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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여명 시인 / 천생연분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7.
이여명 시인 / 천생연분

이여명 시인 / 천생연분

 

 

사이를 떼어낸다

작은 소리와 함께 서로의 곧은 살 베어

한 쌍 젓가락이 된다

두 몸, 태어날 때부터 한 몸이었던 것

함께 손가락 사이에서 다리와 이마 엇갈리며

붙었다가 멀어지곤 한다

다리 마주 붙이면 이마 멀어지고

이마 붙이면 다리는 떼어진다

식탁 위에 함께 다닌다

매운김치 속파고들고

가끔 차렷 자세로 발 모으고 키를 맞춘다

한쪽이 붉어지면 다른 한쪽도 붉어지고

한쪽이 힘들면 다른 한쪽도힘들다

이마는 이마끼리 발은 발끼리 붙어 다니는데

서로 뒤바뀔 수 없다 어떨 때

하나가 먼저 식탁을 떠나가면

남은 하나도 곧 떠난다

빈 쟁반 위에 붉은 발 혹은 검은 종아리로 누워

지난 일들 떠올리다

처음 한 몸이듯 함께 떠난다

 

 


 

 

이여명 시인 / 섣달

 

 

 노파는 모퉁이 바람에 두들겨 맞은 짚단 같은 머리를 쳐들었다 주워 온 나뭇가지 힘겹게 아궁이에 쑤셔 넣었다

 

 루른 빛 모두 거두지 못한 호박 몇 방구석에 들이지 않고 여태까지 왜 마루에서 얼렸을까 엄나무 세운 가시처럼 바람은 찬데 어느 도시에 팽개쳐진 아들 녀석 생각했던 것일까

 

 아픈 뼈마디 떼버리듯 굶주린 구들 목에 먹이 주듯 삭은 쇠뿔같은 나무토막 하나 또 던져 넣었다 세월이 갉아 둥근 지문을 지운 솥뚜껑 눈물 가두고 놓지 않았다 들릴 듯 말 듯 “우리순호보고죽어야지” 했다

 

 사리탑처럼 침묵으로 앉은 장독 뒤 닥나무 줄기에 달라붙은 뱁새 어디 잠자리를 찾았을까 슬레이트 지붕 헐렁한 주름치마를 벗는데 누런 오줌발 요강 놓인 돌 죽담이 틀니 빠진 잇몸처럼 차갑다

 

 간이상수도 꼭지에서 똑똑 수돗물이 맥없는 오줌처럼 새어나왔다 까치가 멍에 같은 감나무 가지에서 깍깍깍 알아들을 수 없는 저녁 말을 노파보고 해댔다 붉은 노을이 토담의 낡은 벙거지를 틀어쥐었다

 

 


 

 

이여명 시인 / 바람의 갈퀴

 

 

 놓아먹이는 닭장이 소란스러워졌다 깃털들이 오뉴월 보리지푸라기처럼 날아올랐다 AI지역서 온 스무 날 중병아리 몰라보도록 그물망에 제 목을 찔러 넣고 눈을 감고 있는 놈도 있었다

 

 갈팡질팡 꽁지 내빼고 얼토당토않게 튀는 놈들 그들이 달려올 길목을 조심스럽게 지키고 있다가 날갯죽지를 낚아채었다 비린 살 냄새가 어느 여인의 향수보다 깊었다

 

 정부 매상포대를 벌리고 붉은 눈을 피해 산 채로 집어넣었는데 그 속에 들어가자마자 한마디 말이 없었다 모든 게 끝인 줄 알았을까 중얼대면 청테이프로 입을 틀어막고 생매장한다고 생각했을까

 

 도둑처럼 안면을 가린 나를 누구인지 닭이 모를 것 같아 비로소 안심을 하고 마지막 팔딱이는 심장을 둘러메고 질경이 박혀드는 길 지나 흙구덩이에 던져 넣었다 현장에 없었던 것처럼 모르는 일처럼 급히 빠져나왔는데 어떤 놈은 포대 뚫고 긴 모가지를 상사화처럼 밀어 올렸다

 

 먼 날 그들 뼈도 무슨 집단 주검처럼 돋을새김으로 발굴될지 모른다 보온 덮개 빈 닭장 이제 적막의 부리가 쪼았다 바닥을 후벼 파는 건 한 줄기 바람의 갈퀴였다

 

-<동리목월>, 2015. 봄

 

 


 

 

이여명 시인 / 질경이

 호미질이 갯벌의 농게 발이다 가막조개 캐는 듯 보이다가 뒤로 한 발 물러날 때는 조롱조롱 한숨을 묻는다

 지칭개 질경이 로제트식물들 뽑고 있다 겨울 언 땅에 주저앉아 천천히 움직인다 텃밭 일구고 있다

 그녀 웅녀다 등 굽혀 쑥 뿌리 바닥을 파고 몸을 이쪽저쪽 움직일 때는 모래에 알을 낳고 알을 굴리는 암탉이다

 무슨 생각에 잠겼을까 땅에 엎드려 겨울을 견디고 밟혀도 살아나는 질경이를 바라보는 걸까 소식 없는 자식이 그리운가 혼자의 삶을 생각하는가 고개를 숙이고 있다

 욕망이 있는 자 저 둥지에 삶을 묻는다 산다는 것은 욕망을 버리지 않는 것일까 열정은 죽음보다 낫고 죽음은 열정을 이기지 못하는 듯 저 연로에 세상의 둥지를 만든다

 자신만의 수많은 둥지를 만들었을 것이다 죽어야만 둥지 만드는 고질을 잊을 건가

 흙먼지 인다 주먹만 한 돌멩이를 둘레에 가져다 놓는다 누구도 침범을 허락하지 않는 나의 석성(石城)을 쌓고 뽑힌 풀포기가 면억이 되어 그 뒤에서 눕는다

 저 등 뒤 한 마리 검은 고양이 울산도깨비바늘 곧은 망초 대궁 사이에 웅크리고 있다 봄날 탁란 처를 찾는 검은등뻐꾸기같이

 누런 폐지를 실은 작은 손수레 길가에 종일 받치고 있다 충실한 누렁이가 앉아 기다리는 것같이

 그녀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둥지를 가지고 있다 둥그렇게 움푹한, 차츰 따뜻해진다

 

 


 

 

이여명 시인 / 강동농기계공업사

 

 

입이 건 중년의 과부처럼 바퀴가 투덜거린다

늙은 소머리 같은 경운기 대가리

거적위에 부려놓는 농기계 수리공 이마가 기름걸레처럼 검다

목 없이 거꾸로 박혀서도 두 다리 턱 벌리고 허공의 하늘을 괸다

떨어져나가 저쪽에 비스듬 누운 빈 짐칸

한낮의 뻐꾸기 졸음 마냥 한가롭다

나사 풀어 두개골 열고 드라이버로 그 가운데를 찔러 보는데

오래 묵힌 宗家의 간장 같은 검은 피 햇살 아래로 기어 나온다

반짝하며 꿈틀거리는 부품들

맑은 피마저도 힘이 들면 검어지는 것일까

녹슬어 부서지며 닳은 것이 영락없는 주인의 이빨 같다

나는 무논을 갈고 별빛 외진 농로 통통 울리며

노부부를 태운 오일장

한 자락도 같은 모양새 없는 다랑논 같은 삶

실어 나르던 어느 날을 떠올린다

바퀴 풀고 그 어깨 관절에다 뻑뻑한 쌀엿 같은 기름을 먹인다

막걸리로 거나하게 배를 채우듯 오일 한 통 엔진에 집어넣는다

나른하게 나뒹굴어진 바퀴가 둥근 봄날을 감아올린다

아까부터 자리를 뜨지 않는 쭈그렁 노인

산마루가 진달래꽃 무더기를 당겨 안듯

다시 경운기를 몰아 탈탈 언덕길 넘어간다

 

 


 

 

이여명 시인 / 하관

 

 

사방 파헤친 황토구덩이 속으로 내려간다

 

생전 기우뚱거렸던 의지처럼 좌우로 흔들리고

오르락내리락 기복 있었던 삶처럼 비스듬히 기울며

두 가닥 오랏줄 타고

죽어 바쁠 것 없이 관 내려간다

 

죽음이란 자신을 뒤돌아보며 가는 걸까

죽어서도 흔들리는 마음 어쩔 수 없는 것인가

미워하다 또 좋아했듯이 멈추었다 내려가고

염천 아래

마지막까지 줄에 매달려 아슬아슬 간다

 

관 모서리 꽝꽝 나무못 박을 때 못다 한 말하라고 상주들

일제히 울음 우는 것이다

 

지은 죄 다 털어놓으라는 듯 누구나 죄가 있다는 듯

참나무 지렛대로 마지막 주리를 튼다

폐철 놓는다

황토, 황토 내려간다

 

-시집 『가시뿔』에서

 

 


 

 

이여명 시인 / 불을 만나는 방식

 

 

 못쓸 물건들 태우고 있다 생긴 대로 그 꼴값을 한다

 

 마음 가벼운 스티로폼 생각 없이 달려들더니 화끈하게 불 안고 죽는다 헛간에 묶여 있던 대나무꼬챙이 뼈대 있게 꼿꼿이 타고는 그 불기운 오래 견딘다 부엌살이 박혀 있던 싱크대 널빤지로 돌아가서는 모서리 먼저 내주고 차츰 가운데를 대준다

 

 벌린 입으로 한 가방 불 먹고 복부인처럼 불룩하게 사라지는 쇼핑백,질질 발을 담아 왔듯 질질 불똥을 털어내는 신발,불 위에 드러누워 편편하게 다리 뻗어보는 장판지,순한 입술처럼 입을 오므려보고 길게 눈물 흘리는 하얀 폐비닐조각,날개처럼 풀풀 날아오르는 종이쪽지

 

 질기든 연하든 없었던 것처럼 떠난 자리는 둥글다

 

 


 

이여명 시인

1950년 경북 경주 출생. 본명: 이종백. 경주대학교 사회교육원 문예창작과 졸업. 200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당선되며 등단. 시집 『말뚝』 『가시뿔』. 한국문인협회, 경북문인협회회원, 경주문인협회회원. 시in 동인. 공무원문예대전 우수상, 제3회 경주문학상 수상. 2000년대 시인회의 회원. <목마시> 동인 회장. 경주 불국동사무소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