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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선희 시인 / 모르는 사람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3.
정선희 시인 / 모르는 사람

정선희 시인 / 모르는 사람

 

 

강 건너로 이사를 온 후

모르는 사람들이 이웃이 됐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일기장

 

강 저쪽에 과거를 두고 온

이 낯선 자유가 비로소 낯설어 편했다

 

누구도 안부를 물어주지 않았고

누구도 오늘의 침울에 대해 궁금해 하지 않았고

그래서 아무것도 대답할 일이 없었다

 

심심하면 강물을 따라 걸었다

 

소식을 끊으면 기다려 줄 때인 거야

먼 곳에서 돌아올 때까지

 

아는 사람을 만들지 않으려는 도발을 계속했다

얼굴을 기억하지 않으려 벼랑에 집을 만들었다

 

표정을 지우면 모르는 사람이 된다

무표정으로 물건을 계산하고 말하는 연습을 하고 있다

 

강 저쪽에 많은 것을 두고 왔다는 말은

강물에 사람들을 흘려보내는 일과 같았다

 

 


 

 

정선희 시인 / 달항아리

 

 

달항아리 옆에서 나도 부풀어 올랐다

 

비어 있어야

완성이 되는 그릇

 

매끈하지 않아서

거칠거칠해서 마음 붙일 데가 있다

 

보름달 속에 아직 부서지지 않은 내가 있었다

금이 간 부분이 감쪽같이 붙어 있다

마음으로 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다

 

들숨으로 공기를 가득 채운

둥근 것은 불안하지 않아

 

보는 것만으로도 안심이 된다

상처라고 생각하면 상처가 아니다

상처의 목록을 불러줄 때마다 빙하가 녹는다

 

구석에 가만히 있는 것으로

구석을 완성하는 둥근

저 하염없음

 

나의 하루 종일을 하염없이 만들고 있다

 

하염없이, 란 말이

딱 어울리는 달항아리

 

그는 충분했다

하고 싶은 게 많은 내 곁에

그렇게 있어주는 것만으로 넉넉했다

 

 


 

 

정선희 시인 / 내 심장은 내게서 너무 멀다

 

 

 한동안 곶감은 못 먹을 것 같다

 

 얼었다 녹았다가를 반복했다

 물기가 빠져나가는 것을 서서히 즐겼다

 

 피싱 사기로 돈을 잃었다 사람을 잃었다 구석을 찾아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아들은 세상에 자리를 잡지 못했다 떨어지고 난 후 또 떨어졌다 아들은 조용히 울었다 병원에서는 연일 전화가 왔다 조직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했다

 

 몇 번의 쓰나미가 내 몸을 뒤집고 지나갔다

 휘청이다가 하늘을 쳐다보다가 세상을 흘기다가, 아예 누워 있기로 했다

 

 구름은 힘껏 활시위를 구부렸다가 내가 살고 있는 구석을 정확히 조준했다

 

 다급한 문자들이 불협화음을 이루며 날아들었다

 잘 모르는 세계에 덜미를 잡혔다

 

 말라가던 곶감에서 하얀 분이 돋아났다

 

 내 몸을 관통한 꼬챙이, 견디고 있다

 

 


 

 

정선희 시인 / 무드라 무드라

 

 

전 단계에 머무르셔도 됩니다

 

자벌레 한 마리 나무토막을 기어간다

 

숨을 쉬세요

부들부들 다리가 떨린다

닫힌 구멍에서 소리가 새어나온다

 

트리코나아사나

불안하게 나무에 매달린 자벌레

호흡이 불규칙해진다

 

단다아사나

여여한 시간을 틀고 똬리처럼

있기도 힘든 일이다

 

세상에 쉬운 건 없어요

호흡조차 뜻대로 되지 않는다

 

자벌레도 단단한 나무 위를 걷기 위해

살라바사나 살라바사나, 많은 시간을 등에 구부리고 있다

 

살아있는 시체처럼 놀이처럼, 우리

발은 땅을 딛고도 별을 쳐다보자﹡

 

무드라 무드라

작으면서 커다랗고 어설픈 몸짓

나무토막과 함부로 비교하지 마세요

 

요가매트가 나를 들어 올리고 있다

﹡노천명 <별을 쳐다보며> 변용

-웹진 『시인광장』 2024년 4월호 발표​

 

 


 

 

정선희 시인 / 얼레지 그녀

​​

올해만 피는 것도 아닌데

무엇에 홀린 듯 보였다

땅에 빨래집게를 물려 놓은 듯

날개를 하늘로 치켜들고

틈이 없도록 땅을 사뿐 들어 올리고 있다

내가 모를 때는 이름조차 없던 꽃

한 송이만으로도 벅찬데 무더기로 피어나 있다

부소암까지 그녀를 업고 왔다고 한다

심장이 약한 그녀가 금산을 오르고 싶어 했고

동기 몇이 들것으로 나르다 결국 그가 업고 왔다는 것이다

그는 키가 크고 넓고 탄력 있는 역삼각형 등을 갖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두근거렸을까

등은 또 날갯죽지가 얼마나 간지러웠을까

감히 그녀를 미워할 수도 없었다

너무 일찍 저세상으로 가버린 그녀를 질투할 수도 없었다

다른 곳에 옮겨 심으면 죽는다는 꽃

땅에 씨앗을 떨어뜨리면 1년 후에 꽃대가 형성되고

2년째 잎 하나, 3년째 잎 둘, 그렇게 6년을 지내다가 7년째 꽃을 피운다고 한다

왜 지금까지 그녀를 보지 못했는지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꽃말이 질투라고 했다

얼레지 군락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계간 『문예바다』 (2022년 가을호)

 

 


 

 

정선희 시인 / 드라마틱한 봄

 

​​

 길에서 우연히 첫사랑을 만난다거나 집 앞에서 옛 애인이 기다린다거나

 만우절에 일어나야만 했던 사건은 잊기로 했네

 직업군인이 된 그는 여고 시절 나와 편지를 주고받았다 그가 나를 찾았다 꽃도 없는데 온몸에 꽃이 피었다 그가 내 친구를 좋아했다는 고백 내 친구는 모든 남자들의 로망 노처녀에다 백의의 천사 유리성에 갇힌 공주였다 미모도 몸매도 그녀에게 미치지 않는데, 추억까지 나를 배반하는 것 같았다 드라마틱한 일은 나에게 어울리지 않아 입꼬리를 억지로 올리며 웃었다 차라리 그가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잃은 건 없지만 마지막까지 잃고 싶지 않은 건 있다

 흐드러지게 공중에 꽃잎 날리지 않았으면 좋았을 텐데 그러면 어쩌다 봄도 오지 않았을 텐데

​​

​계간 『시에』 (2022년 여름호)

 

 


 

 

정선희 시인 / 증명사진

 

 

그녀는 처음부터 초췌한 모습이 아니었다

요일마다 낮과 밤을 바꾸어 살면서

흰머리가 꽃처럼 자라고

눈 밑으로 달이 지나가고

오차 없이 턱이 뾰족해졌다

 

어쩌자고 저리 맨얼굴로 나왔는가?

불편한 마음으로 빠르게 채널을 돌렸다

 

텔레비전에는 잘 정돈된 사람만 나와야 했다

선입관에 맞게

 

역병이 번질수록 시간은 멈추었고

우리는 헤어졌고

그녀는 수학적이었으나 어떤 비율로도 자신을 돌보지 않았다

 

진실이 낯선 곳에서

그녀의 모습은 진실의 증명사진이 되었다

 

 


 

 

정선희 시인 / 바리데기, 여전히 바리데기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한 마리 새가 날아와 앉았다

 

 그녀가 울먹였다 생각해 보니 손 한번 따뜻하게 잡아준 적이 있었어 그래도 너는 할 만큼 했어 옆에 있어 드렸잖니 엄마한테 듣고 싶은 말을 누군가 대신해주었다

 

 엄마 엄마는 누구의 엄마였나요 왜 오빠와 남동생만 잘해주고 늘 나는 기억하지 않았나요 돈은 아들들한테 다 물어다 주고 병든 몸을 이끌고 찾아든 새 그렇게 새 한 마리

 

 나는 늘 엄마의 주변을 맴돌았다 엄마의 포근한 소용돌이에 한 번이라도 젖고 싶었다 엄마는 어디를 보고 있었나요

 

 엄마는 나를 괜히 낳았다고 했다 실수도 아니고 어쩌다가도 아니고 그 때부터 나는 괜히라는 말이 싫었다 어느 날 괜히 버려질 것 같은 아이 어느 날이 언제인지 눈치만 늘었다

 

 엄마가 죽기 전에 꼭 물아봐야 한다 왜 나를 주워온 아이처럼 키우셨나요 엄마가 나를 주웠다면 누군가, 어느 날, 괜히 나를 버린 엄마가 있을 것이다

 나를 버린 엄마와 나를 주워 온 아이처럼 키운 엄마

 

 내 몸은 하나인데 나의 엄마는 세상천지 두 명이었던가요

 

 한바탕 싸우기라도 해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엄마 일어나 눈을 떠 장난하지 말고 손이 차가웠다 나를 떠밀던 온기가 어디 갔을까 새처럼 떨고 있는 손을 가만히 잡았다 괜찮아 괜찮아 새 한 마리가 날아갔다

 

 


 

정선희 시인

경남 진주 출생. 경남대학교 국어교육과 졸업. 2012년 《문학과 의식》으로 등단.  2013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푸른 빛이 걸어왔다』 『아직 자라지 않은 아이가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