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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조명희 시인 / 도다리쑥국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0.
조명희 시인 / 도다리쑥국

조명희 시인 / 도다리쑥국

 

 

 언니,

 

 우리 통영 가요

 

 첫눈 오는 날 아는 동생이 통영에 가잔다 생선을 좋아하지 않으면서 도다리쑥국을 먹잔다

 

 그 사람은 일 년에 한 번 꼭 통영엘 간대요

 

 나는 통영에 여러 번 가 봤고 중앙시장에서 도다리쑥국을 먹었고 함께한 그 맛을 이제는 잊을 만한데

 

 언제 갈까?

 

 동생은 이른 봄에 가자 하고

 

 나는 겨울 가기 전에 가자 한다

 

 언니, 그거 알아요?

 

 가자미를 입에 넣고 국물을 뜨면 입안에 바다가 요동친대요 그것도 쑥 향으로

 

 그 사람이 그랬어요

 

 이제 막 시작하려는 사람과

 

 이미 끝장난 사람 둘이 앉아 통영에 가자 한다

 

 도다리는 한쪽으로 눈이 쏠려 있다는 걸 알 듯 우리도 이제는 사람에 대해 알 때가 됐는데

 

-『서울경제/시로 여는 수요일』 2023.12.20. -

 


 

조명희 시인 / 미란이

 

 

 미란이는 양계장 집 막내딸이었다

 

 도시락엔 언제나 달걀프라이가 있었고 노른자 같은 두번째 분단의 분단장이었다

 

 생물시간에 듣지 못한 유정란 이야기나 오종종 병아리 떼 몰고 다니며 등판 까진 앎탉 이야기를 들려주던 미란이

 

 같은 날 낳은 알도 일찍 병아리 되는 놈 있듯 2교시 끝나고 도시락 뚜껑부터 까던 미란이는 취업도 빨라

 

 달걀판세던 눈썰미로 경리부장을 넘보기도 했다고

 

 그런 미란이가 저 세상도 일찍 넘봐

 

 동창회 날이면 삶은 달걀 같은 미란이 얘기를 한다

 추가로 나온 계란탕을 퍼먹으며 그때로 간다

 

-시집 <언니, 우리통영 가요>에서

 

 


 

 

조명희 시인 / 이이불이

 

 

스님은 주변 한 바퀴를 권한다

지워지지 않는 얼굴 있어 발걸음은 서성이고 뒷산에선 부엉

한낮에 부엉이 운다

 

꽃은 사방에 피어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말

수선화를 보며

 

무엇을 보았나요? 스님이 묻는다

 

봄과 여름을 보았습니다

꽃으로 핀 수선화가 있습니다 때를 기다려 잎 키우는 원추리를 가려냈습니다

 

부엉이는 귀가 쫑긋 ㅂ이고요 올빼미는 얼굴이 ㅇ이라는데요

"나는 굳이 뭔가를 들추려하고

 

스님이 커피를 내린다

일주문이 없다 사대천왕과 요사채가 없다 나는 절에서 커피를 마셔본 적이 없다

 

없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애써 보려 하지 않아도 보일 겁니다

 

지우려던 사람의 뒤가 보인다 그 앞에 손건네는 사람 있다

수선화와 원추리는 내버려 둬도 피었다 지고

 

부엉이는 부엉

밤낮이 없다

 

-시집 『언니 우리 통영 가요』에서

 

 


 

 

조명희 시인 / 미역국

 

 

미역국 좀 먹어본 사람은 불꽃을 줄인다

우욱은 끓이면 누랬다 해쑥은 소다를 넣고 삶았다

나는 잎 넓히기 전 모가지 비틀린 채소와 같았다

 

암시랑토 않당게 누가 알기나 허간디

아랫배가 평온해 눈두덩은 좀체 가라앉지 않았다

미역이 타닥거리며 냄비 바닥에 눌어붙도록

더 불렸더라면

참기름에 볶았더라면

자전거를 일찍 배웠다

손 뗀다 말만 없었더라면 거침없이 내달렸을 텐데

마구 흔들렸다

몇 번을 쓰러져 보고서야 넘어지는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끓이면 파래지는 해초

뭉근한 맛을 안다

 

-반연간 『작가마당』(2022년 하반기)

 

 


 

 

조명희 시인 / 세

 

 

 엄마는 양은 밥상만 한 땅뙈기에 세 들어 살았단다 이래도 저래도 산다는 게 세상에 세 들어 사는 거라 겁이 없었단다

 나도 엄마 배 속에 세 들어 살았단다 사글세란 그렇단다 주거니 받거니 하다 줄 수 없으면 방 빼는 거란다

 그날도 엄마는 밭에 갔단다 팔 걷어붙이고 김장 무 몇 개 뽑고 잠시 쉬어 다시 끙, 하니 내가 뽑히더란다

 줄 세는 없고 주인 얼굴 한번 보자고 서둘러 나왔단다

 세상에 나와 세 치르다 한 시절 가고 탯줄 묻은 자리 오동나무 꽃만 환장하더란다

 나도 환장한단다

 

-시집 『언니, 우리 통영 가요』, 걷는사람, 2023,

 

 


 

 

조명희 시인 / 입춘

 

 

 응, 응,

 그럼 이따 봐

 

 2월은 봄을 기다리는 사람들로 점점 짧아지고

 

 약속시간이 더디 와 십 분이면 족한 거리를 돌아 돌아 걷는다

 작업차량이 차지한 도로의 복판을 피해

 

 신발보다 싸다는 타이어뱅크 앞으로 지나칠까 온누리 통신쪽으로 갈까 차라리... 변두리엔 언덕배기가 많아 담벽 무늬엔 틀린 그림이 없다. 쑥부쟁이 앉았던 자리 돌멩이 얹는다 새싹 딛고 오르라고 고층 건물 사이 사라지는 겨울의 별뉘

 

 화장품 가게에 들러 진달래 립스틱을 샀다 그새 노면엔 새로운 방향의 화살표가 그려지고

 

 저쪽에서 그가 손을 흔든다

 

 


 

 

조명희 시인 / 꽃차는 잘받았습니다만

 

 

커피를 끊어 보라고

잠 못 드는 이유가 딴 데 있는데 향좋은차를 보내겠다 한다

 

베란다에 지치지 않는 초록 있다 불면의 밤엔 잎을 세는 습관이 생겼다

 

불을 끄고 누우면 사방으로 뻗어나간 벽지에 알 수 없는 식물이 무성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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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악,

언젠가 우리가 함께 탔던 놀이동산의 자이로드롭처럼

 

컵 속에 물결이 번진다

충충의 쌍떡잎식물이 꽃을 피우고 세화리 도롯가에서 보았던 유채꽃이

 

화르르

 

샛노랑에 우리가 묻힌다 불면의 습관이 방안으로 들이쳐 하얗게

 

새하얗게 날은 밝아 너는 또 꽃으로 피는데

 

-시집 『언니, 우리 통영가요』에서

 

 


 

조명희 시인

2012년 《시사사》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껌 좀 씹을까』. 2020 대전문화재단 창작지원금 수혜. 2021 아르코문학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