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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이담하 시인 / 기다리는 시간만큼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8.
이담하 시인 / 기다리는 시간만큼

이담하 시인 / 기다리는 시간만큼

 

 

성별도 국적도 따지지 않고

자리를 내어 주는 민간 기구 같은 의자들

첫차와 막차 시간을 기억한다

 

서성거림은 어느 순간을 찾아가는 불규칙한 착석

처음 앉는 사람에겐 차갑지만

비스듬한 등받이의 배려로 앉아서도 바쁜 의자

마중과 배웅만 쏙 빼내면

다시 빈자리가 되기 위해 삐걱거리며 낡아 간다

 

마중과 배웅 사이로

허겁지겁 달려오는 시간들 지루한 연착들

모든 시간은 정해진 약속을 향해 달리고

약속을 넘어서면서부터

연착으로 놓친 차편 사이에 의자가 있다

 

기다리는 시간만큼 앉아 있어도 되는 의자

기다리는 것은 수행과 같아서

화장실도 안 가고 앉아 있는 의자

사람을 닮았으면서 사람이 아닌 사람

옮기려고 잡아끌면

소리로 저항하는 무정부주의자들

 

 


 

 

이담하 시인 / 갓밝이

​오는 구나 공복으로 오는 구나 매일 오는구나 내밀한 밤,

다독거리는 손을 뿌리치고 맨발로 걸어 나오는 나의 새벽

은 오는구나 유리창 밖에서 사라지려고 그렇게 오는구나

한 번도 거르지 않고

가산혼합으로 오는 새벽,

더 가까이 오면 일으켜 놓고

새는구나 앞에서부터 새는구나 동공 속에 달과 별을 넣

어 주고 새는구나 묵시적 방법으로 소등을 하고 몽환을 잉

태한 안개와 이슬점을 두고 새는 구나 빗살무늬 구름을 흩

뿌리는 자각증상으로 천천히 오다가도 가까이 오면 다시

는 안 올 것처럼 다 보여 주고 침착하게 새는 구나

다 새고 나면 아침이 나머지로 있구나

 

 


 

 

이담하 시인 / 임관林冠의 숲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의 하이페리온* 우듬지는

중력이 빠져 나가는 다른 외계, 다른 도시

목이 아픈 것으로 길이를 재는 높이마다

수시로 반짝거리는 수관

점박이올빼미와 알락쇠오리를 안개로 기르는 갈수기에

말을 하고 싶을 때는 새를 시켜서 하거나

키를 늘이는 습성으로

우듬지에서 뿌리까지

몇 번의 빙하기와 화마가 덮친 날,

무사히 빠져 나온 날과 공룡이 사라진 무서운 날은

수직으로 크는 심재 속에

옹크린 나이바퀴는 나무의 기억으로

가지마다 반짝거리는 임관의 숲

조심성 없는 바람이 스쳐

영혼의 층과 목질의 층에서

거주자들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하이페리온 우듬지

안개선단이 들려 가는 임관의 숲이다

 

*하이페리온 Hyperion : 미국 캘리포니아 레드우드 국립공원의 아메리카삼나무. 높이 115.54m, 나이 600살 이상 추정. 세계에서 가장 키가 큰 나무.

 

 


 

 

이담하 시인 / 남방칠사

 

 

강물의 집, 바다의 집을 지었다

강물 따라 흘러온 것들,

바다에서 달려온 것들로

한 채 오두막을 지었다

바람이 지나가다 창문을 툭 치고,

물결 속을 오르내리던 물고기들도

허공으로 뛰어올라 집안을 들여다본다

전류리 포구의 내 오두막에

처음 도착한 물들은 부끄러움을 모른다

바닷물을 만나려고 달려가는 강물의 씨앗들과

강물을 만나려고 밀려오는 바닷물의 씨앗들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서로 어깨를 껴안으며

사랑하는 사람처럼 이윽고 침묵 속에 잦아든다

이곳 전유리 포구에서는 마중물도 배웅물도

한 덩어리가 되어 그렇게 흘러간다

그렇게 내 오두막도

바람의 집, 강물의 집, 바다의 집,

구름의 집으로 서 있다

 

 


 

 

이담하 시인 / 키에르케고르 풍의 갱년기

 

 

나는 해당화 나무에서 태어나

해당화 나무 밑에서 사춘기를 보냈다

해당화가 꽃을 피우듯 마침내

내 신장이 해당화 꽃으로 피어나자

내가 피운 꽃들이 친구를 불렀다

흰 가운을 입고, 흰 마스크를 하고

흰 장갑을 낀 꽃들이 찾아왔다

알사탕 같은 약이 피어나는

꽃들도 찾아 왔다

그들과 함께 몽롱한 꿈을 꾸다 본즉

내가 피운 꽃들은 마른 꽃이 되고 말았다

해당화 나무가 피운 꽃이 시들어도

내가 피운 마른 꽃은 시들지 않았다

나는 해당화 나무에서 태어나

해당화 나무에서 사춘기가 지나갔지만

나는 결코 해당화가 되지 못했다

내가 원한 것은 아니지만 나는

마른 꽃이 되어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다

 

 


 

 

이담하 시인 / 빨래

 

 

손과 발을 떼어 놓고 한 통 속에서 돌았던 토르소들

막 섞여도 근친이 아니어서 비난받을 수 없는 옷

 

입고 있다가 젖으면 다 빨래다

 

스스로 물살의 시간을 견뎌 온 빨래

뼈가 없어서 쉽게 구겨질 뿐, 마르지 않는 빨래는 없다

마르면서 줄어드는 품보다 기장,

작년에 입었던 옷이 감쪽같이 줄어드는

빨래의 연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개발이 덜 된 지역에서는 아직도 빨래를 개 패듯이 팬다

투쟁과 저항이 방망이질에서 유래됐다는 설은

덜 마른 빨래를 두드리는 눅눅한 고백으로

아이 셋 낳을 때까지 주면 안 되는 날개옷도

 

입고 있다가 살만 빼면 다 빨래다

 

 


 

 

이담하 시인 / 한철 내내 굴러다니는 지구

 

 

지구의 측면을 두드리면

텅텅거리는 응답을 보내온다

 

역적도 아니면서 온몸으로 칼을 받아

한 번에 쩍,

잘 익은 여름이 반으로 갈라지는 수박 시대

여름은 약속을 지켰다

 

한철 내내 굴러다니는 지구

칼끝에서 벌어지는 지구의 단면을 보면

까만 소혹성들이

숨은 그림으로 박혀 있는 만월을 잘라

조각달로 건네는 여름밤

손끝에 뜨는 적월(赤月)을 들고

퉤퉤 까만 밤을 골라 뱉는 여름엔

누구의 입에서건 중력이 생긴다

 

칼끝에서 지심을 보는 계절

얼룩무늬 지구가 팽창한다

천문학적 비율로 축소된 닮은꼴인

갈라진 수박 속에는

지구공동설 같은 붉은 의견과

덜 익은 의견이 하나둘 들어 있는

지구와 비슷한 수박의 적도

지구의 보호색 같은 색깔이

사람 몸에서 희석되는 여름 저녁

 

 


 

이담하 시인

강원도 홍천 출생. 본명: 이은주. 2011년 《시사사》로 등단, 2016년 《한라일보》 시부문 당선. 시집 『다음 달부터 웃을 수 있어요』 문학나눔 우수도서 선정. (주) 백경 사외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