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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기석 시인 / 밤의 식탁 우주
여자가 붉은 해를 먹고 있다 낮 동안 호랑이 목에 붙어 으르렁거리던 사과 맵고 찬 우윳빛 손이 살갗을 벗기자 6시 7시 8시 9시, 네 갈래로 벗겨져 떨어지는 하늘
코스모스 접시엔 초토의 행성들 화 수 목 금, 훌라후프 돌리는 아이처럼 토성이 무지개 띠를 돌리자 우르르 쾅 천둥이 치고 1연 2연 3연 4연, 네 토막 나는 사연(四緣)의 시
식탁은 공중에서 끝없이 회전 중이고 빛과 어둠의 오랜 내전으로 점점 폐허가 되어가는 지구 여자는 폭식 중이다 얼굴에 흰 팩을 붙인 채 사과의 항문에 포크를 꽂고
밤은 살결이 더 새까매지고 내가 혼신을 다해 몸속 남은 피와 연기를 그릇에 게워낼 때 누가 끓이는 색색 환몽일까 이 불빛 도시는 10시 11시 12시 13시, 네 조각으로 쪼개져 흐르는 땅 -계간 『아토포스』 2025년 여름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사랑의 연주회
박수소리 그치고, 피아노 뚜껑을 여니 그녀의 입이다
검은 이빨 흰 이빨 촘촘히 박힌 해변이다
햇빛과 파도의 흑백 파동 고요히 눈 감고 두 손을 얹자 건반 사이에서
혀가 솟아나와 물뱀처럼 손목을 휘감는다 나의 목을 휘감아 오른다
또각또각 한 계단 한 계단 계단을 지우며 지층을 올라오는
찬 구둣발소리 태곳적 아이 웃음소리
뒤돌아보니, 객석은 텅 빈 밤이다 끝없는 광야다
아메바 닮은 여자 그림자 하나 걷고 있다 검은 빛 속을 침묵으로
내 심장 뛰는 소리만 어둠 바깥 빌딩 숲으로 거미줄처럼 퍼져 가는데
슥! 흰 종이들이 내려와 나를 베었다
화병처럼 그림자 깨지는 소리 출구의 문은 무덤처럼 닫혔다 열리며 깔깔거리고
광활한 실내다 무한의 무조음악이 퍼져나가는 겨울 강이다
낯선 피가 쉼 없이 흘렀다 바닥에서 벽을 타고 공중으로 먼 하늘로 우주로
나도 피아노도 이미 어떤 귀도 없는 여긴, 어딜까?
잘린 손 두 개만 미아 거미처럼 건반에 붙어 파닥거리는
-『시로 여는 세상』 2022년 겨울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오로라 사랑
3층 입구의 방에서 의자 하나를 복도 끝 방으로 옮기다 일생이 다 갔다는 여자 도대체 그딴 의자가 뭐가 중요해? 복도는 얼마나 긴 걸까?
난 여자를 이해하지 못했고 그녀의 눈물 젖은 뺨에 어룽대는 북극 오로라만 아름답게 빛났다 한 걸음 두 걸음 세 걸음 폭설을 헤치며 시간이라는 설인이 창밖 겨울 벌판을 걸었다
도대체 왜 난 죽지조차 않는 거야? 여자의 비명은 인간인 내 귀에만 파도처럼 울릴 뿐 사방은 글자 없는 창백한 백지였다 푹푹 빠지는 발이 남기는 설인의 깊고 무서운 발자국들뿐
복도는 어느 퇴역한 신의 무한 숨통일까? 인간의 항문처럼 우주 끝으로 구불구불 이어진 내장일까? 3층 끝 방에서 책상 하나를 복도 입구의 방으로 옮기다 일생이 다 갔다는 남자
오다가 의자 옮기는 여자를 만나지 못했나요? 나의 물음에 남자는 정수리부터 설산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남자를 살리려고 나는 내 심장을 어루만졌다 남은 숨을 꺼내 그에게 다 주려고
그때 와장창 유리창 깨지는 소리와 함께 복도 가득 여자의 히스테릭한 울음이 하울링으로 울렸다 3층 폐부쯤일까 난 불 꺼진 창밖을 바라보았다 목 없는 설인이 요도처럼 흐르는 금빛 강을 건너고 있었다
-계간 『시인시대』 2024년 여름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첫눈
첫눈이 왔다 죽음이 흰 날개를 달고 굴뚝으로 내려왔다 나는 밤새 밭은 기침을 했다 새벽에도 뜨거운 이마가 가라앉지 않았다 첫눈이 왔다 죽음은 세 갈래 발자국을 찍으며 뜰에 내려왔다 할머니는 내복 바람으로 부엌에서 물을 뜨다가 산머루 빛깔 죽음의 눈동자와 마주쳤다 첫눈이 왔다 밤새 먼 길을 걸어 아침이 따신 물 주전자 들고 대문으로 들어섰다 그때 식구들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궁이 앞에 할머니 물 사발이 떨어져 있었다 첫눈이 왔다 그을음으로 덮인 부엌 흙벽 가득 세 갈래 발자국을 찍고 죽음이 뒷문으로 걸어 나갔다 어린 내 눈에는 다 보였다 할머니 발자국도 나란히 찍혀 있었다 첫눈이 왔다 첫울음이 왔다 밤사이 할머니가 내 열을 먼 들로 가져갔다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함기석 시인 / 폐사지에서
빛이 꼬물꼬물하다 털이 샛노란 수백 마리 송충이 유충처럼
무릎 연골 다 닳은 박달나무랑 이끼 마른 돌탑을 돌아
먼 옛날 언덕에 서서 먼 훗날을 바라보는 백일홍 어린 눈망울
반짝 빛날 때, 나는 아주 잠시 사람일 사람
이마로 햇빛 받으며 쪼개진 등으로 억년 하늘을 업어 자장자장 잠재우는
저 벙어리 부도들은 내 울음의 어마마마고 그녀들 웃는 턱수염이다
폐사지 사방이 화엄 자궁이고 우주다
빛이 팔랑팔랑하다 날개 샛노란 수백 마리 아기나비처럼
예쁜 건 철없는 산새랑 속을 다 들어 낸 연못 하나
-계간 『시와 세계』 2024 봄호 발표
함기석 시인 / 잉잉
어제와 똑같은 하루를 산다면 나는 죽을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없다 오직 오늘의 입술뿐이니
키스, 키스, 키스 입술이 다 닳도록 키스, 키스, 키스
내 이름은 잉(∼ing) 네 이름도 잉(∼ing) 우리는 잉잉, 해도 달도 잉잉
지금 내 얼굴에 쏟아지는 건 햇빛과 바람과 너의 갈색 눈빛, 솔개의 세찬 숨소리
아 저기 하늘로 치솟는 광장의 분수 저건 아이들 웃음소리, 노랫소리, 힘줄 선 피아노소리
어제와 똑같은 땅, 똑같은 반도, 주검의 바다가 펄럭인다면 풀도 새도 고래도 다 잠들 것이다
키스, 키스, 키스 죽은 자들이 번쩍 눈을 뜨도록 키스, 키스, 키스
내 이름은 잉(∼ing) 네 이름도 잉(∼ing) 우리는 잉잉, 꽃도 벌도 잉잉
아 저기 치마를 뒤집어쓰고 달리는 음표들 저건 웃는 시, 기린이 된 연인,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음악
어제와 똑같은 사람을 산다면 나는 내 목을 벨 것이다
어제도 내일도 지도는 없다 오늘의 심장뿐이니
키스, 키스, 키스 영원히 네 젖은 눈 속을 달리며 키스, 키스, 키스
-계간 『천년의 시작』 2024년 여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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