사랑으로

사람으로 살려 애썼던 그 동굴로

그이 발바닥이

날아가고 있는 시간들이리라

 

언젠가는 먼 길 가는 새들처럼

떠나야 하는 발바닥들이

있는 것이다.

세상의 창 안에는

 

 


 

 

이사라 시인 / 사람은 어떻게

 

 

하늘빛이 한번 크게 흔들린다

 

떠나는 사람

남는 사람

그 일이 언제나 그런데

 

그리고

하늘은 늘 그 하늘로 돌아오는데

 

사람은 어떻게 그렇게

이별이 아플 수 있을까

 

어느 날 하늘이 문득 흐려지는 이유가 있겠지만

 

사람이라서

더 크게 울 수 있는 사람이라서

여기까지 빗방울을 뭉쳐왔을까

 

사랑하는 사람들 떠난 가슴에

사람은 어떻게 어렵사리 새길을 내나

 

어떻게

안 오던 비가 오고

또다시

새꽃이 피나

 

 


 

 

이사라 시인 / 낙조

 

 

당신을 떠나올 때

불그스레 웃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보면 다행스럽다

떠나올 때처럼 다시 당신에게 갈 수 있을까

나는 다시 갈 줄 정말 몰랐던 것일까

 

사람은 사람에게 매달리고

구름은 하늘에 매달리고 싶어한다

사과밭에서 사과나무는 사과를 꽃피우고

그리고

사과상자 속의 사과가 되어

붉은 얼굴로 나는 다시 당신에게 간다

 

마치 오천 년 전의 은팔찌 하나가

박물관 속 낙조 같은 조명 속에서

오늘을 껴안는 것처럼

 

 


 

 

이사라 시인 / 한세상

 

 

세상 어디에도 그림자를 만들지 않는 새가

떼를 이루어 칼날처럼 지나간다

하늘이 한순간 베인다

 

잠시 후 베인 흔적이 서로를 껴안고 아무는 동안

땅에서는 기차가 다리 위를 지나간다

 

선로 따라 침목의 침묵도 지나

강물 속으로 무거운 굉음을 내려놓는다

굉음이 어느덧 세상에서 사라진다

 

우리도 이렇게 새처럼 흔적을 지우고 사는 동안

 

그래도 날마다 바람이 불고

어느 왕조는 무너지고

어느 마을의 사람은 한순간 지진으로

터전을 잃고 흙으로 돌아간다

 

베일 쓴 여인처럼 역사는 날마다 신비한데

 

내가 되돌아보는 길에 만나는 것들은

어느새 어디를 다녀온 것일까

 

 


 

 

이사라 시인 / 장항선 무궁화

 

 

장항선은 서울역을 천천히 떠난다

무궁화열차가 한 점 구름 속으로 들어간다

뭉클거리는 구름의 나라에도 레일은 있어

뭉쳐본 적 없는 두 줄기 눈물은 있어

떠나는 자와 보내는 자의 역사를 품고

붕붕 뜬 간이역을 지나간다

나팔꽃 몇 줄기 엉켜올라가는 낡은 역사를 더듬는

구름 나그네

죽음과 삶의 수신호자인 역무원의 눈에 띄지 않아도

레일은 흐르고

오랜 매듭 풀리듯 나른한 오후

 

장항선은 제멋대로 구름 속으로 길을 만들며 간다

키 작은 담장 너머의 살림들이 정겨운 레일 밖 세상

키 작은 구름 사람들을 무궁화처럼 피워올린다

무궁화 이름의 행보로 느릿느릿

살고 싶게 한다

미루나무에게 들풀들이 달려가 안기는 동안

한쪽 마음마저 스르르 무너지는

푸른 7월

아름다운 것에 관해 말할 줄 모르는 나도

입술을 달싹거린다

장항선 무궁화나라의 시민처럼

 

 


 

이사라 시인

1953년 서울에서 출생. 이화여대 국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81년 《문학사상》에 <히브리인의 마을 앞에서>외 6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 『히브리인의 마을 앞에서』 『미학적 슬픔』 『숲속에서 묻는다』 『시간이 지나간 시간』 『가족박물관』 『훗날 훗사람』. 1988년 대한민국 문학상 수상.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