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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영신 시인 / 너를 만나는 방법
같은 자세 같은 믿음의 정도로 살아 너 있는 그곳으로 가겠다
너의 자세로 앉아 밥을 먹고 너만큼 운동하고 너처럼 웃고 너의 표정으로 책을 읽고
너처럼 살다 가면 마침내 너 있는 그곳 그 근처라도 가겠지
너를 만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
너처럼
송영신 시인 / 벌레에게 길을 묻다
늦은 밤 연구실 바닥을 기어가는 벌레 한 마리 아니, 제 딴에는 달려가고 있는지도 몰라
책을 펴면 다족류의 벌레 같은 글자들 우루루 쏟아져 내리곤 했다
벌레는 제 갈 길을 알고나 있는지 밤새 더듬은 것이 먼지와 인간의 그림자였다는 것을 알기나 하는지
문득, 다족류를 닮은 그림자 하나 한밤의 퇴근도 미룬 채 멈추어 섰다 여러 쌍의 다리를 가쁘게 움직이듯 방향도 없이, 허둥대며 달려온 눈먼 시간들
벌레여 너를 닮은 나의 하루도 막을 내리는데 무엇으로 고문 같은 희망을 또 만들까
벌레 하나에 물음표 하나 걸어 놓고 서성이는 나는 다족류의 DNA를 지닌 게 분명하다 나의 더듬이가 어둠을 만진다 서로의 흔적이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되돌아가는 것이다
월간 「모던포엠」 2023년 5월호 발표
송영신 시인 / 비꽃 내리니
이마에 빗방울 하나 톡
비꽃 내리니 온 세상이 분주하다
소음이 조붓한 골목에 드니 욕망은 길섶에 눕는다
고난이 줄을 이어 는개처럼 내린다 해도
낭창낭창 남실바람 타고 원망일랑 구름으로 흘러간다
한차례 비바람 꽃비 내리니
이제 잊으라 한다 온 세상이 고요하다
시집 「기차는 우리를 같은 곳에 내려놓지 않았다」(상상인, 2023) 수록
송영신 시인 / 벽
열리지 않는 문 앞의 망설임은 또 하나의 벽
안개인 듯 물살인 듯 서로 부둥켜 녹아들던 품의 온도를 기억한다 밀고 당기고 두드려 봐도 우리는 안과 밖이 같은 벽이다
낙엽이 가라앉고 겨울이 새 나가길 여러 번 너의 끝과 악수하고 돌아서는데 안녕이란 빛나는 말로도 무덤 같은 겨울을 만드는 기막힌 변주
너와 내가 한 방향일 때 침묵도 타는 목마름도 문이라 믿었지만 우리가 찍은 모든 말의 마침표 벽이 되었다
문을 닫는 것은 이별을 고하는 가장 살가운 습관 문과 벽이 구별되지 않는 너와 나의 인연도 이제 유적 같은 벽이라 습기를 드리우는 그림자가 서릿발처럼 시리다
송영신 시인 / 감추사에서
1. 여기선 그대가 그대가 아니다 그저 흘러가는 구름 먹물처럼 번져오는 그리움이다 그냥 그렇게 스쳐 가기를
2. 촛불을 켜면 말이 먼저 떠나고 침묵이 파도처럼 들어온다 어둠으로 마음이 더 밝아지는 시간
눈을 떠야 어둠이 어둠으로 보이는 역설의 공간 어느 마음에 마침표를 찍어야 그대가 그대가 아닐까
잠들지 않기 위해 바다는 쉼 없이 제 몸을 흔들고 파도에 부서지는 달빛만 어지러운데
수면에 던져둔 눈길 어느새 파도가 되고 섬이 된다
침묵해야 다가갈 수 있는 바다의 곁 동해바다에선 파도만이 말할 권리가 있다
3. 여기선 그대가 그대가 아니다 그저 불어오는 한 줄기 바람 그냥 그렇게 살며시 흔들고 가라
송영신 시인 / 그냥
비어 있어 더 단단해지는 밤거리 문득 떠오른 이름 있어 그냥 걷는다
잠시 멍해지고 폭포 같은 한숨이 나고 가로등을 걷어찬다
이름 하나 잃었을 뿐인데 이쪽 바람에 흔들리고 저쪽 소문에 넘어진다
은유로 가려진 속살의 물기 날려버리고 마른 장작으로 타오르는 그냥의 미덕을 배웠다
그냥은 말이 없고 그냥 그립고
그냥 죄가 없고 그냥 아프고
그러나 그냥은 이유가 많다
그래서 내가 너를 그냥 생각한다
2021년 《문학광장》 신인문학상 등단시
송영신 시인 / 틈
틈을 메우는 것은 벽을 세워 바람의 길을 막는 일
어제와 오늘이 스스럼없이 드나들어 구분 없는 평안의 틈
틈으로 한 줄기 빛 들어 공간이 살아나면 바람의 손길 따라 천년의 꽃 피어난다
빈틈 보이는 사람에겐 스며들고 싶듯이 빈틈을 열고 들어가 꽃 한 송이 피워 놓고 싶다
창틈으로 새벽 스며들 듯 빈틈으로 사람다워지는 찬란한 틈 그 틈새로 세상이 열린다
시집 「기차는 우리를 같은 곳에 내려놓지 않았다」
송영신 시인 / 비밀 비밀은 드러나지 않으니 있는 것이 아니다 감추어야 하므로 없는 것도 아니다 비밀은 헛되므로 있는 것이 아니다 헛 되더라도 성가시니 없는 것도 아니다 세상에 비밀은 없다지만 세상에 비밀 없는 사람도 없다 누군가의 비밀이 되고 누군가의 약속이 되었으니 세상엔 말 못할 무덤이 많다
송영신 시인 / 사물은 살아 있다 사물도 사연이 깃들면 살아 숨 쉰다 그가 선물해준 시집 한 권 파도가 실어다 준 그린 듯한 문양석 눈물 같은 이가 남기고 간 탁상시계 들여다보고, 거꾸로 보고, 달리 보면 사물은 살아 움직인다 무대 뒤 분주한 움직임처럼 사물의 이면엔 움직이는 의미가 있다 자주 들었던 장소 함께 먹었던 음식 같이 나누었던 대화 남기고 간 물건 사물도 사람과 연결되면 생명이 된다 늙어가고 새로워지고
송영신 시인 / 사과 한 알의 우주
사과가 익는 것은 이제 떠날 때가 되었다는 것 꼭지를 따는 것은 우주와 연결된 탯줄을 끊는 일이다 얼마나 많은 이야기가 사과 꼭지로 익어 갔을까 얼마나 많은 햇살, 얼마나 많은 별빛과 달빛, 얼마나 많은 바람의 속삭임이 다녀갔을까
사과를 깎는다 사륵사륵‘여인의 옷 벗는 소리’가 들리고, 접시 위에 빠알간 옷이 쌓인다 하얀 속살 나부껴 둥근 달이 뜬다 겨울 들판에 눈이 내리고, 길은 끊어져 바람도 잠시 걸음을 멈춘다
우주를 한 입 베어 먹는다 관능의 시선이 입맛을 돋우고, 오월의 신부 같은 햇살이 입가에 머문다 농부의 발자국 소리가 입안을 유유할 때 꿀비, 단비 내려 스리슬쩍 목을 넘는다 꽃바람에서 서릿바람까지, 벌레의 이빨에서부터 고요의 가지를 즐겨 찾아 주던 새들의 지저귐까지 모두 배경음악이다
-시집 「기차는 우리를 같은 곳에 내려놓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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