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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함기석 시인 / 밤의 식탁 우주 외 5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4.
함기석 시인 / 밤의 식탁 우주

함기석 시인 / 밤의 식탁 우주

 

​여자가 붉은 해를 먹고 있다

낮 동안 호랑이 목에 붙어 으르렁거리던 사과

맵고 찬 우윳빛 손이 살갗을 벗기자

6시 7시 8시 9시, 네 갈래로 벗겨져 떨어지는 하늘

 

코스모스 접시엔 초토의 행성들

화 수 목 금, 훌라후프 돌리는 아이처럼

토성이 무지개 띠를 돌리자 우르르 쾅 천둥이 치고

1연 2연 3연 4연, 네 토막 나는 사연(四緣)의 시

 

식탁은 공중에서 끝없이 회전 중이고

빛과 어둠의 오랜 내전으로 점점 폐허가 되어가는 지구

여자는 폭식 중이다 얼굴에 흰 팩을 붙인 채

사과의 항문에 포크를 꽂고

 

밤은 살결이 더 새까매지고 내가

혼신을 다해 몸속 남은 피와 연기를 그릇에 게워낼 때

누가 끓이는 색색 환몽일까 이 불빛 도시는 ​

10시 11시 12시 13시, 네 조각으로 쪼개져 흐르는 땅

-계간 『아토포스』 2025년 여름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사랑의 연주회

 

 

박수소리 그치고, 피아노 뚜껑을 여니

그녀의 입이다

 

검은 이빨 흰 이빨 촘촘히 박힌 해변이다

 

햇빛과 파도의 흑백 파동

고요히 눈 감고 두 손을 얹자 건반 사이에서

 

혀가 솟아나와 물뱀처럼

손목을 휘감는다 나의 목을 휘감아 오른다

 

또각또각 한 계단 한 계단 계단을 지우며

지층을 올라오는

 

찬 구둣발소리 태곳적 아이 웃음소리

 

뒤돌아보니, 객석은 텅 빈 밤이다 끝없는 광야다

 

아메바 닮은 여자 그림자 하나 걷고 있다

검은 빛 속을 침묵으로

 

내 심장 뛰는 소리만

어둠 바깥 빌딩 숲으로 거미줄처럼 퍼져 가는데

 

슥! 흰 종이들이 내려와 나를 베었다

 

화병처럼 그림자 깨지는 소리

출구의 문은 무덤처럼 닫혔다 열리며 깔깔거리고

 

광활한 실내다 무한의 무조음악이 퍼져나가는 겨울 강이다

 

낯선 피가 쉼 없이 흘렀다

바닥에서 벽을 타고 공중으로 먼 하늘로 우주로

 

나도 피아노도 이미 어떤 귀도 없는

여긴, 어딜까?

 

잘린 손 두 개만

미아 거미처럼 건반에 붙어 파닥거리는

 

-『시로 여는 세상』 2022년 겨울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오로라 사랑

 

 

3층 입구의 방에서 의자 하나를

복도 끝 방으로 옮기다 일생이 다 갔다는 여자

도대체 그딴 의자가 뭐가 중요해?

복도는 얼마나 긴 걸까?

 

난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의 눈물 젖은 뺨에 어룽대는 북극 오로라만

아름답게 빛났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폭설을 헤치며 시간이라는 설인이 창밖 겨울 벌판을 걸었다

 

도대체 왜 난 죽지조차 않는 거야?

여자의 비명은 인간인 내 귀에만 파도처럼 울릴 뿐

사방은 글자 없는 창백한 백지였다

푹푹 빠지는 발이 남기는 설인의 깊고 무서운 발자국들뿐

 

복도는 어느 퇴역한 신의 무한 숨통일까?

인간의 항문처럼 우주 끝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내장일까?

3층 끝 방에서 책상 하나를

복도 입구의 방으로 옮기다 일생이 다 갔다는 남자

 

오다가 의자 옮기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나요?

나의 물음에 남자는 정수리부터 설산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남자를 살리려고 나는 내 심장을 어루만졌다

남은 숨을 꺼내 그에게 다 주려고

 

그때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복도 가득 여자의 히스테릭한 울음이 하울링으로 울렸다

3층 폐부쯤일까 난 불 꺼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 없는 설인이 요도처럼 흐르는 금빛 강을 건너고 있었다

 

-계간 『시인시대』 2024년 여름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첫눈

 

첫눈이 왔다 죽음이 흰 날개를 달고

굴뚝으로 내려왔다

나는 밤새 밭은 기침을 했다

새벽에도 뜨거운 이마가 가라앉지 않았다

첫눈이 왔다 죽음은

세 갈래 발자국을 찍으며 뜰에 내려왔다

할머니는 내복 바람으로 부엌에서 물을 뜨다가

산머루 빛깔 죽음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첫눈이 왔다 밤새 먼 길을 걸어

아침이 따신 물 주전자 들고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때 식구들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궁이 앞에 할머니 물 사발이 떨어져 있었다

첫눈이 왔다 그을음으로 덮인 부엌 흙벽 가득

세 갈래 발자국을 찍고 죽음이

뒷문으로 걸어 나갔다 어린 내 눈에는 다 보였다

할머니 발자국도 나란히 찍혀 있었다

첫눈이 왔다 첫울음이 왔다

밤사이 할머니가 내 열을 먼 들로 가져갔다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함기석 시인 / 폐사지에서

 

 

빛이 꼬물꼬물하다

털이 샛노란 수백 마리 송충이 유충처럼

 

무릎 연골 다 닳은 박달나무랑 이끼 마른 돌탑을 돌아

 

먼 옛날 언덕에 서서 먼 훗날을 바라보는

백일홍 어린 눈망울

 

반짝 빛날 때, 나는 아주 잠시 사람일 사람

 

이마로 햇빛 받으며

쪼개진 등으로 억년 하늘을 업어 자장자장 잠재우는

 

저 벙어리 부도들은

내 울음의 어마마마고 그녀들 웃는 턱수염이다

 

폐사지 사방이 화엄 자궁이고 우주다

 

빛이 팔랑팔랑하다

날개 샛노란 수백 마리 아기나비처럼

 

예쁜 건 철없는 산새랑 속을 다 들어 낸 연못 하나

 

-계간 『시와 세계』 2024 봄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잉잉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산다면

나는 죽을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없다 오직 오늘의 입술뿐이니

 

키스, 키스, 키스

입술이 다 닳도록 키스, 키스, 키스

 

내 이름은 잉(∼ing) 네 이름도 잉(∼ing)

우리는 잉잉, 해도 달도 잉잉

 

지금 내 얼굴에 쏟아지는 건

햇빛과 바람과 너의 갈색 눈빛, 솔개의 세찬 숨소리

 

아 저기 하늘로 치솟는 광장의 분수

저건 아이들 웃음소리, 노랫소리, 힘줄 선 피아노소리

 

어제와 똑같은 땅, 똑같은 반도, 주검의 바다가 펄럭인다면

풀도 새도 고래도 다 잠들 것이다

 

키스, 키스, 키스

죽은 자들이 번쩍 눈을 뜨도록 키스, 키스, 키스

 

내 이름은 잉(∼ing) 네 이름도 잉(∼ing)

우리는 잉잉, 꽃도 벌도 잉잉

 

아 저기 치마를 뒤집어쓰고 달리는 음표들

저건 웃는 시, 기린이 된 연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음악

 

어제와 똑같은 사람을 산다면

나는 내 목을 벨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지도는 없다 오늘의 심장뿐이니

 

키스, 키스, 키스

영원히 네 젖은 눈 속을 달리며 키스, 키스, 키스

 

-계간 『천년의 시작』 2024년 여름호 발표

 

 


 

함기석 시인

1966년 충북 청주에서 출생. 1993년 한양대학교 수학과 졸업. 1992년 《작가세계》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시집 『국어선생은 달팽이』 『착란의 돌』 『뽈랑공원』 『오렌지기하학』 『힐베르트 고양이 제로』와 동화 『상상력 학교』 등이 있음. 2006년 눈높이아동문학상, 2009년 제10회 박인환문학상 수상. 2013년 제8회 이형기문학상, 2020년 제13회 웹진 시인광장 선정 올해의좋은시賞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