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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정숙자 시인 / 뿌리 깊은 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5.
정숙자 시인 / 뿌리 깊은 달

정숙자 시인 / 뿌리 깊은 달

 

 

소용돌이 휘말려 대가리 박살났을지라도

산산조각 다시 뭉쳐

강물의 호수의 바다의 심장이 되는

늦가을 어스름이면 쩌렁쩌렁

더욱더 불타오르는

그물로 작살로도 건질 수 없는

눈으로만이 만질 수 있는

오로지, 오직 한 마리

모남 메마름 게으름 서두름 없이

물결 한 결 헤집음 없이

산 넘어 또 산 넘어 서방정토까지 혼자이지만

접었다 폈다 마침내 둥글어지는 독야청청 저 물고기!

실개울에도 흐르고 있어

우리들 가슴에도 뿌려져 있어

내 인생 견문록 참회록에도 새겨져 있어

천천히 찬찬히 구름과 바람 사이를

온밤을 꿋꿋이 돌보고 있어

 

 


 

 

정숙자 시인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6

 

 

 감으면 뜨지 못하고 뜨면 감지 못합니다. 깬 뒤에 꿈으로 오시거나, 잠든 시간에 지나치지 마세요. 하나뿐인 제 영혼은 행여 어긋날ㄲㆍ 서성이오니. (1990. 9. 7.)

 

 

(간절한)

뗏목을 타고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2022. 12. 31-2:10. <No. 22-190> 번째 회답을 썼고,

 

(삶이라는)

그 아찔한 뗏목 위에서

다시 또 한 해를 맞이합니다

 

갖가지 풍랑 견디고 겪으면서도

오로지 믿었던 건 책과 시詩와 미래였습니다

 

반년간 『한국시인』 2023년 봄·여름호 발표

 

 


 

 

정숙자 시인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37

 

 

 잠 깬 나비가 언덕 위로 날아갑니다. 거미줄마다 이슬이 빛납니다. 바다는 새로운 오선지를 펼쳤습니다. 따로 예술이 필요치 아니합니다. 종이와 펜을 내려놓습니다. 저 또한 스스러울 것 하나 없는 바람이 됩니다. 오랜 소원 이루는 찬란함이여, 순수는 저의 궁극의 이상입니다. (1990. 9. 8.)

 

 

이 삼경 어찌해야 전해질까요?

벼루가 닳아진들 글이 될까요?

 

붓끝에 뭘 먹이면 꽃이 될까요?

 

밤은 자꾸자꾸 동으로 흘러

창문에 푸른 물 비쳐드는데

 

어떻게 갚아야 갚아질까요?

죽어서 갚아도 갚아질까요?

 

이 침묵 어찌해야 뜻이 될까요?

 

계간 『예술가』 2023년 봄호 발표

 

 


 

 

정숙자 시인 / 공우림空友林의 노래 · 62

 

 당신은 깊은 ㅅ'ᆫ 메아리처럼 저자에 나오지 아니합니다. 제 발목엔 무엇이 채여 당신께 날아갈 수 없는 걸까요. 스스로 짚은 게 ㅇ ' 닌… 영문도 모르는 수형(受刑)에 갇혀… 그리움만이 몸을 놔두고 바람에 섞였습니다. (1991. 1. 16.)

 

 외로울 때 읽어야 진짜

 책이지

 

 푸른 먹물이

 걸러낸

 볕뉘

 

 그걸 먹고 입고 거닐며

 접때도 오늘도 남은 파도도

-웹진 『시인광장』 2024년 9월호 발표

 

 


 

 

정숙자 시인 / 마주친 눈

 

 

 하늘은 한 알의 눈이다. 밤에조차 감기지 않는다. 낮이나 밤이나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지켜보고 세며, 무한대로 기억한다. 결코-흘리지 않는다.

 

 문득 저지른, 혹은 미리 짠 소행일지라도 처음부터 덜커덕 세상에 드러내지는 않는다. 기다린다. 기회를 주는 것이다. 염치를 되찾기를-본래의 순수를 회복하기를.

 

 하늘은

 인간보다

 훨씬 자비롭다.

 

 ∴ 꼬리가 길면 밟힌다는 말은 속담이 아니라 금언이다. 꼬리를 밟은 이 역시 아무개가 아닌 하늘이건만, 들킨 꼬리는 목격자를 일러 철천지원수다-창끝을 간다.

 

 우리가 놓아준 민달팽이 한 마리, 물기 마른 지렁이를 애써 풀 섶에 옮겨준 일, 맥없는 약자에게 함부로 굴린 눈 등 하늘은 차곡차곡 엮어두고 종종 들추어본다.

 

 하늘 우러러 부끄럼 없기란 쉽지 않으나, 두려운 줄만 알아도 그는 이미 지식인이며, 종교인이며, 현철이다. 하늘은 알은체하지 않는다.

 다만 상황을 재정립한다.

 

 


 

 

정숙자 시인 / 푸앵카레의 우측

 

 

 행성들이 둥글 수밖에 없는 이유. 과일들이 모서리를 잃어버린 이유. 그게 다 바람과 천둥과 벼락에 스치다 그리된 것이다. 사철 두고 대신 울어주는 폭포며 풀벌레며 새들이… 흰 살 드러내고 찢어지는 설해목의 울음을… 새끼를 빼앗긴 개와 고양이와 염소와 종마의 울음을… 갑자기 당한 실패와 좌절 앞에 끓어오르는 인간의 울음을… 누군가 어디선가 울어주고 있다.

 

 아름~답다~고 말하는 들꽃들이

 구름과 돌멩이와 모래알이

 

 둥근

 이유는

 

 인간보다 앞서 울었기 때문이다

 인간보다 앞서

 인간이 태어나기 이전에 벌써

 그들은 자신의 울음을 끝낼 만큼

 둥글어

 

 졌다

 

 그리고 ‘사물화’ 되었지만

 

 아는 것이다. 둥긂 속에 버려진 것, 버려야 할 것, 그러나 버려지지 않은 최초의~ 최후의 그 눈물의 형태

 

 둥긂이 뭔가를 말이다

 

 


 

 

정숙자 시인 / 푸름 곁

 

 

어떻게 해야 늘 그들이 될 수 있을까

바람 지나갈 때 침묵을 섞어 보낼 수 있을까

마음 걸림

들키지 않고

조용히 몇 잎 흔들며

서 있을 수 있을까

바위 햇살 개미 멧새들···사이

천천히, 느긋이 타오를 수 있을까

베이더라도 고요히 수평으로 쓰러질 수 있을까

구름 속으로

손 뻗으며

느리게, 느리게 바다로-깊이로만 울 수 있을까

 

 


 

정숙자 시인

1952년 전북 김제 출생. 동국대학교 교육대학원 철학과를 수료. 1988년 《문학정신》을 통해 등단. 시집 『감성채집기』 『정읍사의 달밤처럼』 『열매보다 강한 잎』 『공검 & 굴원』 『뿌리 깊은 달』 『액체계단 살아남은 니체들』.  산문집 『밝은음자리표』 『행복음자리표』. 동국문학상 · 질마재문학상 · 들소리문학상 등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