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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윤정 시인 / 그저 그런 낮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3.
최윤정 시인 / 그저 그런 낮

최윤정 시인 / 그저 그런 낮

페인트 칠을 벗겨 내면 시멘트가 나오고

시멘트는 많은 구멍을 지녔다

구멍마다 명도가 다르고 그것은 깊이가 상관한다

무화과 열매가 사라진 자리

빗줄기 왔다 간다

구멍으로 남으려면 기댈 곳이라도 있어야겠는데

가까스로 불어 간 바람은 뒤엉킨 채 공중을 맴돌고

시멘트를 떼다가 설거지 스펀지를 찾는다

스펀지가 갖는 몸의 전부가 구멍일 때

그것은 생략

슬픔이 감각되지 않는 순간만 남았을 때

그저 그런 대낮

그저 그런 일들만으로도 숨은 가빠 오고

가까스로 세운 키로

스펀지를 선반에 올린다

 

 


 

 

최윤정 시인 / 근친

 

 

잠시 불행했다

 

주방 수납장 칼꽂이에 거꾸로

꽂힌 칼은 쉽게 빠지지 않았다

 

겨울 저녁 근친 같았다

 

물을 뚝뚝 흘리며

꽂혀 있는 칼은 세 개가 넘고

 

오순 도순 모여 있는 과도까지

다섯 개가 넘었으니

전을 썰고 배를 깍는다

 

칼이 손에 착 감기는 날

창틀 가득 빗물은 고여 들고

 

칼을 사방으로 휘두르며

물을 뿜는 백정이라도 된 것처럼

 

칼날 결을 따라 번들거리는 어둠으로

불빛 베어내고 피로 낭자해진 손잡이 앞에서

 

무슨 기도로 방점을 찍어줄까

멈춘 피가 다시 도는 느낌으로

 

젓가락에 찔린 수육의 핏기를 닦는다

소담하게 썰어 접시로 옮긴다

 

가볍고도 긴 칼날의 곡성을

풀어헤친 머리칼로 경청한다

 

잠시 창문 가득 번득이는 빗줄기 되어

도마 끝에 멈춘 핏방울 되어

 

-계간 『미네르바』 2023년 겨울호 발표

 

 


 

 

최윤정 시인 / 무심코

 

 

잔잔한 부스러기는 가깝고

주말의 공원은 눈으로 덮여 간다

 

모서리 기울어진 얼음 새장을 망치고 나서 망연하게

벤치끝 시든 꽃다발로 앉아

 

전나무 쪽으로 옮긴 새장은

구름과 함께 흐르고

 

녹아서 사라지기 전 해야 할 일은 많았다

기꺼이 한 세계 앞에서 무너지고 나서

옷장 구석에 남겨진 작은 선물 상자

붉은 리본과 나무로 만든 새와 함께 어두워져 가고

 

눈을 깜박이는 새처럼

창밖 쌓인 눈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다

 

새를 놀라게 하지 않고 새장으로 들어가는 것°

너는 아직 어렵다 늘상 네가 먼저 놀라니까

 

한발 넣기 전에 잠시 숨을 멈추고

서서 망설이는 일이 새는 전혀 놀랍지가 않고

쌓인 눈을 놀라게 하지 않고 저 순색이 아닌 고요에

담글 발이 아직 내겐 없다

 

벌판을 짖는 햇살 앞에서

가지가 사그라드는 잔불 앞에서

순백의 하품을 하며

무거워진 깃털을 털며

 

숲에서 난 길 따라

입김이 남은 부리로

 

마침내 모래사장에 도착한

새만이 할 수 있는 일이겠다

 

도마 끝에 멈춘 핏방울 되어

 

° 옥타비오 파스 (멕시코 시인)

 

-계간 『포지션』 2023년 봄호 발표

 

 


 

 

최윤정 시인 / 은점까지 사라지기 전에

 

 

유리 꽃병에 담긴 물이

잘린 줄기의 단면을 보여줄 때

 

줄기는 가끔 안쓰럽습니다

 

물러진 단면은 지독한 이야기를 가지고 있지만

읽히지 못한 채 부서져 버리니까요

 

투명한 공기를 헤치고 은점표범나비가 날아갑니다

 

반투명 노랑은 치명적이죠

은점이 날개 위에서 반짝거릴 때

 

멈춰진 자전거의 세계를 훔칠 듯 다가와서

선잠에 빠진 거울 속으로 날아갑니다

 

반투명에서 불투명으로

 

가방은 그를 데리고 노랑지붕 옥탑방으로 날아갔을까요

 

짝짓기를 위해 하늘 높이

은점까지 투명해지기 전에

 

그가 거울 밖으로

저녁 물안개 속으로

실마리 없는 물뱀처럼 미끄러집니다

 

미지근한 바닥으로 노랑은 흘러내립니다

 

-계간 『포엠포엠』 2024년 봄호 발표

 

 


 

 

최윤정 시인 / 늑골

 

숨을 쉴 때마다

뜨끔, 기별을 전하는 실금 간 늑골

 

이만큼 지킬 수 있다고

그만큼만 나를 지켜줄 수 있다고

 

밤새 꾸는 풀잎 꿈은 산양이 다 먹고 가고

밤의 목책은 안전한지

 

감은 눈으로 까칠해진 풀잎을 세는

밤의 목책에게 안부를 묻는다

 

그리 순하지 않은 산양이 밤새도록

흙을 파고 있어서

 

어긋난 늑골의 그늘

막막한 목책 사이 움푹, 파인 자리가 있고

 

녹물로 품은 낙엽이 모여 있다

감감한 골목길을 거슬러

 

감정의 살점을 모자이크 하는

일로써 기별을 전하며

​​

- <시인수첩> 2021년 여름호 수록

 

 


 

 

최윤정 시인 / 디디스커스

 

사람을 믿어본 적 없다는 네가

자몽을 건네며 동전같은 미소를

 

바늘로 찔렀는데 아프지 않은 곳이 있다는 네가

디디스커스 섞인 꽃다발 건네주고 다시 멀어진다

 

마음을 움직이는 순간은

빙판을 굴러가다 멈춘 구슬처럼 투명하게 빛나지

 

씨앗만 한 꽃잎 서너 장 손가락 틈 묻어 있고

물감을 갠 물로써 하루가 가능하다면

 

선잠 들기 직전의 디디스커스

서로 기분을 모른 채

 

손가락 근처

사마귀 갈라진 자리, 가지 삶은 물이 스몄던가

 

꽃을 믿어본 적 없는 내가 남아서

꽃집 간판 희미해질 때까지 서성이다가

 

감귤나무의 마지막 감귤 갈라진 표정이 생각났다

옆구리에서 동전이 쏟아진다

 

기억나지 않는 문장이 적힌 쪽지를 찾던 그 날처럼

굳어버린 물감을 갠 물을 하루살이가 허우적거린다

 

-웹진 『시인광장』 2021년 5월호 발표

 

 


 

 

최윤정 시인 / 아보카도

 

 

확실한 기쁨은 뭘까

그래서 불확실해지는 기쁨들은

 

불안의 물컹함이 감싸는 기쁨

 

불안을 걷어내면 아보카도 씨앗

딱딱한 중심

 

흰 접시에 불시착한 뾰족하고 둥근 씨앗들

 

초라해서 보이지 않는 대단함이 무궁할 것 같아

 

말라 가는 씨앗

 

말라붙어 뿌리째 뽑히던 흙냄새가

밀려오곤 하지

 

뒤꿈치 물컹거리는 메리제인 슈즈를 신고

 

버스 정류장 노선을 살피는 사람들에 섞여

 

바닥까지 슬러시를 급하게 들이키며

확실해진 차가움을 삼키며

 

아보카도, 구름에 박힌 심장

 

불안의 깊이가 전해주는 박동 소리에 집중한다

844번 버스를 기다리며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작은 트럭에서 떨어진 복숭아가 굴러가

하수구 앞에 멈춰 선다

 

과육의 물컹함을 뚫을 듯 햇살 따갑다

 

 


 

 

최윤정 시인 / 그는 세 뼘 옆에서 책을 읽고 있습니다

 

 

얼굴은 뭉개지고

윤곽만 남았다

 

기린의 뿔만 남았을 때와 비슷하였다

 

초점이 맞지 않았지만

가끔은 제스처가 더 많은 말을 전해 주니까

괜찮다

 

괜찮지 않은 것 같다

손톱이 손톱을 긁는다

 

의식을 못 할수록 진심이듯

윤곽을 덧씌우고 색을 바꾸면 과장이다

 

그림책 속에서 쓰러진 기린의 아름다움이

책의 모서리를 계속 긁게 한다

과정이 눈길 밟으며 지나가는 오르골 소리로 들리면

마음은 더 축축한 보풀로 뭉쳐진다

 

멍한 밤

선생의 표정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다음도 그때도 없고

지금은 휘발 중이다

 

공중에 비스듬히 매달린 의자에

마음을 얹고

 

시선은 공중에 걸쳐 놓고

손톱을 손톱이 긁는다

 

가로수 사이 전광판에서

선생의 써클렌즈만이 기묘한 빛을 뿜어내고 있다

 

미간에 타다 만 심지가 생긴다

 

 


 

최윤정 시인

1969년 대구에서 출생. 영남대학교 수학교육과 졸업. 2014년 《작가세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공중산책』. 공동 산문집 『프로방스에 끼어들다』 『수박사탕 근처』. 2015년 대산문화재단 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