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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남주 시인 / 상처는 아름답다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8.
박남주 시인 / 상처는 아름답다

박남주 시인 / 상처는 아름답다

 

 

모르포나비 날개는 여러 개의 비늘로 이루어져 있다

1매의 비늘에는 찢어진 틈이 ㅇ.7㎛간격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 비늘의 찢어진 틈의 단면에 빛이 들어가

선명하고 깊이 있는 색깔을 낸다

제 몸 안에 숨기고 있는 쓰리고 아픈 기억이 생생하게 되살아나

투명한 푸른빛과 금속광택이 된다

 

모르포나비 날개의 찢어진 틈 사이로

언뜻언뜻 보이는

곪아터지고 문드러진 내 상처

이제는 몸 안에 지니고 있는 사실조차 느끼지 못하는

내 맥박이 되고 숨소리가 되는.

 

 


 

 

박남주 시인 / 단오부채

 

 

부채의 무게 중심을 생각해보았다

힘은 뱃속에서부터 나오는 것이라는 생각에

그 시작도 끝도 없어 보이는 연속무늬가

한가운데 힘을 끌어모으고 있다가

밖으로 내보내는 것으로 보인다

 

한가운데서부터 부챗살이 사방으로 퍼지듯

살이 뻗어나간 방향으로 부채의 힘이 고루 퍼졌으리라

가벼우면서도 탄력 있는 대나뭇살이 제 구실을 다할 수 있도록

곱고 부드러운 화선지가 그 위를 단단히 받치고 있다

아교풀을 적당히 먹은 화선지는 제 몸을 팽팽히 부풀린다

 

바람 한 점 비집고 들어갈 틈도 보이지 않는다

 

 


 

 

박남주 시인 / 눈 사진을 찍었다

 

 

눈이 펑펑 쏟아지더니

온 세상을 덮었다

 

새 이불 넓게 펼쳐 놓은 겨울 밤

그 위를 뒹굴었던 나른함이 그리워

눈 위에 누워본다

 

어린 시절처럼 손에 손잡고

새하얀 인화지에

새하얗게 박힌 포즈가 붕어빵 같다

 

나이도 없고

주름도 없고

신분도 없는

평등한 입체사진 한 장 출력되었다

 

 


 

 

박남주 시인 / 애야

 

 

애야!

내가 너를 죽이는 것이 아니라

네가 나를 살리는 것이다

애야! 미안하구나

애야! 고맙구나

 

피 한 방울 땅에 흘리지 않고

고통을 주지 않게 양을 죽이는

고비사막의 유목민은

게르를 옮기거나 양을 이동시키거나

아이를 키우거나

반복에서 얻은 숙달된 삶에서 사랑을 얹는다

 

어머니가 평생 사랑을 얹어 불러준

가슴 찡했던 말

아리도록 그리운 말

 

애야!

 

 


 

 

박남주 시인 / 나 거기에 있었다

 

 

“꼭꼭 숨어라 머리카락 보일라"

책장 한구석에 깊숙이 자리잡고 있었다

점점 색이 바래고 먼지가 켜켜이 앉아

본래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언제부터 이곳에 있었는지 기억조차 없고

이제 그만 바깥세상으로 나가야 하나

마음을 조였다 풀었다 하는 사이

해와 달은 수없이 떴다 지고

바람은 제멋대로 들락날락하고

문득 코끝 간지럽히는 초록향기에

몸은 허공에 둥실~

나, 그만 마음을 활짝 열어버렸다.

 

 


 

 

박남주 시인 / 에델바이스

 

 

몸을 세워야 겨우 지나갈 수 있는

지닌 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비로소 지나갈 수 있는

 

바위와 바위 비좁은 틈을 비집고 지나다

온몸을 감싸는 숲의 향기에 취해

삐죽삐죽한 바위며 강물의 아름다운 자태에 홀려

 

그만 발 삐끗,

천 길 낭떠러지 아래로 떨어져

끝없이 깊은 숲의 길을 잃고 헤매다

숲의 푸근한 품에 와락 안겨

 

까마득한 절벽에 가까스로 피어난 꽃

 

죽은 영혼을 달래는 진혼곡

 

 


 

 

박남주 시인 / 아름다운 보시

 

 

밟을 테면 어디 밟아 봐?

 

뿌리를 흙 위로 내뻗는 나무가 있다

절반은 흙 속에 절반은 흙 위로

양쪽에 제 뿌리를 걸치고 있다

사람으로 치자면 양다리를 걸치고 있는 사람?

 

나는 이 나무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주기로 한다

흙 속에 터를 잡고 하늘을 향하여 발돋음하는

해 오 름 나 무

땅 위나 하늘길이나 물 속이나 어디 안전한 곳이 있든가

제 아무리 조심을 한다 해도 차량이 들이박고 미생물이 몸속을 파고들고

낮게 날던 까마귀가 머리채를 흔들기도 하고

그러니 닥치는 대로 여기저기 뿌리를 내리고 살 수 밖에

 

해오름나무는 가지를 넓게 뻗을수록 뿌리도 그만큼 넓게 뻗어나간다

제 영역을 확실히 다지자는 것이다

흙 위에 뻗은 뿌리는 돌덩이만큼 단단하다

아무리 짓밟아도 끄떡하지 않는다

아니 밟힐수록 오히려 단단해진다

구박을 받으면 받을수록

나 보란 듯

싱싱하게 살아나는 강인한 생명력

 

 


 

박남주 시인

서울 출생. 상명여대 국어교육과, 동국대 교육대학원 국어교육과 졸업. 1998년 <현대문학> 신인상에 당선 등단. 시아카데미, 사랑 동인. 시집 『단오부채』(2001 해외동포추천도서), 『중심은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