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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희준 시인 / 싱싱한 죽음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4.
김희준 시인 / 싱싱한 죽음

김희준 시인 / 싱싱한 죽음

 

 

 편의점에는 가공된 죽음이 진열돼 있다

 

 그러므로 꼬리뼈가 간지럽다면 인체신비전 같은 상품을 사야 한다 자유를 감금당한 참치든 통으로 박제된 과육이든

 

 인스턴트를 먹고 유통기한이 가까운 상상을 한다 여자를 빌려와 글을 쓰고 사상을 팔아 내일을 외상한다 통조림에는 뇌 없는 참치가 헤엄쳤으나

 

 자유는 뼈가 없다

 

 냉장고를 여니 각기 다른 배경이 담겨 있다 골목과 심해 다른 말로 배수구, 그리고 과수원 세 번째 칸에는 누군가 쓰다버린 단어가 절단된 감정으로 엎어져 있다 빌어먹을 허물

 

 싱싱하게 죽어있는 편의점에는 이름만 바꿔 찍어내는 상품이 가지런하고

 

 형편없는 문장을 구매했다 영수증에는 문단의 역사가 얼마의 값으로 찍혀있다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2017. 문학동네

 

 


 

 

김희준 시인 / 태몽집

 

 

 어머니 엎드려보세요 세상은 내가 껴안을 수 없는 것으로 가득합니다 황금나무가 꿀을 품고 천장까지 자랄 것입니다 가지를 타는 흰 뱀은 환생을 꾀하고 거북이는 백사장 가득 알을 낳겠지요 중력에 눌린 명치가 무겁습니다 엎드린 잠은 딸꾹질과 통증을 유발합니다 그보다 더한 숨이 가쁜 금붕어가 유리 어항에 있습니다 색색의 꼬리가 물결무늬로 퍼지고 물결무늬는 단어를 완성시킵니다 돌아서는 몸짓이 쉼표를 만드는군요 벌어진 곡선에서 잉어가 튀어 나옵니다 금이 간 것은 어항입니까 침실입니까 엄청난 속력으로 죽음에 다가가 본 적 있으신가요 젊은 피를 수혈 받는 실험 쥐가 그러하고 황금나무 꿀을 받아먹는 입술이 그러하고 끝없는 흰 뱀의 허물이 그러합니다 허울없는 50번의 생일에서 어머니가 껴안은 것은 무엇입니까 지천명에 다다를 동안 품은 혁명 하나 없다고 우울하십니까 그럴 땐 손을 벌려 바닥에 엎드리세요 손아귀에 힘을 주고 백사장을 안아보세요 수천의 새끼가 알에서 부화하는 중일 겁니다 온 몸에 털이 가득 나있던 어머니의 첫울음이 그 몸짓과 비슷하지 않겠습니까

 

-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문학동네, 2020)

 

 


 

 

김희준 시인 / 슈뢰딩거의 피터팬

 

 

 되도록 가깝게 불러봐요 오두막과 낮잠을 좋아하는 꼬마의 습성을 페리윙클이라고 부릅니다 상반되는 감정을 동시에 지닌 청자색이래요 천진난만하게 부서질 요량이래요 비눗방울은 여름의 끝물에서야 상기된 뺨을 가집니다 발치에 떨어지는 자오선이 청량하고 부드럽습니다 이 계절이 사람이어야 한다면 너여야겠어요 연약한 얼굴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꼬마는 날을 받은 사람처럼 창백한 영정을 찍습니다 여름은 다각으로 죽음을 준비중이에요 스테인드글라스가 비추는 방안이 어쩐지 거룩합니다 행성의 입자가 굴러다닙니다 식탁은 짐짓 경건해져요 꾸덕한 팔꿈치가 닿습니다 그물에 걸러지는 악몽을 보는 동안 고운 재질의 잠을 맞이하기로 해요 그러는 사이 꼬마는 낡아버리고 바쿠를 곳곳에 방류합니다 해방된 것의 입장은 어떻던가요 꼬마는 영영 꼬마가 되고 나는 꼬마를 꼬마라 칭합니다 서로를 능멸해요 깨기 힘든 아침을 생각합니다 잠들기 어려운 밤과 닮았습니다 단정하고 폭력적이에요 잠꼬대는 어떤 모종의 것입니까 꼬마는 내가 가져본 처음의 경련입니다 바짝 깎은 손톱으로 식탁을 두드립니다 따끔한 손끝이 마음이라 여깁니다 사다리와 피리를 넘나드는 바쿠의 등을 올라탑니다 여름의 할당을 채우려고 여름을 버립니다 낯선 지도에 선을 긋습니다 하늘에서 말갛게 내리는 비를 맞습니다 나는 나의 꼬마를 훔쳐 극지로 달아납니다

 

 


 

 

김희준 시인 / 평행세계

 

 

 소나기가 지난다 당신은 내가 알지 못하는 이름을 나열하는 취미를 가졌다 책 냄새를 달가워하지 않는 벌레가 낡은 책갈피를 덮는다

 

 서점엔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은 책들이 오르내린다 책장은 만들어지고 가구점에선 나무가 제 생을 다하는 중이다

 

 그럼에도 내 자리 한 칸 없다는 사실이 나를 밤으로 내몬다

 

 과일가게에선 늙은 사과가 굴러다니고 그해 블랙홀은 가운데가 뚫린 모양이라는 기사를 본다 그러면 우리에겐 서로의 심장이 있다가도 사라지곤 했다

 

 나는 사과를 먹었다가도 다시 뱉어내고 괜찮다가도 괜찮지 않아질 수 있었다

 

 속성을 반복하는 것이 당신의 이름이라면

 우린 자라면서 자라지 않는 측백나무 길을 산책로 삼았을 것이다

 내리면서 내리지 않는 비를 맞으며 맨발로 걷다가 발에 밟힌 개미를 죽이면서 죽이지 않았을 것이다

 

 당신이 나열한 이름을 되새기면서 당신을 잊었을 것이고

 당신은 다른 사람 손을 잡으면서 떠났을 것이다

 

 


 

 

김희준 시인 / 친애하는 언니

 

 

 유채가 필 준비를 마쳤나봐 4월의 바람은 청록이었어 손가락으로 땅에 글씨를 썼던가 계절의 뼈를 그리는 중이라 했지 옷소매는 죽어버린 절기로 가득했고 빈틈으로 무엇을 키우는지 알 수 없었어 주머니에 넣은 꽃잎을 모른 체했던 건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박음질이 풀릴 때 알았지 실로 제봉된 마음이었다는 걸, 의사는 누워있으라 했지만 애초에 봄은 흐린 날로 머무는 때가 많았지 벚꽃과 유채가 엉킨 들판에 어린 엄마와 어린 언니가 있어 놀이기구가 안개 속에 숨어있었던 거야 숨바꼭질을 좋아하던 언니가 이불과 옥상과 돌담 그리고 유채꽃과 산새와 먹구름 속으로 달려가는

 

 한때 비가 내리고, 물의 결대로 살 수 없다면 늙지 않은 그곳으로 가자 소매 안에 훔쳤던 벚나무에 대해 사과하는 밤, 나무의 탯줄이 보고 싶었다 뭉텅이로 발견되는 꽃의 사체를 쥘 때 알았던 거지 비어버린 자궁에 벚꽃이 피고, 사라진 언니를 생각했어 비가 호수 속으로 파열하는 밤에 말이야 물속에 비친 것은 뭐였을까

 

 언니가 떠난 나라에선 계절의 배를 가른다며? 애비가 누구냐니, 사생하는 문장으로 들어가 봄의 혈색을 가진 나를 만날 거야 떨어지는 비를 타고 소매로 들어간 것이 내 민낯이었는지 알고 싶어

 

 파문된 비의 언어가 언니에게서 나왔다는 걸 알기까지 얼마나 걸릴까?

 

 


 

 

김희준 시인 / 포말하우트의 여름

 

 

안개가 안아주는 밤에는 당신의 별자리가 보이지 않는다

가려진 달이 가끔 구름의 테두리에서 벗어난다

안개가 보라색이야

당신이 흩어진다 보라 너머 삼각형 자리가 태어난다

달 근처에는 어떤 고리로도 완성되지 않는 토성이 있다

그 아래 고래자리에선

흰 뿔을 가진 외눈박이 인어가 말라간다

 

생각보다 뭉툭한

당신의 손가락을 보는 일에 밤을 다 써버리고

언젠가 저 손이 꼭 잡고 싶어

죽을 것 같던 시간이 도형에 갇힌다

긍휼에 가까워지는 마음을 길들이며

발음만으로 귀해지는 것에 당신을 오려붙이는 것이다

백열전구에서 한 눈으로 슬퍼하는 인어를 꺼내오는 것이다

 

아내라고 불러도 될까

 

한 음절씩 아껴 부르다가 내 안을 모두 내어주게 되는 일

허벅지를 베고 누운 당신의 귀를 넘겨줄 때

어쩐지 심장보다 엄지 쪽 물갈퀴가 아파온다

 

그림자를 자르다가 실수로 잘라버린 종이 인형이 되어

절뚝이는 당신을 내 궤도로 들이는 일

불구가 된 내 안이 절름거리는 일

 

아내야 아내야

 

고리의 파편이 되어 그 이름을 부를 때

당신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거나

어느 때도 내 사람인 적 없던 아내를 부르며

안개를 안아보는 것이다

 

웹진 『시인광장』 2020년 7월호 발표

 

 


 

김희준 시인(1994~2020)

1994년 경남 통영 출생. 국립경상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同 대학원 재학 중(현대문학전공)이었음. 2017년 《시인동네》를 통해 등단. 유고시집 『언니의 나라에선 누구도 시들지 않기 때문』. 유고산문집 『행성표류기』가 있음. 제14회 웹진 시인광장 올해의좋은시 상, 제11회 시산맥작품상 수상. 2020년 아르코청년예술가 창작준비지원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2020년 7월 불의의 사고로 영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