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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나금숙 시인 / 떠도는 말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5.
나금숙 시인 / 떠도는 말

나금숙 시인 / 떠도는 말

 

 

고요가 앉아 있곤 하던 돌로 된 식탁은

오랫동안 너만을 위해 놓아두었다.

사과주와 냅킨과 얼어붙은 공기.

낮달을 건너가는 검독수리가 눈여겨보는 것들.

시간이 고의로 방치한 트렁크 속에는

가장 무서운 테러, 사물의 변모가!

너의 슬픔을 녹여보려고

갓 찧은 곡물을 사다가 차를 끓였다.

고유하고 성실한 죽음에 대한 의도들이

성당의 낯선 흰빛에 부딪혀

눈부실 때,

심해 상어가 가슴지느러미를 내리고

튼튼한 등을 구부린다

그때 우리는 헤어질 때가 된 것이다.

한 방울의 무(無)를

시금치 씨처럼 뿌려놓고 자정을 기다린다.

창밖 풍경이 볼 때마다 달라지는

그 집에서

걷어올려진 커튼처럼

우리는 반짝이는 바깥으로 달아난다.

 

 


 

 

나금숙 시인 / 등천(登天)

 

 

긴 방황도 여기 와 걸리면 한 장 그림이다

​잣나무 가지 건너다니는 새, 산문(山門) 위에

​날아가​쉬기도 하는 분홍 발톱이 넘나들지 못하는

내 오랜 망설임을 물고 떠오른다 두 날개에 얹히는

무게를 치밀고 오른다 헤쳐가야 할 말씀의 깊이

더욱 육중해 오고 단단한 그 몸피에 온몸으로

부딪다가 그만 봄 공기속으로 미끄러지는 새,

높이 오르려는 새여. 네 추락에 숲에 갇혔던

향이 멀리 가는구나 빛의 탄환들이 봄의 운두를

스치고 쏟아지는 한낮에

 


 

나금숙 시인 / Live Jazz Club 천년동안도

 

 

 침묵수행이 6개월째인 바오로딸 수녀원의 아녜즈 수녀는 입구가 없는 매혹적인 건물을 보았다 라푼첼의 빛나는 머리털이 아니면 올라갈 수 없을 이,삼층 높이의 그 집은 검은 운모로 덮여 있었다 건드리면 바스라질 것 같은데 만지면 단단한 대리석이었다 바람이 불자 집은 물결처럼 일렁이며 나선형 계단을 잠깐 보여주었다 순간 들어서지 않으면 곧 사라지는… 숨을 가다듬으며 다음 찰나에 아녜즈 수녀는 집안으로 들어섰다 식인초처럼 집은 아녜즈를 휘감았다 조였다 끈적한 검은 진액이 온몸을 뒤덮는 것 같았다 입구는 이미 사라졌다 캄캄하다 집은 일렁이며 또 다른 계단을 내주었다 이번에는 파란 하늘이 언뜻 보이는 옥상 위를 향해 있었다 아녜즈는 습기 찬 옷가지를 두 팔 가득 안고 올라가 펄럭펄럭 거풍을 했다 집이 일렁일 때마다 푹푹 빠지는 발을 건져 올리며 자신도 펄럭펄럭 휘날렸다 테너 색소폰이 울었다 펄럭펄럭 아녜즈는 녹슨 황금빛 입구로 걸어 들어갔다 무한한 음파의 탄력에 그 변주에 몸을 뉘었다 170여일 양갱처럼 굳은 침묵의 살갗이 터져나올 때 그녀 온몸의 뇌관이 울었다

 

 


 

 

나금숙 시인 / 순간을 풀어주다

​​

물의 심장이 두근거리자

하늘엔 별꽃이 피기 시작했다

이 물을 자르고 들려면 세 명은 필요하다

물의 광장에 노을이 지고

모닥불이 피워지고

우리는 옥수수가루로 죽을 쑤어 날랐다

울지 말라고 해도 물은

괜찮을 거야라고 해도 물은

노래를 깨물었다

물의 지문은 흩어져

그의 다잉메시지는 프랙탈로 공중에 새겨졌다

순간을 움켜쥔 나무를

베어내 옮기던 임도(林道)에

묶여 있던 순간을 풀어준다

순간은 순식간에 뛰쳐나간다

복제

해적판

불법 다운로드

물의 꿈이 복제되어 해적판으로 나가도

물은 행복하다

가난한 아이들 배고픈 새벽에

허리를 움켜쥐고

별을 다운로드 한다

물고기 비늘 같은 은하수를 만난다

땅 속이나 공중이나 하늘에서

물의 꿈은 행복하다

아이들 생피 같은

이슬 같은 물의 심장은 행복하다

-2023년 《예술가》 가을호 발표

 

 


 

 

나금숙 시인 / 아무도 모르는

 

 

아무도 모르는 이유가 공기가 되어 떠 다닌다

나도 모르게 이유를 마신다

이유는 심장세포 속으로 들어가 핏속을 달린다

이유는 눈이 되고 귀가 되고 손이 된다

 

아침에 눈을 뜨면 이유가 눈을 같이 뜬다

너를 만질 때 이유가 묻는다 말 속에서 이유를 찾는다

물방울처럼 무거워져 호수에 빠지는 이유

왜? 왜? 왜?

왜가리처럼 왝왝댄다

TV에서 유투브에서 팟빵에서

각종 음원들이 왝왝

성분을 알지 못하는 이유에 싸여 이유가 되어

소리치다 사라진다

먼지가 된 이유는 공기 중에 떠 다닌다

 

먼 훗날 우리 아이들이

아침에 기지개를 켜며 이 공기를 마신다

내가 그 속에 있는지도 모르고

 

경악할 뉴스에서 사라진 메아리는

이제 사라진 소리의 이유를 찾았나

 

네가 떠난 이유도 내가 너를 기다리는 이유도

어딘가 서 있는 물푸레나무 그늘을 넓혀갈 뿐인데

 

눈동자가 커다래진 이유는 두리번거리며

어디든 깃들어 숨을 이유를 찾는다

기억할 이유

용서할 이유를 찾는다

 

-계간 『시와 소금』 2024년 겨울호 발표

 

 


 

 

나금숙 시인 / Images book, 은행나무

 

 

11월 도산면 이육사문학관 건너편에

노랗게 불타는 은행나무 두 그루

이전에 누구의 마음 그림자가 여기에 반사되었을까

조락의 빛들 가운데 유난히 빛을 낸다

 

어린 시절

집으로 오는 네 갈래 길이 있었다

헛디딘 웅덩이에서 지나던 상급생이 아니었다면

살아날 수 있었을까

어디로 가든 깻잎과 옥수수가 우거진 네 갈래 길

 

전생에서 실컷 놀고 온

손가락 골절되는 수많은 연주들이

수수밭에서 서걱인다

이 밭길은 바벨의 도서관

책 속에서 문장 속에서 길을 찾다 길을 잃는 것처럼

집으로 오는 네 갈래 길에서 자주 길을 잃는다

 

오늘 도산면 은행나무 아래

오래된 문장 속에서 사실 속에서 길을 찾는다

적지에 맨 먼저 갔다가

마지막 떠난 사람이 간 길

길은 지워진 것 같으나

오랜 날들 후에 다시 가는 이들 있으니

 

물에 비친 그림자*

잎새로 흐르는 종소리*

황폐한 절에 비치는 달*

움직임*

 

****드뷔시 피아노곡 Images book 1,2의 악장 제목들

 

-계간 『시와 경계』 2024년 겨울호 발표

 

 


 

 

나금숙 시인 / 안녕 엄마

 

 

먼저 텐트를 걷어들고 가셨다

잠시 애도하는 나도 따라 떠날 것이다

바람을 피하고 해를 피하려고 장막을 쳤었다

땅에 심은 말뚝에서 잎이 나고 꽃이 핀다

긴 나라

먼 나라

또는 가까운 나라

중독이나 집착을 거부하기 위해

아침마다 하늘 한 바퀴를 돌다오면

매일 달라지는 무게에 기쁨을 느낀다

재가 되어 입이 사라질 때까지

가벼워진 기억조차 떨구러 갔다 온다

모든 말은 태워져야 한다

발자국에 담긴 달빛

맑고 카랑한 음향

그 그림자를 따라간다

또로록 똑똑 새벽에 듣는 피아노 소리 너머

나이기도 한 너를 만나고 올 때마다

반쯤 열리는 문

네가 보고 싶어

내가 울먹이기도 하는 행복이라니!

우리 내일 일찍 일어나서

포도원으로 내려갈까

포도 움이 돋았는지 석류꽃이 피었는지

함께 보러 갈까

거기서 나는 내 사랑을 너에게 주고 싶다

 

-계간 『불교문예』 2024년 봄호 발표

 

 


 

 

나금숙 시인 / 묘지 아랫마을 측백나무

 

 

풋잠 속에서

정원 꾸미는 것이 인생 목표인 나라로 달아났다

땅에 떨어져 뭉그러지는 과일 같을 때

식탁 한 쪽에 소라고둥 불을 켜둔다

빠글빠글 머리털을 석양 쪽으로 털어 말린다

입이 긴 새도 나도 발목이 가느다랗고 붉을 때까지

테라피를 하다

공중부양 물고기와 눈 맞추다 하강한다

초록눈이 예쁜 해초씨앗을 하늘에 심고 왔다

북국 먼 나라에서 빗자루를 타고

지나간 애인들이 자상한 눈처럼 내린다

어제는 유품정리를 했다

외로운 가슴에 별이 필요했는지

브로치가 많이 나왔다

나도 별 한 개쯤 누구 손에 쥐어주었을까

북구해변으로 트위드 실이며 염료며 단추며

다 풀어 보내고

땅에 떨어진 별들은 먼지처럼 쓸어

비닐봉투에 넣고 전화한다

여기서는 천사의 날개가 키로에 얼마라고 한다

우리는 모두 생파 할 공간이 필요하다

버블이나 공기를 뿜뿜

테라스에서 내다보다가 다들 손 저으면

이층집 통째로 하늘로 날아가는 판타지

 

-계간 『시와 함께』 2024년 봄호 발표

 

 


 

 

나금숙 시인 / 지하지도

 

 

시작은 항상 두렵다

 

서쪽 나라

아우디 공장에서 차를 뒤집어 공중에 매단 뒤로

여기서는 어깨 위에 얹고 놀던 무동이

연두빛 산길로 나비처럼 날아갔다

 

봄은 이번에도 강심을 재기 위해 돌을 던진다

파란 알

반점이 있는 알을 풀숲이나 창고에 낳아두고

숨어 또 산란을 기다린다

 

봄의 세 각도로 너를 바라본다

원하는 만큼 쉬었다 가라고

공백에다 의자를 놓아두는 밤

 

노동을 노동하는 이들의 우레가 빈 곳을 채운다

 

200 명의 사람

200 개의 봄

200 개의 비

 

200 개의 밤

밤은 전화수업하다

출장 온 교사

아이들은 공룡알을 보여주며 즐거워한다

지뢰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모닝빵 굽는 냄새에 깨어난다

바람을 등지고 걷는 법을 배우려고 길을 나선다

이 고장에선 길이 하나라 잃을 염려가 없다

모든 게리맨더링이 용서되기도 하는 구역

너나 나나 녹슨 함석 빗물통을

경쾌하게 빠져나와

재빨리 오랫동안 스며 들어간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5월호 발표

 

 


 

 

나금숙 시인 / 정밀(靜謐)

 

 

호두나무 큰 키 그늘이 넓다

햇빛 쪽으로 그늘 찍어 나르는 왜콩풍뎅이

돌아오는 발끝이 환하다

빛과 그늘이 서로 들락거려

나무는 몸속으로 길이 생긴다

불개미들이 줄지어 드나들며

나무의 부드러운 살을 물었다 놓는다

치어 꼬리같은 잎에 힘이 주어진다 흠칫 뒤척인다

맥문동 범부채 닭의장풀 우거지는 소리 아래

초록에 눈 먼 어린 암사마귀 제 수컷을 한 입 깨어 문다

먼 들판 기지개 켜는 소리

산호두나무 그늘이 깊어 간다

노란 꽃가루 묻힌 바람이

쉬엄쉬엄 십리를 간다

 

 


 

 

나금숙 시인 / 서천

 

 

 서해 바다 끝 서천에 있는 장례식장에 갔다가 나를 보았다. 검은 상복을 입은 사람들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서울에 사는 달이 여기 바닷가를 비추듯이 객지에 온 어둠이 서로를 비추고 있었다. 달의 발자국이, 묻히고 온 부스러기를 뿌리고 있었다. 멀리서 갈대를 태운 재가 날아 와 언덕이 되고 있었다. 모두들 전에 울지 못하고 눌러 둔 울음을 꺼내 놓고 있었다. 꺼내 놓은 속울음이 먼지 중에 뭉쳐지고 있었다. 영정 속에서 한 생애가 내려와 어깨를 짚어주었다. 줄지어 나가는 검은 옷 위에 앉힌 얼굴이 똑같았다. 지고 가는 울음의 무게가 비슷하였다. 겨울 하늘이 포근하게 풀리면서 흰 눈을 바다 위에 쏟아놓을 때, 천지간에 어슷어슷한 어둑사니가 또록 또록 눈을 뜨고 서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모래를 먹인 연줄이 툭-끊어지며 익숙한 얼굴 하나가 멀리 사라졌다.

 

 


 

나금숙 시인

전남 나주 출생. 2000년 《현대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 나무 아래로』 『레일라 바래다주기』. 서울시 공무원.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시산맥 동인. 현재 현대시학 편집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