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이대흠 시인 / 코스모스 꽃길에 서면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6.
이대흠 시인 / 코스모스 꽃길에 서면

이대흠 시인 / 코스모스 꽃길에 서면

 

 

코스모스 꽃길에 서면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지 알게 된다

저렇게 저마다 꽃을 피워 내면서도

꽃들은 다른 꽃을 다치게 하는 법이 없다

꽃 피운다는 게 누군가를 밟고서

올라가는 일이 아니라는 것을

꽃들은 이미 알기 때문이다

하늘하늘 흔들리는

코스모스 꽃길이 아름다운 것은

꽃과 더불어 잎도 줄기도

기쁘게 흔들리기 때문이다

그때 쯤 하늘은 한 뼘 더 높아진다

제 그늘은 한사코 간직하면서

꽃은 그늘 아래 움츠리지 않는다

 


 

이대흠 시인 / 동그라미

 

 

  어머니는 말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오느냐 가느냐라는 말이 어머니의 입을 거치면 옹가 강가가 되고 자느냐 사느냐라는 말은 장가 상가가 된다 나무의 잎도 그저 푸른 것만은 아니어서 밤낭구 잎은 푸르딩딩해지고 밭에서 일 하는 사람을 보면 일항가 댕가 하기에 장가 가는가라는 말은 장가 강가가 되고 애기 낳는가라는 말은 아 낭가가 된다

 

 강강 낭가 당가 랑가 망가가 수시로 사용되는 어머니의 말에는

 한사코 o이 다른 것들을 떠받들고 있다

 

 남한테 해꼬지 한 번 안 하고 살았다는 어머니

 일생을 흙 속에서 산,

 

 무장 허리가 굽어져 한쪽만 뚫린 동그라미 꼴이 된 몸으로

 어머니는 아직도 당신이 가진 것을 퍼 주신다

 머리가 발에 닿아 둥글어질 때까지

 C자의 열린 구멍에서는 살리는 것들이 쏟아질 것이다

 

 우리들의 받침인 어머니

 어머니는 한사코

 오순도순 살어라이 당부를 한다

 

 어머니는 모든 것을 둥글게 하는 버릇이 있다

 

-2003년, '애지' 여름호-

 

 


 

 

이대흠 시인 / 애월(涯月)에서

 

 

 당신의 발길이 끊어지면서부터 달의 빛나지 않는 부분을 오래 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무른 마음은 초름한 꽃만 보아도 시려옵니다 마음 그림자 같은 달의 표면에는 얼마나 많은 그리움의 발자국이 있을까요

 

 파도는 제 몸의 마려움을 밀어내며 먼 곳에서 왔습니다 항구에는 지친 배들이 서로의 몸을 빌려 울어댑니다 살 그리운 몸은 불 단 노래기처럼 안으로만 파고듭니다

 

 아무리 날카로운 불빛도 물에 발을 들여 놓으면 초가집 모서리처럼 순해집니다 먼 곳에서 온 달빛이 물을 만나 문자가 됩니다 가장 깊이 기록되는 달의 문장을 어둠에 눅은 나는 읽을 수 없습니다

 

 달의 난간에 마음을 두고 오늘도 마음 밖을 다니는 발걸음만 분주합니다

 

 


 

 

이대흠 시인 / 별의 문장

 

 

 서늘하고 구름 없는 밤입니다 별을 보다가 문득 하늘에 돋은 별들이 점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오래전부터 너무 많은 이들이 더듬어 저리 반짝이는 것이겠지요

 

 사랑에 눈먼 나는 한참 동안 별자리를 더텄습니다 나는 두려움을 읽었는데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지요

 

 은행나무 잎새 사이로 별들은 또 자리를 바꿉니다

 

 


 

 

이대흠 시인 / 도화의 말을 적다

 

 

 보리숭어라는 거 복송꽃 필 때라

 살에서 복송내 난다고 복송내 귀 뒤로 흐르는 바람소리만 들려도 찰랑 몸물이 돌 때라 물만 먹어도 단물이 들어서 몸속 무늬가 찰지게 박혀 이게 살랑 꽃으로 피는 거제 인자 막 물오르는 시악시 몸이라 탱글탱글하니

 

 꼭 그맘때 이녁 그림자만 스쳐도 몸꽃이 확확 피던

 똑 그 나이 때 모양 나도 몰랐던 도화살이 자르르 번져서는 이마에도 볼에도 속살에도 연분홍 꽃잎이 또륵또륵 돋아서는 보름으로 가는 달마저도 꽃물 들어 달아오르는 봄밤인 거라 섬진강 더듬어오르는 숭어떼의 지느러미가 더욱 파닥거려서 오를수록 오를수록 개울은 좁아지고 파닥거리는 숭어떼

 

 파닥파닥 복송꽃 피고 타랑타랑 복송꽃 지고

 마음이 똑 옻 오른 것맹이로 근지러워서 이녁 생각만 하여도 스리슬쩍 내 안에서 알이 슬 때라

 

 


 

 

이대흠 시인 / 봄은

 

 

조용한 오후다 무슨 큰일이 닥칠 것 같다 나무의 가지들

세상 곳곳을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다 숨 쉬지 말라 그대

언 영혼을 향해 언제 방아쇠가 당겨질 지 알 수 없다

마침내 곳곳에서 탕, 탕, 탕, 탕 세상을 향해 쏘아대는 저

꽃들

피할 새도 없이 하늘과 땅에 저 꽃들 전쟁은 시작되었다 전쟁이다

 

 


 

 

이대흠 시인 / 용서받지 않겠습니다

 

 

선을 그으면 편이 생깁니다

이건 마치 몸을 감추려 옷을 입는 것과 같습니다

옷 밖은 내가 아닌 것만 같아서

함부로 할 수 있는 것들만 그곳에 있습니다 어릴 때는

 

닭목을 비틀었습니다

낫을 날려 개구리 등에 꽂았습니다

오리 모가지를 자르고 꿈틀꿈틀 흘러나오는 오리 피를 마셨습니다

 

풍뎅이 모가지를 비틀어 방바닥에 눕혀놓으면

지구가, 그러니까 세계가 돌아버렸습니다

 

용서받지 않겠습니다

짐승이었던 전생에 대해 생각합니다 지금은

 

어린 나뭇잎을 볼 때는 물렁하게 바라보려합니다

내 눈빛에 연두가 다칠 수도 있습니다

 

꽃이 허공을 뚫고 나올 때 얼마나 조심해서 발을 내미는지

 

몸의 이편에서 저편과 내통하려는 꽃들은 모두 간첩입니다

 

 


 

이대흠 시인

1967년 전남 장흥군에서 출생. 서울예술대학과 조선대 문예창작과 졸업. 목포대 국문과에서 문학박사 학위 취득. 1994년 《창작과 비평》을 통해 작품 활동 시작. 시집 『당신은 북천에서 온 사람』 『귀가 서럽다』 『물 속의 불』 『상처가 나를 살린다』 『눈물 속에는 고래가 산다』. 장편소설 『청앵』. 연구서 『문학파의 문학세계 연구』. 조태일문학상, 육사시문학상 젊은시인상, 전남문화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