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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박몽구 시인 / 슈베르트를 들으며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5.
박몽구 시인 / 슈베르트를 들으며

박몽구 시인 / 슈베르트를 들으며

 

 

협재 해수욕장이 바라다보이는

무인카페에서 슈베르트 피아노 3중주를 듣는 동안

몇 번이고 덮친 파도

하나도 아프지 않다

 

퇴직한 교장 아버지에게

더 이상 기댈 등은 남아 있지 않아도

청춘의 상처인 매독과 밤이슬

무릎 위 깨진 기타 하나밖에 없어도

서른한 살의 팡세를

가로막을 벽은 어디에도 없다

 

음악은 가장 깊고 푸른 가난이 잉태하는 것이라고

밤을 새워 오선지를 메워 나간다

 

제주 바다 매서운 바위에 찢긴 파도

상처의 깊은 곳까지 다 만져

흉내 낼 수 없는 선율을 이루듯

음악은 깊고 푸른 상처

저 안쪽에서

꾸밈없는 소리를 건지는 것이라고

무인카페에 훤히 비치는 달빛 져다 부린다

 

첫눈을 딛듯

처녀의 파도 속으로

두려움 없이 걸어 들어간다

 

 


 

 

박몽구 시인 / 겨울 파종

 

 

겨울 콩은 결코 따뜻한 데서 잠재우지 않는다

소설 값 하느라 찬 서리 내린 섣달 초입

가을걷이 끝난 주말농장 밭두렁에

아버지는 아깝지도 않은지 콩을 파종한다

 

머리채 풍성한 무도 서리 앞에 시들고

아침이면 파랗게 실핏줄 끝까지

푸르름을 길어 올리던 기억 지운 채

화장기 없는 푸석한 얼굴

무표정하게 드러난 밭두렁에 콩씨 심는다

 

겨우내 땅거죽 얼어붙어

부드러운 흙가슴 한번 만지지 않고

새푸른 떡잎 하나 볼 수 없지만

타임 캡슐이라도 된 듯

얼음의 도가니에 작은 콩알 앉힌다

 

찬바람 겹겹이 둘러막고

때로 굽은 등도 곧게 펴지도록

군불 뜨끈뜨끈 지핀 방에 위리안치한

감귤이며 홍시 분에 넘쳐 썩어가지만

얼음 도가니에 든 콩알들

제 살 조금씩 내주며 언 흙 녹인다

봄물 스며들 때까지 어린싹 지킨다

온몸으로 겨울에 맞서서

스스로 겨울 빗장 푼다

 

한 사람 앞에만 비단옷 산처럼 쌓이고

사람을 죽이고 살리는 방망이 쥐게 해서는 안 된다고

독방에 앉아 겨울과 맞선 그 사람

마침내 빙벽 녹여 봄 맞듯

작은 콩알 얼음의 도가니에 심는다

겨울 복판에 아낌없이 저를 던져

깊은 상처로 깨끗한 봄 맞는다

 

 


 

 

박몽구 시인 / 오이도에는 섬이 없다

 

 

새 학기부터 안산에 출강하게 되었다

한가위를 훌쩍 넘기고도

불에 덴 사과처럼

뜨거운 가을의 이마가 만져지는 경영학부 강의실

이제 저자는 죽었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귀로 흘리며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후끈 달아오를 때면

분필을 던지고 오이도로 달려간다

대부도로 잇닿은 시화호에

음울한 새떼의 울음처럼 낮고 검게 눌려 있는

서울 하늘을 냅다 던져 버린다.

오이도를 서둘러 뭍 쪽으로 붙이면서

세발낙지, 도다리, 광어 풍년이어도

먹을 수 없는 불구의 바다

낚았다가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낚시꾼들의 도로를 물끄러미 훔쳐보다 돌아온다

시화호 옆에 둔 바다에는 유람선 떠서

외지인들 객지 맛 자아내고

둑 위에선 밤새 가스등 켠 채 낚싯줄 드리운 사람들

광어 도다리 낚기에 여념 없지만

불임의 바다를 어쩌지 못한 채

김빠진 맥주를 마시며

밀려난 일터가 떠밀어준 시간을 모아 이루는 성시

유채꽃 알토란 다 걷어내고

들어선 강의실이 벽만 보일 때면

오이도 파시로 잃어버린 시간을 사러 간다.

넓고 맑은 바다의 집 잃고

검붉은 시화호 숨가쁘게 돌아다니다

낚시꾼에게 걸린 물고기의 눈이

나만 같아 물끄러미 소금바람 쐬다가 돌아온다.

뭍 쪽으로 붙으려 안간힘을 쓰다

다시 불임의 바다에 위험하게 떠밀려 들어가는

오이도에서 힘겹게 발을 뗀다

 

 


 

 

박몽구 시인 / 마포 포구

 

 

신촌이 멀지 않은 6호선 광흥창역에 내려

옛 구화학교가 있던 자리를 찾아간다

마포 포구가 그리 멀지 않은

구수동 구불구불 이어진 골목

낮은 담장 너머로 보이는 빨래,

건어물 말리는 채반에 고인

햇살이 정겹다

서울에서 이런 동네가 아직 남아 있었다니

좁은 골목 곳곳 얼굴 내민

낮은 처마들 구수하게 얘기를 나누는 것 같다

 

그런 수수동 한구석에 자리 잡은

구화학교 터에 서면

비록 언어는 잃었지만

맑은 눈빛으로 다가오던 친구들 모습

양짓발에 핀 파란 수련처럼 다가온다

개발 붐에 등 떠밀려

속엣말 시원하게 뱉어낼 수 없던 친구들

곰보처럼 얽은 책상 든 채

외곽으로 이사 가야 했지만

구수동 구불구불한 골목에는

아쉬운 봄볕 여전히 찰랑거리고 있다

 

구화학교 헐린 자리

좁은 땅이 제값 이상 받아내느라

반듯한 상자 켜켜이 포개놓은 듯한

연립주택들 어깨를 맞대고 있다

그나마 남은 공터에

엉덩이를 들이미느라 바쁜 자동차들

사람살이가 뭔지 캐묻고 있다

 

 


 

 

박몽구 시인 / 귀면 선인장

 

 

아무리 사방을 둘러봐도

마른 목 풀어줄 물 한 모금 보이지 않는데도

코브라처럼 곧추세운 허리 숙이지 않는다

파란 하늘 향해 뻗은 직선에 매혹되어

손으로 쓰다듬기라도 할라치면

온통 가시 돋친 몸 내밀어

검붉은 피로 물들이고 만다

마음에 없는 사람에게 품는

서릿발 같은 앙심이려니 했더니

가시 아래 간직한 보석 같은 이슬 한 방울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란다

땅값이 비싼 자리에 이웃들 제치고

서둘러 뿌리를 내리느라 안간힘 쓰지 않고

어느 누구도 꺼리는 변방에 뿌리내리고

누구한테 물 한 모금 신세 지지 않아도

밤하늘 별빛을 닦은 이슬

제 몸을 찌르며 빚어낸 성성한 가시로 지키는

그의 얼굴을 본 사람은 없다

맹독을 쏘듯 머리꼭지에

빨간 꽃 하나 앉는 순간

거친 세상 향해 내민 귀면鬼面

 

더없이 넉넉한 어머니의 얼굴로 바뀌는 걸

본 사람은 없다

어릴 적 불장난하다가

귀 해진 책들 까맣게 태워먹은 날

매섭게 회초리 드시던 아버지의 귀면 안쪽

보이지 않게 흐르던 눈물

그 보석같이 빛나던 것 놓치듯.........

 

 


 

 

박몽구 시인 / 주상절리

 

 

어느 조각가가 숨어 있어

이어도 훤히 보이는 산마루까지

잘 마름된 바위 기둥들을 세웠을까

가지런히 파란 하늘까지 올라간

주상절리들을 보면

피둥피둥 거푸집 부푼 내 정신도

솜씨 좋은 조각가에 맡겨

말끔히 덜어내고 싶다

가지런히 어깨들 포갠 채 서서

차고 매운 겨울바람 너끈히 이겨

거문오름 아래 벌판에 유채꽃 피우는

주상절리처럼 굽은 데라곤 없이

곧게 서고 싶다

이어도에서 달려오는 거친 파도

온몸으로 들어 올려 따뜻한 저녁놀 펼치는

저 돌기둥들처럼

힘든 짐 지고 비계 오르는 친구

버거운 짐 들어주고 싶다

 

예리한 조각칼로 새겨진 상처 마다하지 않으며

허공에 다리를 놓아가는 주상절리

공사장 인부들 깨진 어깨를 딛으며

한층 한층 계단을 쌓아

파란 하늘로 올라가는 마천루 같다

멀리 이어도에서 사무쳐 몰려오는 파도

하나도 버리지 않고 거두어

거문오름에 깨끗한 해 들어 올리는 주상절리

 

두려움 없이 상처를 안으며

제자리를 지키는 자만이

저 바다를 거들 수 있다고 말한다

파도의 거친 갈기 온몸으로 들어 올려

깨끗한 저녁놀 한 폭 펼친다

 

 


 

 

박몽구 시인 / 오이도에는 섬이 없다

 

 

새 학기부터 안산에 출강하게 되었다

한가위를 훌쩍 넘기고도

불에 덴 사과처럼

뜨거운 가을의 이마가 만져지는 경영학부 강의실

이제 저자는 죽었다는 롤랑 바르트의 말을 귀로 흘리며

떠드는 아이들 소리가 후끈 달아오를 때면

분필을 던지고 오이도로 달려간다

대부도로 잇닿은 시화호에

음울한 새떼의 울음처럼 낮고 검게 눌려 있는

서울 하늘을 냅다 던져 버린다

오이도를 서둘러 뭍 쪽으로 붙이면서

세발낙지, 도다리, 광어 풍년이어도

먹을 수 없는 불구의 바다

낚았다가 다시 바다로 돌려보내는

낚시꾼들의 도로를 물끄러미 훔쳐보다 돌아온다

시화호 옆에 둔 바다에는 유람선 떠서

외지인들 객지 맛 자아내고

둑 위에선 밤새 가스등 켠 채 낚싯줄 드리운 사람들

광어 도다리 낚기에 여념 없지만

불임의 바다를 어쩌지 못한 채

김빠진 맥주를 마시며

밀려난 일터가 떠밀어준 시간을 모아 이루는 성시

유채꽃 알토란 다 걷어내고

들어선 강의실이 벽만 보일 때면

오이도 파시로 잃어버린 시간을 사러 간다

넓고 맑은 바다의 집 잃고

검붉은 시화호 숨가쁘게 돌아다니다

낚시꾼에게 걸린 물고기의 눈이

나만 같아 물끄러미 소금바람 쐬다가 돌아온다

뭍 쪽으로 붙으려 안간힘을 쓰다

다시 불임의 바다에 위험하게 떠밀려 들어가는

오이도에서 힘겹게 발을 뗀다

 

 


 

박몽구 시인

1956년 전남 광주에서 출생. 전남대 영문과와 한양대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 1977년 월간 《대화》 誌를 통해 등단. 시집: 『개리카를 들으며』 『마음의 귀』 『봉긋하게 부픈 빵』 『수종사 무료찻집』 『라이더가 그은 직선』 『칼국수 이어폰』 『황학동 키드의 환생』 『단단한 허공』 『빼앗길 수 없는 노래』 『자끄린드 뒤프레와 함께』  등의 10여권이 있음. 현재 '5월시' 동인이며 계간 『시와 문화』 편집주간. 한국출판연구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