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강순 시인 / 음펨바 효과 외 11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5.
강순 시인 / 음펨바 효과

강순 시인 / 음펨바 효과

 

 

나는 날갯짓을 만 번쯤 해서

네게로 간다

너는 나의 방문에 초연한 듯

울지도 웃지도 않는다

모든 꽃들은 웃지 않는다

인간만이 꽃을 오해한다

내 눈빛을 읽은 너는

이제 붉은 입술이 없구나

몽상의 한가운데

나는 너의 왼쪽 시린 곳에 앉는다

나의 생은 부풀어 올라 달에게 가고 싶었다

신을 만나 약속받고 싶었다

달의 유효기간이 얼마일까?

눈을 감을 때는 아껴 두었던 네 오른쪽을 꺼내 본다

어둠 속에 떠오르는 노란 이마

네가 내준 게 입술뿐이 아니었구나

네 몽상에 나를 자주 초대하였구나

나처럼 바람에 흔들렸구나

나처럼 부풀어 올랐구나

신에게 질문도 ...하였구나

밤마다 한 잎 한 잎 색 입혀

나를 그렸구나

우리는 벌거벗고 달빛 열반에 있었구나

우리 온도가 가슴 시리게 뜨거웠구나

네게로 가던 허공의 빗금들

꿈에서 깨면 날갯죽지가 많이 아프다

 

-시집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에서

 

 


 

 

강순 시인 / 국수

 

 

한밤의 허기를 두 손에 받쳐 든다

풀리지 않는 인생 함수처럼

국수 한 그릇이 숙제 같은 새벽 두 시

 

치매 앓는 여자처럼 심신이 늘어진 국수가

자신을 국물에 던져 놓고 사람 속을 읽는다

 

기억을 중심에 두고 악몽을 통과하다 보면

그동안 먹어 치운 국숫발처럼

 

맛있었던 이들과 사라진 이들

행복했던 골목과 사라진 집들

사라진 것들은 이유가 모호해서

햄릿을 사랑한 오필리아가 강물에 빠진 기분

 

어제 속에 녹아든 기억들은

악몽과 망각의 경계에 있어

뜨겁게 여러 번 토렴해야 겨우 이해되는 영역

 

그저 젓가락으로 몇 번 하릴없이 휘저으면

미련을 증명하는 누추한 단서나 되지

 

방어벽도 없이 허물어지는 기억 속에

떠난 이와 남겨진 나를 골라내어

 

가슴팍 비밀을 양념 치듯 몇 번 더 휘저으면

나는 당신에게 다정한 한 끼가 될 수 있을까

 

도로 쏟아부을 수 없는 시간처럼

불어 터진 면발들이 입 안에 가득할 때

삼킬 수도 뱉을 수도 없는 궁휼의 맛이

 

생전 처음 느껴보는 것은 아니라고

수십 번을 속으로 되낸 후에야 그릇이 비워진다

 

-계간 『문예연구』 2024년 봄호 발표

 

 


 

 

강순 시인 / 시소(seesaw)

 

 

너는 공원 그네 옆에 있어서

남들이 허공에 웃음을 뿌릴 때

그 호사를 동시에 누리는 거라고

 

너는 놀이터 미끄럼틀 옆에 있어서

남들이 중력의 기쁨을 누릴 때

그 기분을 동시에 맛보는 거라고

 

오늘을 버겁게 올라갔다 무심히 내려올 줄 알게 되어서

어제를 털썩 내려놓고 빙그레 웃을 줄 알게 되어서

 

한자리가 서러워 날마다 주름이 늘어나도

해독되지 않는 질문을 견딜 수 있는 거라고

 

어제가 너무 무거워 중심이 뒤쪽으로 처지거나

오늘이 너무 가벼워 온몸이 앞쪽으로 쏠려도

 

즐거운 놀이기구가 몸속에 들어차 있어서

무한반복 재생 가능한 유음들이 철썩이는 거라고

 

놀이터에 묶인 난파선도 바다가 있니?

바다를 힘껏 당기면 은하도 같이 딸려 오니?

 

물살 같은 질문들을 잠시 부려놓고

새들이나 나무들의 조용한 수다를 들을 때면

 

사실 너의 이웃들도 모두 빈궁해서

한밤을 당겨 불면을 겨우 덮는 거라고

 

웃음과 기쁨이 모두 소진되어 버린 어느 밤

공원 놀이터에 은빛 바다가 출렁이는 걸 본 적이 있어

 

몸속의 유음들을 있는 힘껏 끌어모아

한밤의 고독을 견디는 심장을 본 적이 있어

 

-계간 『시와 정신』 2024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 밀교

 

 모두가 잠든 밤

 얼굴이 창백한 말총머리 소녀가 마당으로 걸어 나왔다 각혈을 받아낸 하양 천 위에서 남몰래 빛나던 붉은 문장, 달빛 암호 지시에 따라 빨랫물이 출렁이고 소녀가 신도 자세로 고개를 몇 번 끄덕였다 온통 붉은 색을 뒤집어쓰고 남모르는 언어를 고집하던 그 종교는

 

 자꾸 달빛 그늘 쪽으로 교리를 넓혀 나갔다 한밤의 비밀이 쌓일수록 소녀가 나를 신으로 상상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 오래전 시골집 마당의 꽃들 나무들만 기억하는 그 나라, 내게 암호 해독가가 되는 훈련을 처음 시켰다

 슬픔의 방향 쪽으로 달빛이 흐르는 밤이 올 때

 그 소녀, 어떤 교리를 항해하고 있을까

​​

-계간 『시와산문』 (2022년 겨울호)

 

 


 

 

강순 시인 / 나부끼는 안녕

- 마녀 일기8

 

 

 안녕하세요 나는 안녕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사실 안녕하지는 않습니다 안녕하다고 말하고

싶지만요 세상의 온갖 루머들을 해독하느라 나의 안녕은 점점 시들고 있습니다

 

 안녕하라고요? 금방 허물어지는 기억들같이 허공에서 힘겹게 나부끼는 안녕을 한 움큼 잡았

더니 나는 조금 안녕해지는 듯도 합니다 구름 위에 집이 생겨납니다

 

 이제 당신의 안녕을 조종합니다 마법은 가장 짧은 문장으로 안녕을 만드는 수사학이죠 나는

어느새 루머 속으로 날아갑니다 그름달을 비껴가는 빗자루 끝에 물음표가 따라옵니다

 

 하늘에는 물고기자리 사자자리 옆에 처녀자리가 새로 생겨납니다 그믐날 당신이 나의 별자

리를 달고 태어날 때 나는 당신 안에서 새로운 언어를 퍼뜨립니다

 

 쩍쩍 갈라지던 엄지손톱이 당신의 문장을 먹고 점점 매끈해지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나는 곧

팔랑팔랑 안녕할 것 같습니다

 

 


 

 

강순 시인 / 불시착

 

 

내 연애의 끝은 Z가 아니다.

W와 X 사이에서 털털 흔들리는 엔진을 바라보며 타임머신 안에 갇혀 있다

난 지금 시간을 거스르는 H모양의 사다리를 타고

사막 한가운데 불시착한 스물여섯 살의 타임머신을 작동 중

그의 뒷모습은 바람길을 따라 슬프게 사라져갔다

바람길이 긴 S커브길이다

사막 한가운데 서 보면 바람의 방향을 읽어야 사막을 빠져 나올 수 있다는 걸 안다

바람은 가끔 미래에서 과거로 분다

두려움도 없이 처음 내민 건 붉은 장미 입술이었다

그러면 망각속에 살던 J가 G모양의 혀를 내밀고

C같은 내 얼굴이 고양이처럼 새초롬해졌다

내 첫사랑은 대문자 A로 시작되었다

붉은 글씨를 하나하나 파 먹는 벌레처럼

 

 


 

 

강순 시인 / 사기꾼 순자 아지매

 

 

 그러셨잖아유 사랑은 온몸과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그럴듯하게 치는 사기라면서유 그러니께 이 남자 저 남자 사랑해서 전 사기 5범쯤돼유 아니 맴속에만 있는 전과까지 치면 가중 이네유

 

 오 선상님, 일요일 아침 단잠을 반납하고 사모님 손에 이끌려 순수히 교회에 가신 오 선상님, 이왕 간 김에 사기 100억범도 넘는 사랑의 예수님에게 제 가난할 적 사기도 죄다 용서해 달라고 대신 부탁드려 주시면 안 될까유?

 

 가난해서 그랬다고 앞뒤 계산 안 하고 나한테 잘해 주면 이것저것 주다가 다정해서 병인 내 맴도 주고 보드랍고 촉촉한 이쁜 꽃도 주고 허벌나게 그랬다고

 

 그러니 같은 사기꾼으로서 예수님에 비하면 새발에 피도 안 되는 저의 죄를 죄다 용서해 주십사 대신 부탁드려 주시면 안 될까유? 나중에 써비스로 공짜 술 드릴게유

 

 오 선상님, 근데 그 술 먹다 오선상님 가슴에 양귀비꽃 하나 환장하게 꽂아 버리면 전 영원히 감옥에서 살아야 하니께 에라 모르겠다 이래도 감옥 저래도 감옥인데 그래도 이 나이에 누구 가슴에 양귀비꽃으로 환장하게 피어 두 다리 후둘거려 걷지 못하게

 

 오늘 밤, 붉은 립스틱 바르고 노래께나 주구장창 불러드릴께유 꼭 들리셔유 네?

 

-계간 《다시몰문학》 2016년 여름

 

 


 

 

강순 시인 / 이별의 미학

 

 

아무것에나 이별 인사를 하는 습관이 생겼다

 

빠진 머리카락이나 잘못 쓴 편지지와 헤어질 때

안녕, 안녕, 이라고 말하며

쓸모없이 쓸쓸한 등을 아무 때나 내보인다

 

사라지거나 남겨지는 것들은 절벽 같은 침묵

눈을 떠도 눈을 감아도

차가운 밤이 모래처럼 차곡차곡 쌓여간다

 

연락 없는 무심한 이들에게

안녕, 안녕, 혼자 중얼거리며

안녕을 접어서 어둠에 던지는 일은

어제의 낭만을 남몰래 해촉하는 일

 

이해할 수 없는 어둠을 받아들여

생채기 있는 이별에도 익숙해질 때

 

망각의 망토를 허공에 날리며

검은 구름을 뜯어 맛보는

웃는 마녀로 변신해야지

 

미문(美文)만 골라잡는 긴 손톱을 들어

버린 안녕을 주워 입맞춤하며

안녕, 안녕, 쾌활한 노래를 반복해야지

 

흙먼지 이는 계절이 오기 전에

이별 폭풍을 막을 수 있는

작고 단단한 창문 하나 만들어야지

 

계간 『아토포스』, 2023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 끝이 없는 것들

 

 

생각은 밤을 길게 통과하는 고딕 양식

끝과 끝이 검고 뾰족해서 밤을 아프게 찌른다

 

질문과 대답에 둘러싸여 검은 피를 흘리는 사람이

한밤에 베개를 적시다가 돌연히

생각의 뿔을 그러잡아 내일의 방향 쪽으로 던진다

 

바닥과 벽들이 악쓰는 아이처럼 일어선다

시공을 가리지 않고 벌떡벌떡 일어선다

너는 슬픔의 목을 아직도 비틀지 못하였구나

생각들이 한숨을 몰아 아우성친다

 

동쪽은 곧 아침 해를 보내 염탐을 시도하겠지

패잔병 같은 불면이 생각의 성들을 몇 번 허무는지

 

거룩하고 위대한 생각들이 무너진다

비루하고 쪼잔한 생각들이 세워진다

 

통장 잔고, 공과금, 생활비 목록이

기형도, 허수경, 옥타비오 파스를 완패시킬 때

 

생각들은 흠뻑 지쳐 속눈썹이 늘어진다

뾰족한 것들은 모두 치열한 밥그릇 속에 있는 거다

내 안에서 비장하고 얍삽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 소리친다

 

끝이 없어서 시작점도 찾을 수 없는 것들이

살 속으로 흥건히 들어온다

 

뾰족한 것들은 왜 모두 시린 몸의 은유인 걸까

 

버리지 못한 생각 알갱이들은

희망의 끝에서 외로운 발톱을 세우는 시간의 유적

슬픔의 끝에서 더욱 뾰족해지는 한밤의 유언

 

뜨거운 불면은 왜 건조하고 가려운 등 쪽으로만 흐르는 걸까

 

반연간 『시인들』 2023년 봄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 병실을 동굴이라 부를 때

 

 

애써 휘두른 마술봉이 작동되지 않는다

 

엄마는 3년째 서서히 망각 되는 중이고

냉장고 속 버려진 음식처럼

새벽 두 시는 통점의 특허권을 주장하지 않는다

엄마의 젖가슴이 기억나지 않아요

망각은 개수대 속으로 빠져나가는

못 먹게 된 사과 조각 같단다

 

서로의 달콤한 부분을 쪼아먹다가

화석으로 발견되는 부리와 발톱

우리는 이미 백과사전 속 조류의 흔적이어서

 

얘야, 밥 잘 챙겨 먹어라

어떤 새는 동굴이 더 안전하단다

 

바싹 마른 날개를 가진 아픈 새가 나라면

이제 온몸을 뒤덮은 구름을 떼어버려도 되지 않나요

 

주삿바늘 꽂은 팔을 움직여

날갯죽지 속으로 죽은 엄마를 끌어다 안을 때

 

이제 내가 있는 장소를 찾아보세요

깊은 숲속 동굴 문을 열고 들어가

부족한 잠을 좀 자고 싶어요

 

지독히 춥거나 지독히 더운 날씨 같은

난폭한 얼굴들이 모두 잊히는 침대 위

뭐가 되지 않아도 되는 달콤한 어둠 속에서

 

상한 사과의 태연한 얼굴을 하고

그래도 이렇게 살아있어 다행이다

마술봉을 내리고 자고 싶어요

 

계간 다층, 2023년 여름호 발표

 

 


 

 

강순 시인 / 피아노의 세계

-마녀 일기 13

 

 

아버지, 하고 레를 치면 아버지가 레에서 일어납니다

어머니, 하고 미를 치면 어머니가 미에서 일어납니다

두 분 다 일어나서 나를 지긋이 바라봅니다

너는 우리보다 더 높은 음을 가지거라

 

반음 같은 날들이 많아요

내가 치기엔 어려운 음들이

자꾸 나를 묶어 놔요

 

미를 건너면 파의 세계

흔들리는 파는 넘기 힘든 파도

야생 독초 향 나는 저린 심장이

창도 없는 오두막에 밤새 나를 가둬둘 때

 

나는 아직도 파 앞에서 파, 파, 파도치며

슬픔의 발에 걸려 넘어지는데

 

모든 음들은 행복한 집에 돌아가지 못한

노숙자나 난민들 같아

 

어머니 아버지도 이제 그만

여기를 잊고 그곳에 편히 자리를 잡으셔야죠

 

나의 음들에 햇살과 웃음으로 만든 집이

봄날의 한낮처럼 어딘가에 있을 거예요

 

다 빼앗긴 가난한 이들이

울음이나 허기로 만든 음들을 몰고

마법을 찾아 자꾸 숲으로 들어옵니다

 

계간 『사이펀』2022년 겨울호 발표

 

 


 

 

강순 시인 / 이런 애인

ㅡ마녀 일기 15

 

 

지친 하루를 어둠에 포개놓을 때

애인은 여러 얼굴을 하고 다가옵니다

 

격정의 창을 들고 벌판으로 내달립니다

돈키호테는 분노와 열정을 동의어로 아는 사람

 

동화 속 못된 악인이 쿵 쓰러지고

앨리스가 남몰래 토끼 굴을 빠져나오는 동안

나는 죽음의 그림자를 비껴간 하루에 안도합니다

 

아무도 초대하지 않아 눅진한 어둠

감은 눈에서 왈칵왈칵 쏟아지는 하루

손끝 발끝까지 애인을 모두 채우는 동안

하루의 말들이 오해만큼 붉었다가 이해만큼 푸르러져

은하계 행성들이 남은 말들을 받아먹을 때

밤은 하루를 참아낸 만큼의 별의 얼굴이 됩니다

 

아기 고래가 편안히 어미젖을 빨 시간입니다

애인의 품속은 해저 삼만 리

 

밤의 오두막이 낮의 탄식과 한숨을 버리는 동안

길 잃은 헨젤과 그레텔이 무사히 집으로 돌아옵니다

 

세상 모든 질문을 버려도 되는 순간

세상 모든 해답이 틀려도 되는 순간

 

음악, 이라는 애인은

말보다 몸이 먼저입니다

 

가장 편한 자리를 내주어

벼랑과 격랑을 버텨낸 관능의 자세

 

계간 『사이펀』2022년 겨울호 발표

 

 


 

강순 시인

제주 출생.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박사 과정 수료. 1998년 《현대문학》에 〈사춘기〉 등으로 등단. 시집 『이십대에는 각시붕어가 산다』 『즐거운 오렌지가 되는 법』 『크로노그래프』. 2019년 경기문화재단 우수작가 선정. 2021 전국 계간 문예지 우수작품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수원대학교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