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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문정영 시인 / 울음을 묻다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3.
문정영 시인 / 울음을 묻다

문정영 시인 / 울음을 묻다

 

 

구름이 산의 왼쪽 허리를 긁는다

저 가려운 곳에 긴 울음이 숨겨져 있다

 

새 한 마리가 의문을 품고 저 길을 난다

저기서 헤어진 사람도 숨겨진 물음을 묻는다

 

그 물음을 얻기 위해 새는 사람은 어디로 갔을까

 

나무는 드문드문 눈을 뜨고 있다

아득하다는 말은 저 길을 사람의 눈으로 묻는 것

희고 검은 것은 낮과 밤의 가라앉음

 

너를 희다 검다 말하기 위해서는

그 안의 울음을 먼저 물어야 한다

 

 


 

 

문정영 시인 / 가시

 

 

백지에 그믐달이 걸려 있다

가장자리 그늘이 조금 찢겨지고

자작나무 표피에 쓰인 자글자글한 무늬마저 벗겨져 있다

덤불에 걸린 날개가 어느 하늘을 날았던 것인지

누군가에게는 제 몸을 뚫고 나온 꽃,

세상이 가시거나 그가 가시거나

생각이 오래 박혀 있는

날것 중 가장 큰 허공을 가졌던 그가 가시나무에 눌려 있다

하늘이 낭떠러지로 쏟아져 내린다

지상의 좁은 발자국은 그의 살아 있는 모자

12월은 얼음이 박힌 모자

 

 


 

 

문정영 시인 / 내가 기르지 않는 나비

 

 

 그녀에게 가는 길에 모르는 나비가 따라온다 길은 낮아지면서 캄캄해지고 나비는 거기까지다

 당신의 이름을 한 뜸 한 뜸 수놓은 손수건 한 장 접어 간다

 손수건을 펼치자 고구마 줄기 같은 감정선

 그녀는 수염이 없는 고양이의 후손, 일일 휴양지의 간판, 나비는 나보다 먼저 글자를 읽는다

 의도한 것은 아니나 나는 그녀에게 닿기 전 이미 나비의 의도를 안 것이다

 나비는 내가 기르지 않는 고양이 그녀는 나보다 나비를 사랑해!

 내 사랑이 비껴간 그곳에서 나비는 다도해처럼 흘러다닌다

 나비는 귀를 옆으로 접은 채 꼬리를 세우고 그녀 앞에 앉아 있다

 그날부터 내가 기르지 않는 나비가 머릿속에서 둥둥 떠다닌다

 

 


 

 

문정영 시인 / 인니, 인도네시아

 

 먼저 도착한 당신의 명랑은

 

 인니를 꿈꾸는 나의 기대였을까, 해수면 상승 전 자카르타행 티켓은 인내와 불편뿐인 베스트셀러의 한정판!

 

 지진, 쓰나미, 화산 폭발, 태풍, 홍수, 웃음이 사라져가는 내면들

 우리 17,508개의 섬으로 다시 이어질 수 있을까

 

 인니 여자의 맨발은 고행의 상처투성이라고 당신이 말했을 때

 

 왜, 발리의 자스민 꽃잎이 생각났을까, 열정이란 태울수록 붉은 입술 모양의 산불이라 속삭였지!

 

 

 몇 년 전 서울의 바람부는 12월은 어떤 예언이었을까

 

 가끔 몸으로 앓는 순간이 오면 열대를 상상하고, 갈 수 없어 더 그리운 나라의 자오선을 그려요

 

 울음 막 그친 목소리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인니의 소녀들을 끌어안 듯

 

 유럽의 절벽 앞에서 이별한 시를 읽은 뒤, 내가 그 사람이고 싶은 몽상을 자카르타의 공항에 내려놓아요

 

 인니에서 당신은 나의 어떤 명랑일까

-계간 『문예연구』 2025년 봄호 발표

 

 


 

 

문정영 시인 / INSIDE OUT

 

 

 공중에서 흔들리는 잎들의 오후는 어디로 갔을까, 한 사람의 세계가 흰빛으로 사라졌는데

 

 나는 아직 한여름 크리스마스 같은 시를 쓰고 있고, 폭설 같은 노래 불러본 적 없는데

 

 생존을 위해 아마존의 붉은개미 떼가 물 위를 떠도는 것처럼

 

 내 등에서 맴도는 엘니뇨의 저음(低音)들

 

 북극의 얼음 없는 첫날, 우리의 감정은 어디에서 녹고 있을까

 

 이 지상에서 사랑이 사라진 첫날, 당신의 마지막 웃음이 나미브 사막의 흰개미 떼가 만든 원형들 같다

 

 한 사람의 부재가 덤벼들 때, 통증으로 통증을 다스리는

 

 안과 밖이 뒤집혀 삭막해진 저녁은

 

 세상에 끝나지 않은 잔치는 없다 한다

 

 질문이 사라진 나는 당신 없는 봄을 맞는다

 

 서로를 잘 안다 생각했는데 꽃 지는 시기가 다르다

 

 이별이 끝났다고 빙하가 생겨날까, 한 사람의 새파래진 울음을 더듬더듬한다고 사과가 붉어질까

-계간 『시산맥』 2025년 봄호 발표

 

 


 

 

문정영 시인 / 적조

 

 

나와 당신 사이가 겨울 돌멩이처럼 고요하네요

먼저녁부터 이마가 붉어지고 밭은기침이 나오네요

나는 적색의 몸이 불편하다, 말할 수 없는데

태양 폭풍, 대홍수, 가뭄이 당신의 손짓인가요

알래스카 그린란드 남극의 빙하가 당신의 울음인가요

내 몸에 핀 꽃들이 시들지 않아 당신 안다고 기도할 수 없 네요

하늘 필경사가 바다 풍경을 불안이라 쓰면

붉은 새가 흩어지는 서쪽이 달아나네요

사진에 찍힌 당신의 붉은 손바닥, 손금 사라진 자리에

이별이 앉았네요

적조한 자리에서 간신히 숨 쉬는 꽃이 보이는데

당신의 맥을 짚으면 피가 돌기는 하는 것일까요

내 안에서 당신의 슬픈 비린내는 붉은빛이네요

 

 


 

 

문정영 시인 / 사랑이라고 부르는 노래있을까

 

 

 몇몇은 아직 재래식 아궁이로 몸을 뎁히는 그런 바람 부는 동네의 길가에 쌓인 완전 연소된 연탄재 같은 그러나 우리는 이미 스스로를 위해

 다 타버린 몸을 가지고 있을 뿐, 그런 몸들은 항산화제로도 노화를 막을 수 없으며 이미 주어진 권리를 다 써버린 뒤

 '토지거래허가제'처럼 얼마만큼 크기 이상의 자유는 사전 허가를 득해야하는 ,대지가 효능보다는 가격으로 결정되는 그런 시대에서는

 사람들은 이제 누구를 위해 자신의 구멍을 열어 불꽃을 피울지 알지 못하고 서로가 서로의 마음을 허락 받아야만 하는 시대에서는

 

 어디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노래 있을까

 

 


 

 

문정영 시인 / 탄소발자국

 

 

나는 스무 살부터 만지는 장난을 좋아했다

 

여름을 신나게 만지다 가을을 놓치곤 했다

 

날마다 가지고 놀던 강의 눈매, 작은 풀꽃의 웃음, 느티나무의 바람

 

마흔 넘어서는 만질 수 없는 순한 시간들이었다

 

그때 만지던 것이 나의 젊음이었는지, 불안이었는지

 

그때마다 자꾸 밖으로 끌려가던 욕망들을 보았다

 

어떤 눈물은 만지지 않아도 흘렀고, 색깔이 검었다

 

눈동자를 잃어버린 저녁이 식탁 앞에 서서 기침을 했다

 

그 후로 性이란 호기심의 발자국이 탄소 가득한 거리를 맨발로 걸어 다녔다

 

사랑은 에너지를 연소하는 일,

 

서로를 원할 때마다 불완전한 발자국이 몸에 남았다

 

지금 지구의 눈물은 12시 5분 전

 

이제 장난칠 여름이 보이지 않는다

 

웹진 《님Nim》 2022년 10월호 발표

 

 


 

 

문정영 시인 / 모나코 모로코 모르핀

 

 

뜨거운 도시를 다녀온 바람의 말을 들었어요

 

바람은 입술이 없어 귀 가까이 소문을 내려놓았지요

 

그때 당신의 음성이 들린 것이 어느 대륙이었는지, 몽상이었는지

 

가벼워서 날개밖에 없는 햇살을 당신은 카사블랑카처럼 입었나요

 

울음 주사를 맞은 내가 알 수 없는 글자들 앞에 서 있네요

 

당신은 모나코에서 모르핀처럼 편지를 보내고

 

나는 다시 햇볕처럼 익어 반가워해야 하나요

 

가끔은 모나코에서 쓴 편지가 모로코에서 발신되네요

 

생각의 공간이 넓거나 좁거나, 눈동자가 희거나 검거나

 

모나코를 모로코로 불러보면 안다고 쓰여 있네요

 

당신은 나의 모르핀, 환각의 접점에서 만나는 밤

 

피부이든 깃털이든 눈물이든 당신 안에 숨겨져 있는 것들에

 

나는 깜짝깜짝 놀라지만, 서럽지는 않네요

 

이제 우리의 이별 아프리카 대륙처럼 내려놓아도 될까요

 

계간 『시산맥』 2022년 겨울호 발표

 

 


 

 

문정영 시인 / 합곡

 

늦여름 느릅나무 같은 손 맞잡은 적 있었지

너무 어둡지도 개이지도 말자는 혈자리였어

그냥은 만져지지 않는 엄지와 검지의 깊은 뼈 사이

가장 먼 별자리를 탁본한 것처럼 깊은 합이 생기는 곳

천주 내관 노궁 곡지 신문 백회가 아닌 합곡에서

너는 검지로 나는 엄지로 하나가 된 적 있었지

조금은 찌릿하고 약간은 신선한 밀어가 부딪히면

오래전 폐그물에서 빠져나온 바다거북의 거친 숨소리가 났지

이별 여행은 혈자리가 붉어, 네가 나로 순환되지 않은 것

스무 살 적 누나의 따뜻한 입맞춤처럼

그때 깊숙하게 묻혀 있던 카시오페이아 별자리를

오늘 다시 맞추어 본다, 合谷은 가깝다고 닿는 곳도

멀어서 닿지 않는 곳도 아니다, 지금 우는 몸이 겨울이다

 

 


 

 

문정영 시인 / 복숭아뼈 물혹 같은

 

 

다시 눈꺼풀 떨리는가를 정오에 물었다

초여름 소풍 후 우리의 붉은 샘이 생겨났다

나비가 여러 번 앉았다 날아간 흔적이 물방울로 고였다

귀가 열리고 코끝이 새겨진 도화꽃 옆에서 말했다

네가 나의 처음이야, 내 몸은 투우사의 붉은 천이야

물이 빠져나간 뒤 다시 차오르기가 이른 봄 같았다

너를 얻기 위해 나무 한 그루에 그늘이 차도록 물을 주었던가

한 쪽은 가물고 한 쪽은 물 폭탄인 南美처럼

꽃 그림 한 장 피어나는 순간 우리의 계절이 바뀌었다

그 장렬한 화촉을 위하여

지금 몸살 앓고 있는 것들, 패티쉬한 것들

하늘을 끌어와 덮고 싶은 사람들, 그 곁에서

우리는 서로의 복숭아뼈 물혹을 씁쓸한 시간으로 만졌다

​​

-웹진 《님Nim》 2022년 10월호 발표

 

 


 

문정영 시인

1959년 전남 장흥군 출생.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 1997년 《월간문학》으로 등단. 시집 『더 이상 숨을 곳이 없다』 『낯선 금요일』 『잉크』 『그만큼』 『꽃들의 이별법』 『두 번째 농담』 등. 시산맥 발행인, 윤동주 서시 문학상 대표. 지리산문학상 공동 대표 역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 3회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