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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성학 시인 / 불, 달린다
며칠 째 자리가 비어있다 같이 일하는 여사원 그녀의 고향집 이번 산불로 집과 비닐하우스를 잃었다 버섯과 고추를 알뜰히도 태웠다
밤에 불이 산에서 뛰어내려 오는 것을 뻔히 보고 있었다고 한다 가속도를 주체하지 못해 가랑이를 쭉쭉 벌리며 마구 쏟아져 내려와서는 지붕에 철퍼덕 엎어졌다가 금세 일어나서 또 뛰어가더라고 했다 노부모도 덩달아 뛰었다
며칠 만에 그녀가 돌아왔다 그녀의 머리칼에서 버섯 굽는 냄새가 잠시 피어 올랐다 미안한 이야기지만 내가 불 붙으면 얼마나 달릴 수 있을지 불덩이로 확 덮쳐버릴 수 있을지 궁금했다 정말 미안했는지 꿈속에서 물동이를 날라주느라 자고 일어나니 어깨가 부서진 듯 아팠다
-시집 <당랑권 시대> (2006년 창비)
윤성학 시인 / 마중물
참 어이없기도 해라 마중물, 마중물*이라니요
물 한바가지 부어서 열길 물속 한길 당신 속까지 마중 갔다가 함께 뒤섞이는 거래요 올라온 물과 섞이면 마중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릴 텐데 그 한 바가지의 안타까움에까지 이름을 붙여주어야 했나요 철렁하기도 해라 참 어이없게도
*마중물 : 펌프로 물을 퍼올릴 때 물을 끌어올리기 위하여 먼저 윗구멍에 붓는 물.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2006년 창비)
윤성학 시인 / 구두를 위한 삼단논법
갈비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다가 신발 담당과 시비가 붙었다 내 신발을 못 찾기에 내가 내 신발을 찾았고 내가 내 신발을 신으려는데 그가 내 신발이 내 신발이 아니라고 한 것이다 내 신발의 주인을 분명히 기억한다고 했다 내가 나임을 증명하는 것보다 누군가 내가 나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 더 참에 가까운 명제였다니 그러므로 나는 쉽게 말하지 못한다 이 구두의 이 주름이 왜 나인지 말하지 못한다
한때 무릎을 꿇고 앉아 꽃잎 속의 고인 햇빛을 손에 옮겨 담을 때 강으로 지는 해를 너무 빨리 지나치는 것이 두려워 공연히 브레이크 위에 발을 얹을 때,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서며 그의 문지방을 넘어설 때, 손 닿지 않는 곳에 놓인 것을 잡고 싶어 자꾸만 발끝으로 서던 때, 한 걸음 한 걸음 나를 떠밀고 가야 했을 때 그때마다 구두에 잡힌 이 주름이 나인지 아닌지 나는 어떻게 말해야 하는가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2006년 창비)
윤성학 시인 / 소금詩
로마 병사들은 소금 월급을 받았다 소금을 얻기 위해 한 달을 싸웠고 소금으로 한 달을 살았다 나는 소금 병정 한달 동안 몸 안의 소금기를 내주고 월급을 받는다 소금 방패를 들고 굵은 소금밭에서 넘어지지 않으려 버틴다 소금기를 더 잘 씻어내기 위하여 한달을 절어 있었다 울지 마라 눈물이 너의 몸을 녹일 것이니
윤성학 시인 / 오리지널 대나무 사운드트랙
숲 사이로 난 작은 길을 걸어 대나무로 들어갔다 아홉량의 바람이 정차했다가 다음 역으로 출발한다 덜컹대는 숲
전철 타고 퇴근 하는 길 이젠 시집을 읽다가도 짐이 든다 우체국을 나선 행낭처럼 흔들리다가 차창에 머리를 덜컹거리며 흔들리다가
마당을 쓰는 스님 사람들이 발을 들어주면 자리 밑까지 외손녀의 머리를 빗기듯 알뜰한 비질 내 앞에 한참이나 서 있더니 발 치워라 대나무로 무릎을 꽝꽝 친다 눈 뜨면 덜컹대는 숲속 무릎이 쾅쾅 저리고 잠퉁아 이 잠퉁아 눈 떠라
대나무 천둥이 운다
윤성학 시인 / 촛대뼈
촛대뼈 차여본 사람은 안다 맥없이 푹 고꾸라져 통점을 부여안고 자신을 일으키려 애써본 사람은 안다 두 뼘도 안되는 뼈마디 두 쌍이 H빔처럼 전신을 지탱하고 있었다는 것을 그, 굽힐 수 없었던 작은 뼈대가 언젠가 몸 전체를 굽히게 만든다는 것을
-시집 <당랑권 전성시대>> 2006 창비
윤성학 시인 / 당랑권 전성시대
권법 없이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곳에는 사람 수만큼의 권법이 있다 익히더라도 강한 것을 익혀야 산다 나는 당랑권을 택했다 매미를 잡아먹는 사마귀의 전술이다
상대와 마주 섰을 땐 늘 중심을 뒤에 두고 정면이 드러나지 않도록 하라 그래야 혈을 지킨다 사각으로 돌다가! 연속적인 단타로 급소를 파고든다 그의 반격을 받아흘리며 쉼없는 상하연타를 구사해 승부를 몰아간다 나는 여기서 당랑권을 익혔다 강하게 파고들었다가 빠르게 빠져나오는 고수들을 보며 익힌 권법이다 그들은 누구에게도 불잡히지 않고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다 이것이 당랑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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