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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점용 시인 / 건너다니는 우물
한밤에 누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내가 말해도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수화기 저편에서 훌쩍이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 수도 없고 그냥 듣기만 했습니다 삽십 분이 지나고 한 시간이 지났습니다 그는 평소에 차갑고 냉정한 사람 술을 많이 마신 모양입니다 무슨 말이라도 해주면 좋으련만 그는 계속 울기만 했습니다 중간중간 코를 풀어가면서 말입니다 먼저 말을 꺼낼까 몇 번을 망설였지만 어떤 말이 위로가 될지 몰라 그냥 듣기만 했습니다 그렇게 망설이며 그의 울음을 들어주는 사이 내게도 무슨 말 못할 사연이 생긴 것 같았습니다 이 추운 겨울밤에도 얼지 않는 깊은 우물이 하나 생긴 것 같았습니다
김점용 시인 / 고양이 삼각관계
소파를 찢는 일은 고양이의 본업 토 달지 말자
새벽은 자정을 찢고 내일은 오늘을 찢고 죽음은 삶을 찢는다
고양이 울음을 타고 그녀가 온다 하나는 애애-애애-울고 하나는 숨넘어갈 듯 아악- 아악- 울며 나머지는 그냥 찢어진다 찢긴다 여지가 없다
이인삼각 편대로 네가 날 찢었을때 나는 풀석풀석 스펀지가 되고 헝겊이 되고 구름이 되었다 어제가 되고 바닥이 되고 밑변이 되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좋았다
고양이가 소파를 찢듯 할 말이 없었던 건 아니었는데 모든 것이 저 고양이 울음에 갇혀 다시 물방울이 되고 얼룩이 되고 안 보이는 유리창이 되고 빗금이 되고 싱싱한 과도처럼 예리하게 삼각형이 된다 오래 닳아서 뭉특하게 말없는 맹목이 된다
김점용 시인 / 다시 1월의 세계
그녀는 베꼈다 오로지 베끼기만 했다 노란 연필을 쥐고 커다란 대학노트에 금강경을 베끼고 능엄경을 베끼고 법화경을 베꼈다
손으로 써야 글자에 기가 모이는 기라 그기 습이 되고 삼천대천이 몸속으로 흘러오는 기라
아들이 완구사업에 실패해 아파트를 날렸을 때도 결혼한 딸이 손녀를 데리고 집으로 들어왔을 때도 연필 쥔 손에 힘을 좀 주었을 뿐 그녀의 필사는 필사적이었다 구포시장에서 메주콩을 팔면서 쓰고 대나무 평상에서 우무를 먹으면서 쓰고 병실에 누워서 미장원에서 비닐 캡을 쓰고 썼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쓰고 쓰고 쓰다가 그대로 연필을 쥔 채 12월의 끝에 깊은 겨울에 가닿을 것 같았다 보이지 않는 거대한 바라밀이 그녀를 그곳으로 데려가는 것 같았다
니는 책 안 봐도 된다 술 마시지 말고 도나 닦아라 뜬금없는 말을 점풍처럼 불쑥 던지고 그녀는 시장에서 돌아오다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했다
장례식이 끝나고 다시 1월이 시작될 것 같았다 어디선가 옛날 옛날에 흘러갔던 먼 시절이 돌아와 그녀를 글자 모르는 어린아이로 만들 것 같았다
먼지 낀 화장대 아래 수납장엔 그녀의 삼천대천이 까마득하게 펼쳐진 채 은하처럼 빙빙 돌고 있었다 그녀가 썼던 모든 글자들이 그녀가 살아 있던 12월의 끝으로 새까맣게 건너뛰고 있었다
텅 빈 공책空冊을 안고 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문예바다》2020. 가을
김점용 시인 / 공책이 없다
공책은 비어있는 책이다 어릴 적에는 노트를 공책이라 불렀다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면 공책을 주었다 요즘은 책이 싫고 공책이 좋다 아무리 책을 읽어도 마음에 터럭 하나 움직이지 않는다 공책을 읽자 그냥 책은 읽지 말자 공책에는 수많은 말들이 있고 이미지가 있다 꽃이 있고 바람이 있고 아이들이 자라서 걸어오고 있다 양파 한 알에도 공책이 있다 내 몸 어딘가에 잘 익은 침묵이 있듯이 까도 까도 공책이 있다 공책을 읽어야 하는데 아무도 공책을 읽지 않는다 도서관의 쓸데없는 책은 쓸데없이 많이 읽으면서 휴대폰으로 뉴스도 읽으면서 안방의 드라마도 읽으면서 공책은 읽지 않는다 자신의 공책은 읽지 않는다 공책을 많이 읽으면 잘 살 수 있다 부자가 될 수 있다 건강할 수 있다 잘 죽을 수 있다 정말이다 농담 아니다 공책에는 사라지는 무수한 말들이 있고 사라지는 무수한 이미지가 있다 사라지는 사랑, 사라지는 뜬구름, 사라지는 어머니 아버지가 있다 먼 뒷날의 나도 있다 깊은 산의 숨소리, 호랑이의 포효가 있다 드넓은 바다가 있다 공책을 읽자 읽다가 졸리면 읽지 말자 공책 안에서 조용히 잠들어도 된다 공책을 읽어야 하는데 공책을 읽어야 하는데 꼭 읽어야 하는데 공책이 없다
-『문예바다』 2022-봄(34)호
김점용 시인 / 그 옷이 내게
그 옷이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가끔 내 곁에 없는 혹은 죽은 사람의 목소릴 듣기도 하는 편이어서 처음엔 그저 그러려니 여겼다 그런데 목소리의 주인이 누군지 금방 떠오르지 않아 찬찬히 짚어가니 내가 입고 있는 옷이 하는 말이었다
그 옷은 누가 입다가 준 것도 아니고 어디서 주워온 것도 아니었다 백화점 정기 세일 때 신용카드로 산 싸지도 비싸지도 않은 그만그만한 옷인데 그 옷이 내게 말을 거는 것이었다
한번은 어떤 사람과 진지하게 얘기를 나누고 있는데 바로 옆 의자에 걸어둔 그 옷이 그 사람의 뺨을 때리라고 개념에 빠진 놈은 맞아야 정신을 차린다고 나를 다그쳤다 물론 난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랬더니 욕을 했다 나더러 겁쟁이 돼지새끼라고 욕을 했다
통행증을 보여달라는 수문장의 말에 뺨을 한 대 갈겼더니 그냥 통과시켜주더라는 선가의 이야기도 있지만 뺨을 맞아야 할 사람은 오히려 내가 아닌가 나는 그 옷이 말하는 걸 어떻게 듣는지 모른다 귀로 들었다고 생각하지만 등짝으로 들은 것도 같고 때로는 뱃속 깊은 곳에서 울리는 것처럼 들리기도 하는데 뺨을 맞는다고 내 귀의 위치를 정확히 알게 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시집 <메롱메롱 은주>에서
김점용 시인 / 황혼
어머니는 자꾸 숨겼다 처음에는 옷장 속에 쌀통 안에 보일러실에 돈을 숨기더니 새로 산 신발을 숨기고 시금치 씨를 숨기고 호미를 숨기고 얻어 온 옆집 똥거름을 숨기고 커다란 빨래 건조대까지 숨겼다 선산에 묻은 아버지를 숨기고 부산의 정신병원에 입원한 막내이모를 일본 대마도에 숨겼다가 우리에게 들키자 다시 내 여동생 속에 꼭꼭 숨겼다 하루는 멀쩡한 우리 집을 숨겼다가 경찰차를 타고 들어오더니 자신의 머리카락과 옷을 가위 속에 가스렌지 속에 숨겼다 오늘은 저 바다에 무엇을 숨겼을까 선창가에 올라오는 어머니 뒤로 서쪽 바다가 시뻘건 노을에 뒤덮여 있는데 어머니가 난데없이 숙제를 낸다 내 좀 찾아봐라 온 동네를 다 뒤져도 안 보인다
-<월간문학> 2018년 12월호에서
김점용 시인 / 소가 어머니를 죽이다-꿈 14
하나뿐인 어머니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다
어디서든 자발적으로 망가지고 싶었다
내 안에 칼을 품고 있었구나
비누로 씻어 속죄할 양이면
나보다 더 간절하게
지나간 삶 전부를 되돌리고 싶으실
아버지의 세 번째 아내,
어머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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