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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명철 시인 / 바람이 되돌아설 때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4.
김명철 시인 / 바람이 되돌아설 때

김명철 시인 / 바람이 되돌아설 때

 

 

대림철공소 마른 쇠 깎는 소리에 묻혀

오토바이 한 대 소리없이 지나간다

늦은 겨울은 가로수 나뭇잎을 온전히 말아올리고

중학생 둘이서 책가방을 돌리며 간다 그 사이로

관광버스와 그 뒤편 장의행렬 차창마다

바람 한 점 없이 햇살의 반사가 눈부시다

 

밤새 침대 모서리가 긁혔다

불면의 버릇으로 떼어낸 살갗의 죽은 부스러기들이

눈과 허리에 박혔다

깎인 뼈와 깎이지 않은 뼈의 길이를 재면서

 

그래, 나에겐 아무도 없어도 좋다고 생각했다

 

쇠 깎는 소리에 묻혀

또다시 오토바이 한 대 급히 지나가고

단 한 번의 마지막 눈꽃축제를 생각한다

 

담담히 죽어가던 잔설 속 나뭇잎들과

밤새 바람 불던 내 가슴 사이를 무단횡단하며

새 한 마리가 유치하게 날아간다, 해도

 

눈 닿는 곳마다 생사가 걸릴 것이다

 

-시집 <짧게 카운터펀치> 창비

 

 


 

 

김명철 시인 / 독사

 

 

먹잇감을 통째로 집어삼킨 독사毒蛇의 불룩한 배처럼

검은 장의 행렬 사이에 노란 어린이 버스가 끼어 있다

 

여기는 지금 오전 8시

당신은 반 바퀴 돌아 오후 8시인가

나는 당신의 꼬리를 물고

당신은 기원전 300년 전의 묻은 나의 꼬리를

독사Doxa처럼 물고 있다

 

봄이 노랗게 피어날수록

수많은 것들이 죽어 살아날 것인데

독사Doxa를 가둔 자루가 풀려 스멀스멀 기어 나올 것인데

혀를 날름거릴 것인데

 

태초에 毒은 누가 심어놓았을까

 

절대자에게 시공간이 없다면

예수 그리스도가 지금 여기서 태어나고 하와가 지금 여기서

나뭇잎을 뜯어 치부를 가리고 있다면

내가 부활하면서 죽어가고 있다면

 

행렬처럼

앞뒤가 모두 죽음이고 행렬처럼 앞뒤가 모두 삶인 것처럼

유혹하는 독사毒蛇를 독사毒蛇가 잡아먹고 있는 것처럼

 

-《시와표현> 2018. 5월호

 

 


 

 

김명철 시인 / 목신의 오후

 

 

오래된 나무 계단을 오른다

계단 모서리 구석진 자리마다

음지의 꽃잎 안간힘으로 피어나다 떨어진다

 

성냥개비 탑을 쌓아 올리던 손가락이

불안정하게 갈라지는 G선으로 떨렸고

탑신은 서너 층도 올라서지 못하고 허물어졌다

창밖 눈을 맞고 있는 풀라타너스와 액자 속 모후의 햇살과

비스듬히 누워 하늘만 쳐다보는 목신

하필이면,

드뷔시의 바다네요

 

까페의 문틈을 넘나들던 바닷물이

불씨 지펴진 생나무에 닿을 때마다

사소한 죄들과

대책없이 떠난 나의 큰 죄가

현행범처럼 생생하게 피어났다 사라진다

꽃상여였을라나

음역을 벗어난 저음으로

어두워지는 골목을 가까스로 빠져나가는 붉은 붉은 꽃배

나는 자리를 뜨지 못한다

 

 


 

 

김명철 시인 / 바람의 기원

 

 

향나무 밑둥치가 두 갈래로 갈라진 틈새에서

백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습니다

역경을 극복하는 것처럼

고전적인 일입니다

당신에게 나의 눈빛이 닿았을 때도 그랬을 것입니다

경건과 황홀과 우울한 표정을 지나

당신의 몸과 내 뿌리의 전쟁

바람이 북동풍에서 북서풍으로 바뀌어서 혹은

새의 부리가 당신 가지에 걸린 탓도 있겠지만

당신을 알고부터 난

불가항력을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향나무와 소나무처럼

당신과 난 이질적이었고

언제나 나는 햇살에 목이 말랐습니다

나는 당신을 빨아들여 내 가지들을 길렀고

당신은 이른 봄 새의 모가지처럼 수척해졌습니다

바람에 당신이 흔들릴 때

내 머리 위에 떨어지던 햇살들을 따라

죽거나 산 내 가지들이

목을 빼기도 했습니다.

겨울을 준비하는 가을의 바람처럼

전쟁을 위한 평화나

평화를 위한 전쟁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의지는 바람의 의지였고

나는 햇살의 의지였다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당신과 내가 없이는

바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향나무대로 소나무대로

순응이나 제스처가 아니라

정곡으로 가겠습니다

내 갈라진 둥치에도

바람 한 점이 떨어졌습니다

 

 


 

 

김명철 시인 / 해독

 

 

돈도 사랑도 안 되는 노동만 하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물에 빠져 죽은 사월이 발목을 걸고

새들이 내 머리 위에서 찍 싸고 간다

나에게 깃털 하나 던져주지 않던 새들이었다

 

문 옆에 열쇠를 걸어두었고

방을 정리하지도 않고 집을 떠났으니

모르는 이들이나 다른 것들이 들락거렸을 것이다

 

내 못생긴 뿌리가 마르지 않도록

간혹 환기나 시키면서

내가 깎을 뿔이나 돌들로 장난이나 치면서

 

따듯하거나 검은 것들끼리

차갑거나 하얀 이들끼리, 아니면 같이

맘 편히 지냈기를 바랄 뿐이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가니

그들이 남아 있다면 내쫓지도 잡지도 않으려 한다

 

눈길을 한참 걸었는데도 비포장 길이다

오랜만에 오래된 시집처럼

햇살에 반사되는 눈빛이 독하지가 않다

 

 


 

 

김명철 시인 / 생각

 

 

‘나만’ 보고 있다가 불현듯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다

생활도 없고 관계도 없고

빽빽하던 소리도 없다

이명조차 없다

 

집 앞 목재상에 지게차가 없다

숲길에 산책이 없고

운동장에 체육이 없다

차도에 자동차도 없고

그 흔하던 까치 한 마리 없다

 

사람이 없다

 

고양이를 밟은 바큇자국처럼

내가 납작해지고 있다

 

-시집 <바람의 기원>에서

 

 


 

 

김명철 시인 / 죽어 별이 되지 못하거든

 

 

1

바람이 분다

이 바람에 내가 품고 있던 산 하나가 넘어지고 있었다

계곡물은 상류로 흘러 오르다 부러진 별자리들을 토해내고

빛살나무들도 시퍼렇게 눈 뜬 채 뿌리를 드러냈다

길 아닌 길을 달려보려 하였으나 그 길이 먼저 일어나 벽을 쳤다

하늘은 없었다

 

산 중턱에는 당신과 내가 천년을 살았던 동굴이 있었다

안개가 짙은 새벽녘이나 바람 없이 비가 내릴 때면

어디선가 산을 말아 도는 피리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산이 흔들흔들 머리를 들어 일어섰고 새들이 한 줄로 날아올랐다

우린 먹지도 입지도 않고 살았다

 

여름도 겨울도 미래도 없었다

동굴 속 어둠이 생생하게 살아 있었을 때

손과 발을 찔러 넣어 서로의 갈라졌던 마음을 만졌고 피를 나눴다

그러니까, 우리가 바람처럼 살고 있었을 때

 

날 선 바람에 끊어져 꼬리를 찾는 뫼비우스의 젖은 띠처럼

동굴 속 어둠이 흘러내려

달아나지 않는 차도 위의 비둘기를 밟기 전까지

 

2

빠른 속도의 각진 지그재그로 달리는 타르 냄새

스쿠터 뒷자리에 가까스로 매달린 당신은

아무 표정이 없다 떨어져 차도 위에 구르는 당신을 본 시외버스가

급브레이크를 밟지 않아도 아무 표정이 없다 아무 표정도 없이

그대로 내달리는 지그재그의 나

 

 


 

김명철(金明哲) 시인

1963년 충북 옥천 출생. 서울대학교 독어독문학과 졸업. 장안대학교 문예창작과 졸업. 고려대학교 대학원 국문학과 석사과정 및 박사과정 졸업(문학박사), 2006년 《실천문학》으로 등단, 시집 『짧게, 카운터펀치』 『바람의 기원』 『우리는 바람의 얼굴을 꽃이라 하고 싶다』. 문학이론서 『현대시의 감상과 창작』.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