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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화영 시인 / 하나의 이름을 버릴 때
나비가 피는 계절이 있다
나비는 하냥 피어났고 내일도 필 것이다 나비가 피기까지 열세마리 꽃이 날아들었다 꽃 이름을 부르면 나비가 쑥대밭이 될까봐 눈으로 쫓았다
나비가 정신없이 물들어 갈 때 꽃은 어디를 향해 뜨거워지나
손 지문 닮은 협곡을 따라 꽃이 빙빙 나비가 빙빙
암녹의 베일은 몸 풀기 좋은 구유였다 눈이 쏙 빠지는 해산이 끝나면 세상은 변명으로 붉었다
나비 저녁에 이름을 버리고 아침에 혁명을 노래했다
동면에 드는 열세마리 꽃들
-계간 『poem poem』 2018, 겨울호
이화영 시인 / 검은 호리병에 담긴 모란
스며든 빛이 검은 호리병의 선을 뭉그러트렸다 사라진 선을 낱장으로 읽었다
오방을 떠돌다 온 바람이 모란으로 담겼다
봄빛 한 폭 베어 와 그늘을 나누는 저들의 필법을 나는 오랫동안 훔치며 서성일 것 같다
-시집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천년의시작, 2025) 수록
이화영 시인 / 나비, 저녁 숲으로 가다
저녁 산책을 했다 추웠고 음울한 시월이었다 생생하게 내 곁을 스쳐가는 나비 젖은 땅에서 오르는 푸르스름한 안개는 가시나무에 투명한 얼굴을 걸고 있었다
색을 거부한 숲은 싸늘하다
어둠은 나비의 피부 검은 수프를 마시고 저녁 숲을 하얗게 더듬더듬 먹어치우는 나비
햇살이 사라진 숲에 리라소리 살랑인다 새벽별마저 심지를 꺼버리고 나면 권태는 나비의 혈관을 얼어붙게 하지
온기가 필요해 장전된 기억을 날려 줘
날개를 접은 나비들 무반주 합창을 하며 저녁 숲에 목을 걸고 있다
마치 물방울인 듯 투명한 얼굴을 걸고 있다
-시집 『하루 종일 밥을 지었다』(천년의시작, 2025) 수록
이화영 시인 / 꽃殺
그대를 건너가지 못하는 자시(子時) 비가 숨을 낮춘 채 내린다 자주 달개비 엷은 이마에 쓸쓸이 방울방울 적합으로 맺히는지 서성이는 고양이의 눈에 가느다란 실금을 긋는지 문밖으로 비가 오는 듯 안 오는 듯
염천에 미열이 오르내리고 어릴 적 엄마의 목단 이불을 덮는다 흔들리는 이불 속으로 든 바람이 갈고리로 무릎을 헤집는다
아가야 울지 마라 꽃물이 오르니 견뎌야 할 날이 많겠구나
그대를 지나 다른 것에 풀어지고 싶으나 내 몸은 그대의 침묵 속에 녹아들도록 알맞은 형상으로 빚어 오래된 눈물로 비어 있다
아가야 두려워 마라 네 꽃이 흰 빛을 지닐 때가 되었구나
문밖에 그림자로 서 있는 나무가 입술 하나 파르르 떨군다 내 입술도 함께 파르르 떤다
꽃의 공포는 꽃의 은유와 더불어 시작된다 고요 속 소란이 들끓는 몸 길에서 꽃의 정령이 전하는 소리를 들었다 문밖에 고양이의 울음이 끊기듯 가늘게 이어지는 시간이 멎은 밤이었다
이화영 시인 / 나비, 저녁 숲으로 가다
저녁 산책을 했다 추웠고 음울한 詩월이었다 생생하게 내 곁을 스쳐가는 나비 젖은 땅에서 오르는 푸르스름한 안개는 가시나무에 투명한 얼굴을 걸고 있었다
색을 거부한 숲은 싸늘하다
어둠은 나비의 피부 검은 수프를 마시고 잘 익은 풍성한 식사를 더듬더듬 먹어치우는 나비 저녁 숲을 하얗게 갉아먹어도 살이 차오르는 저주받은 어둠은 나비의 피부
금색 햇살이 사라진 숲에 리라소리 살랑인다 새벽별마저 심지를 꺼버리고 나면 권태는 나비의 혈관을 얼어붙게 하지 온기가 필요해 장전된 기억을 날려 줘
날개를 접은 나비들 무반주 합창을 하며 저녁 숲에 목을 걸고 있었다 마치 물방울인 듯 투명한 얼굴을 걸고 있었다
-월간 『시와표현』 2018, 8월호.
이화영 시인 / 모르는 당신
나는 당신의 이름을 알지만 당신은 모릅니다
당신을 만나서 기쁘지만 언제 당신을 잊을지 모릅니다
당신의 얼굴은 내가 아는 그녀와 많이 닮아서 자꾸 웃게 합니다
왜 이렇게 늦게 만났느냐고 어디 사냐고 묻지만 그 순간에도 난 당신을 잊어갑니다
어느 날은 전혀 모르는 당신이 따뜻했습니다 당신은 내 손을 잡고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우리는 어디서든 잊고 잊습니다 잊는 일은 우리를 만나고 웃게 합니다
사람들은 나에게 친절합니다 나는 꽃잔디 같은 미소를 짓고 당신은 자꾸 내 손을 만지작거립니다
당신이 떠날 때 당신 얼굴과 이름이 떠올랐지만 나는 문턱을 넘지 못하고 배웅합니다
모르게 잊고 살다 어느 하루는 당신이 생각나 잠이 듭니다
이화영 시인 / 무화과나무에 다른 이름을 지어주었다
새 한 마리 무화과 아래로 날고 기차 아래로 구름이 흐른다 우리끼리 떠나자며 모르는 것들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일요일 밤은 무화과나무에 달을 달아주었다
며칠 내리는 비에 무화과 살이 찢어졌다 꽃 복 없으면 열매 복도 없나니
몸을 잃고 몸의 정치를 시작했다 볼품없는 몸의 서사는 추상과 가정의 경계에서 뒤틀렸다 한사람의 온도를 둘로 나누었다.여전히 한 사람의 온도다
무화과가 힐을 신고 전라인체 허공에 떠있다 누드로 쏟아지는 관음은 해석이 무의미하다 한쪽 다리를 내린 비안개가 팔을 내어준다 재미없는 마을을 지나갔다
-계간 『시향』 2017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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