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지하 시인 / 밥은 하늘입니다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은 혼자 못 가지듯이 밥은 서로 나눠 먹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하늘의 별을 함께 보듯이 밥은 여럿이 먹는 것 밥이 입으로 들어갈 때에 하늘은 몸속에 모시는 것 밥은 하늘입니다 아아 밥은 서로 나눠먹는 것
김지하 시인 / 봄
봄이다 꽃잎 피었다 이파리도 함께 피었다 한여름 같고 목련 진달래 개나리 철쭉 라일락 복사꽃 능금꽃 한꺼번에 피었다 이게 무슨 봄인가
먼 우주에서 운석 날아온다는 불길한 소식
강물에는 붕어들 떼죽음 죽음 이게 무슨 봄인가
담배 끊고 찬찬히 내속 들여다봐야겠다
-시집 <중심의 괴로움>에서
김지하 시인 / 새봄. 2
삼월 온몸에 새순 돋고
꽃샘바람 부는 긴 우주에 앉아 진종일 편안하다
밥 한술 떠먹고 몸아픈 친구 찾아 불편한 거리를 어칠비칠 걸어간다
세월아 멈추지 마라 지금 여기 내 마음에 사과나무 심으리라
-시집 <중심의 괴로움>에서
김지하 시인 / 사랑 얘기
시귀신 정희가 '모든 사랑은 첫사랑이다'라고 시집 제목을 달았다
금방 내 그물에 와 걸린다
즉각 수정한다 '모든 사랑은 짝사랑이다'라고
물론 안다
사랑이 얼마나 순정하고 고운 것인지 그것도 아주 모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랑이 얼마나 쓰라리고 병신스러운지
나는 그걸 안다기보다 그냥 몸으로 아파보았다
절충의 길은 없었다
첫사랑이 곧 짝사랑이었던 내겐 이런 경우
어찌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김지하 시인 / 절, 그 언저리
절 그 언저리 무언가 내 삶이 있다
쓸쓸한 익살 달마達摩안에
한매寒梅의 외로운 예언 앞에
바람의 항구 서너 촉 풍란風蘭 곁에도
있다
맨끝엔 반드시 세 거룩한 빛과 일곱별
풍류가 살풋 숨어 있다
깊숙이 빛 우러러 절하며.
김지하 시인 / 화개(花開)
부연*이 알매* 보고 어서 오십시오 하거라 천지가 건곤더러 너는 가라 말아라 아침에 해 돋고 저녁에 달 돋는다
내 몸 안에 캄캄한 허공 새파란 별 뜨듯 붉은 꽃 봉오리 살풋 열리듯 아아 '花開'
*부연: 처마 서까래의 끝에 덧얹는 네모지고 짧은 서까래로 처마 끝을 위로 들어올려 모양이 나게 한다. 남성 yang(阳) 이미지. *알매: 기와를 일 때 산자 위에 이겨서 까는 흙. 여성 yin(阴) 이미지. 부연은 떠받들고 알매는 그 떠받듦을 받쳐준다. 모든 생명은 그러나 부연이 아니라 흙에서 태어남.
김지하 시인 / 거울 겨울 2
설운 것이 역사다 두려운 것 역사다 두려워도 피할 수 없는 것 역사 아하 그 역사의 잔설 위에 서서 오늘 밤 별밭을 우러르며 역사로부터 우주를 보고 우주로부터 역사를 보고 잔설 속에서 아리따운 별밭을 또 보고.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정숙자 시인 / 뿌리 깊은 달 외 6편 (0) | 2025.10.15 |
|---|---|
| 허형만 시인 / 당신에게 매달리고 싶다 외 7편 (0) | 2025.10.15 |
| 강영은 시인 / 가을의 중력 외 5편 (0) | 2025.10.14 |
| 최규리 시인 / 미래 혹은 소장품 외 9편 (0) | 2025.10.14 |
| 정지우 시인 / 내일의 반경 외 9편 (0) | 2025.10.1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