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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희 시인 / 구르는 돌멩이처럼*
목에 걸고 싶던 싱싱한 자유 광화문에서 시청 앞에서 목 터지게 부르던 자유가 어쩌다 흘러 들어간 뉴욕 빌리지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녔지 자유가 이렇게 쉬운 거야? 그냥 제멋대로 카페 블루노트에, 빌리지 뱅가드에 재즈 속에 기타줄 속에 슬픔처럼 기쁨처럼 흐르는 거야?
내 고향 조악한 선거 벽보에 붙어 있던 자유 음흉한 정치꾼들이 약속했지만 바람 불지 않아도 찢겨 나가 너덜너덜해진 자유가 감옥으로 끌려간 친구의 뜨거운 심장도 아닌 매운 최루탄도 아닌 아방가르드, 보헤미안, 히피들 속에 여기 이렇게 공기여도 되는 거야 햇살이어도 되는 거야
청와대보고 여의도보고 내놓으라고 목숨 걸던 자유가 비둘기여야 한다고, 피 냄새가 섞여 있어야 한다고 목청껏 외치던 자유가 어쩌다 흘러 들어간 낯선 도시에 돌멩이처럼 굴러다녀도 되는 거야? 그것을 쇼윈도에 걸린 명품처럼 아프게 쳐다보며 속으로 울어도 되는 것이야?
* Bob dylan,「Like a rolling stone」
-시집 〈작가의 사랑〉 민음사
문정희 시인 / 6번 칸 어떤 나뭇잎은 기억처럼 굴러다니다가 내가 길을 걸어 갈 때 뜻밖에 부는 바람으로 내 옷깃을 쳐든다 암각화를 보기 위해 무르만스크행 기차를 탄 북구 여자의 6번 칸*에서 보드카에 취해 자꾸 말 걸어오는 사내를 본다 이윽고 핀란드 말로 사랑해!가 뭐냐고 그가 물었을 때 여자는 대답한다 하이스타 비투(haista vittu)! 엿 먹어! 내가 탄 배는 그때 난민 보트였던 것 같다 항구에 닿아도 기실 아는 이 없었다 바다에는 고래, 불쑥 두려움처럼 솟아나는 젊고 위험한 미시시피 시인들의 배에서 나는 자욱한 우울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 때 한 시인이 내민 북구 시인의 시집 암각화처럼 어렵고 낯선 그 첫 문장을 18년이 지난 오늘에야 해독해 본다 혹시 엿 먹어!?는 아니겠지 고대 암각화 속에서 뭉클 솟아 오른 고래의 시 미나 라카스탄 시누아(Mina rakastan sinua)! 나는 당신을 사랑해! 푸우! 아직 푸른 잉크고래가 천년 늦게 당도했다 *6번 칸; 핀란드 유호 쿠오스마넨 감독 영화. 칸느(2021) 그랑프리 시산맥 2023년 여름호 발표
문정희 시인 / 나무학교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해마다 어김없이 늘어가는 나이 너무 쉬운 더하기는 그만두고 나무처럼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늘 푸른 나무 사이를 걷다가 문득 가지 하나가 어깨를 건드릴 때 가을이 슬쩍 노란 손을 얹어 놓을 때 사랑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에 꽂힐 때 오래된 사원 뒤뜰에서 웃어요!하며 숲을 배경으로 순간을 새기고 있을 때 나무는 나이를 겉으로 내색하지 않고도 어른이며 아직 어려도 그대로 푸르른 희망 나이에 관한 한 나무에게 배우기로 했다. 그냥 속에다 새기기로 했다 무엇보다 내년에 더욱 울창해지기로 했다.
문정희 시인 / 명봉역
아직도 은소금 하얀 햇살 속에 서 있겠지 서울 가는 상행선 기차 앞에 차창을 두드릴 듯 나의 아버지 저녁 노을 목에 감고 벚나무들 슬픔처럼 흰 꽃 터뜨리겠지
지상의 기차는 지금 막 떠나려 하겠지
아버지와 나 마지막 헤어진 간이역 눈앞에 빙판길 미리 알고 봉황새 울어 주던 그날 거기 그대로 내 어린 날 눈 시리게 서 있겠지
-한국시인협회 2021. 사화집 《역》
문정희 시인 /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아침에 일어나 보니 내 얼굴에 눈이 한 개다 나는 눈을 감아버렸다 캄캄한 절벽이다 어디로 갔을까 내 한쪽 눈 신이 사람을 만들 때 가장 정성을 들였을 것 같다는 눈* 나 역시 눈과 눈물을 유난히 사랑했었다
슬플 때, 슬퍼서 아름다울 때 오른쪽 눈이 눈물을 흘리면 왼쪽 눈도 함께 눈물을 흘렸다 그런데 이제 희망을 허망이라 읽으면 어떻게 하나 한 쪽에만 눈이 달린 내가 두 눈 가진 너를 보고 장애자라 할 것 같다 부패한 수족관 같은 tv뉴스 화면에서 한 눈 가진 사람과 두 눈 가진 사람이 서로를 병신이라 우기고 있다 나는 울었다 그런데 내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좌파도 우파도 아닌 내 한쪽 눈 어디로 갔을까 내 눈물은 어디에다 두나
*오션부엉 / 미국 소설가; 지상에서 우리는 잠시 매혹적이다.(시공사)
-2023년 문학나무 여름호 발표
문정희 시인 / 당신의 감옥 — 마드리드 책의 밤
초저녁 마드리드는 소나기에 갇혔다 세계 책의 밤! 세계도 책도 밤도 넓기만 하다 퇴적층을 뚫고 뿌리 하나가 솟듯이 은발의 평론가 대뜸 물었다 당신네 나라의 감옥은 어떻습니까? 군사정권 시절 민주화 투쟁으로 사형수였던 분이 대통령이 된 후로 감방마다 TV도 있고 난방도 비교적 잘 되고 있다고 해요 당신네 나라의 감옥은 어떻습니까? 나날이 범죄가 증가하여 수용이 넘쳐나요 프랑코 시대도 아닌데 정치범? 혹은 마약과 성범죄 등인가요? 어느 시대나 미운 놈은 많죠, 게다가 고통도 자유도 인터넷도 널려 있으니까요 인간은 욕심이 감옥 아닌가요 (앗, 마스크를 착용하세요) 작가는 수갑보다 입마개를 더 싫어하죠 오늘은 책의 밤, 책처럼 완성된 사물도 없는데 자꾸 인간에게서 밀려나고 있네요 피와 삶이 숨 쉬는 문학은 오래 살까요? 글쎄요, 시인은 언어의 감옥에서 늘 탈옥을 꿈꾸는 수형자 침묵으로도 자유를 표현할 수 있어요 감옥은 사방에 널려 있으니까요 시인의 노래는 결국 감옥의 노래입니다 쉬잇! 너무 과장 미화하지 마세요 시가 달아나요
-계간 『애지』 2024년 겨울호 발표
문정희 시인 / 햇살
당신이 사방에 서서 눈이 부신 오후가 되면
나는 머리를 자르고 싶어요
지난가을 찬바람 불 때 낙엽과 함께 묻어버린 눈빛
그때부터 나의 동면은 시작되었지만 오늘 당신 앞에 다시 살아나
헝클어진 머리채 잘라버리고
처음인 듯 조용히 기대어 울고 싶은 건 무슨 일인가요
사랑이란 장애를 만났을 때 더욱 무성히 자라는 법이지만
오늘 긴 머리채 잘라버리고 다시 불같이 사랑하고 싶은 것은 이 무슨 찬란한 망발인가요.
-시집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에서
문정희 시인 / 시인은 도둑이다
시인은 도둑이다 바퀴를 훔쳐다 달을 만들고 일식(日蝕)을 노래한다 잎 지는 소리로 이별을 만든다 별의 향기로 우주선과 레이더를 만들고 불사조의 발톱을 내민다 시인은 1000년 전 무덤에서도 훔친다 미래에서도 훔치고 훔친 천둥 번개를 가지고 논다
시인은 도둑이다 표절과 도둑은 무슨 차이일까 표절은 아이를 훔친 유괴범을 뜻하는 말이다 사실 이 말도 내가 슬쩍 소매치기한 것이다 이것은 시가 아닐 수 있다 시인은 훔친 새알로 새를 만들어 허공에다 적멸을 풀어놓지만 풀이 민중이든 민초이든 관여하지 못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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