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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호 시인 / 말하자면 길지만
한때는 검은 입으 시를 말하던 시절이 있었네 오디 먹은 입처럼 시를 담았던 입을 숨길 수가 없었던 시절이 있었네 시를 안 쓰면 검게 마르던 시절이었네
시절은 속절없이 흘러 시를 말하던 입으로 소주를 마시고 소주를 마시던 입으로
거짓말을 하고 사내가 챙겨야 할 건 우산하고 거짓말이라고 했던 게 우리 할머니였지 아마? 거짓말은 꼭꼭 챙겼는데 우산은 아무 데나 흘리고 다녀서 후줄근하게 젖는 날이 많았네 지나가는 우산들이 죄다 잃어버린 내 우산만 같아서
아무 우산 아래나 젖은 머리를 마구 들이밀고 싶었네
김남호 시인 / 북천 북쪽의 어느 부족은 구사하는 낱말이 몇 개밖에 안 된대요. 아프다는 말도 그들의 사전에는 없대요.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파도 아플 수가 없대요. 낭떠러지에서 떨어져도, 사냥 나간 가족이 죽어도,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도 그들은 바위에 걸터앉아, 오늘따라 왜 이리 숨쉬기가 힘들지? 왜 이리 어지럽지? 왜 이리 살고 싶지가 않지? 자신의 가슴팍만 두드린대요. 피눈물이 흘러도 가슴이 미어져도 그들은 전혀 아프지가 않대요. 아무도 아프지 않아서, 누구도 아픈 적이 없어서 병원도 신(神)도 필요가 없대요. 신이 없으니 영혼을 거두어 줄 자가 없어서 죽을 수도 없대요. 죽은 적이 없으니 산 적도 없대요. 살아도 산 것 같지 않고 죽어도 죽은 것 같지 않대요. 북쪽의 어느 부족은 아프다는 말이 없어서 그들은 어느 하루도 아프지 않은 날이 없대요. 그들은 어느 하루도 북쪽 아닌 날이 없대요. -시집 『말하자면 길지만』, 파란, 2023,
김남호 시인 / 마루 밑에서 보낸 한 철
모든 것들은 그 위에 있었다 주인도 손님도 도둑도 예수도 부처도 생선 대가리도
나만 그 아래 있었다 거기서 먹고 자고 싸고 가끔 짖거나 짖지 않거나
뼈다귀를 던져 주면 뼈다귀를 똥을 던져 주면 똥을 욕을 던져 주면 욕을 주는 대로 물고 왔다
모든 것은 그 아래로 물고 와서야 비로소 내 것이었다 심지어 나 자신조차도
그곳은 지상이었지만 하늘이 없었고 하늘이 없어서 죄가 없었다
내 몸은 허기의 힘으로 굵어져서 우그러진 밥그릇처럼 투명해졌을 때 그곳에서 끌려 나와 매달렸다
그들의 십자가에 대롱대롱 뼈다귀와 함께 악다구니와 함께
김남호 시인 / 생일
놀라서 버린 담배꽁초를 다시 주워서 무는 중딩이처럼 어머니는 나를 다시 주워 물었네
버릴 때와 주울 때의 어머니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네
자신을 불태울 수가 없어서 머리를 붉게 물들이는 고딩이처럼 나는 나를 태웠다고 생각했네
태우는 나와 타는 나는 전혀 다른 사람이었네
생일을 모르는 고아처럼 케이크만 보면 불을 붙였네 기를 쓰고 내 나이만큼 불을 붙였네
손끝이 타도록 단지 한 번 불어서 끄기 위하여
불을 끄고 박수를 치는 두 손바닥은 전혀 다른 손이었네
-《서정과현실》 2017. 상반기호
김남호 시인 / 참 좋은 저녁이야
유서를 쓰기 딱 좋은 저녁이야 밤새워 쓴 유서를 조잘조잘 읽다가 꼬깃꼬깃 구겨서 탱자나무 울타리에 픽 픽 던져 버리고 또 하루를 그을리는 굴뚝새처럼 제가 쓴 유서를 이해할 수가 없어서 종일 들여다보고 있는 왜가리처럼 길고도 지루한 유서를 담장 위로 높이 걸어 놓고 갸웃거리는 기린처럼 평생 유서만 쓰다 죽는 자벌레처럼 백일장에서 아이들이 쓴 유서를 심사하고 참 잘 썼어요, 당장 죽어도 좋겠어요 상을 주고 돌아오는 저녁이야
- 《시를 어루만지다》, 김사인 엮음
김남호 시인 / 하루
빌딩 사이 전깃줄에 요란스레 노을이 붉다 사무실 벽에 걸린 하얀 장미는 나른한 손끝으로 밤을 몰고 온다
엉덩이 한번 제대로 붙여 보지 못한 하루 노을이 몰고 온 나른한 고독 미라 같은 창백한 얼굴과 지친 고속 전철의 브레이크 밟는 소리
낯선 목소리들이 뒤엉켜 살아 있는 웃음소리로 들리는 홀에는 와인잔에 든 붉은 빛깔만큼이나 따뜻하고 생기가 있다
어느새 노을이 붉게 타던 전깃줄엔 네온사인이 화려하고 시원한 밤바람과 함께 새벽이 잦은걸음으로 오고 있었다
김남호 시인 / 걸레질
그녀의 걸레질은 멈출 줄을 몰랐다 할수록 더러워졌고 더러워질수록 치열해졌다 그 일에 모든 걸 건 사람 같았다 걸레질은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고 걸레는 이미 걸레가 아니었다 거길 뭣 하러 그렇게 닦아요? 아무도 묻는 사람이 없었다 만일 누군가가 그렇게 물었다면 그녀는 마른 걸레처럼 미쳤을 것이다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미치지 않았고 아무도 묻지 않았기에 미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누구도 물을 수가 없었고 그녀는 언제 미쳐야 할지를 몰라서 걸레질만 하고 있었다 아무것도 닦을 수 없는 걸레로 무언가를 닦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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