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시인과 시(현대)

최종천 시인 / 상처를 위하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19.
최종천 시인 / 상처를 위하여

최종천 시인 / 상처를 위하여

 

 

박씨의 검지는 프레스가 먹어버린

반 토막짜리다 그런데 이게

가끔 환하게 켜질 때가 있다

그가 끼던 목장갑을 끼면

내 손가락에서 그의 검지 반 토막이

환하게 켜지는 것이다

박씨는 장갑을 낄 때마다

그 반 토막의 검지가 가려워서

목장갑 손가락을 손가락에 맞게 접어 넣는다

그 접혀 들어간 손가락은 때가 묻지 않는다

환하게 켜지는 검지의 반 토막이 보고 싶어

나는 그가 끼던 목장갑을 끼곤 하는데

그러면 전신에 전류가 흐르듯 하는 것이다

상처가 켜 놓은 것이 박씨의 검지뿐이랴

과일들은 꽃이라는 상처가 켜 놓은 것이다

상처가 없는 사람의 얼굴은 꺼져 있다

상처는 영혼을 켜는 발전소다

 

 


 

 

최종천 시인 / 권주가

 

 

지금까지 쭉 아들과 딸 마누라에게

가장으로서 군림해 왔느니

오늘 하루는 술을 마시고

술의 하인이 되고 싶다.

술을 마시면 누구나 술의

꼭두각시가 된다. 술과 싸우지 말 일이다.

그냥 순종하자. 죽어도 인간의 하인이 되기는 싫으니,

사장님을 안주 삼아 씹어 먹고

아줌마 여기 반 병 더!를 외치자.

술에 절어 들어가면

그동안 식물처럼 순종해 온

마누라가 나를 침상에 누이고

비틀어 짜 줄 것이다. 양말 벗으라면 벗고

양치질하라면 하고 오늘 하루쯤은

술을 핑계로 그냥 마누라의 하인이 되자.

사람이 술의 주인이 될 수 없음에

대파 한 단이나 시금치나 상추 같은 것

마누라가 다듬는 무슨, 풋것이라도 되자.

 

 


 

 

최종천 시인 / 화곡역 청소부 한달 월급에 대하여

 

 

올해 문화예술위원회에서 주겠다는

지원비가 드디어 한 달에 100만원씩

1200만원으로 올랐다, 용렬하게

이 몸도 신청했다. 문득 화곡역 청소부에게

한달 월급이 얼마나 되느냐고

왜 물어보고 싶었을까?

63만원이라고 했다.

시집도 내고 목돈으로 1200만원이나 벌었으니

행복은 역시 능력 있는 사람의

권리지 의무가 아니라고

누군가는 생각할 것이다, 솔직히

배때지가 꼴린다, 내가 못 받았기 때문이다

"모든 예술은 사기다"

백남준의 이 말은 은유도 비유도 아니다

부를 창출하는 게 아니다. 그 청소부는

얼마나 많은 부를 창출하고도 그것밖에 가지지 못하나

예술은 허구를 조작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자각하는 시인만이 시인이라고

단언하기는 그렇지만, 시인들이여

행복은 권리라고 생각하지 마라, 그렇다면 그대는

시인은 못되리라. 행복은 누구나의 의무이다

우리의 행복함은 곧 우리가 선함이요

우리의 불행은 곧 우리가 악하기 때문이라

이러한 행복과 불행의 원리는

화곡전철역에서 하루종일 허리 구부리고 청소하시는

아주머니의 월급이 63만원밖에

안 되기 때문이다

 

 


 

 

최종천 시인 / 불만

 

 

불만의 비어 있는 공간에서

소리가 들려온다 꿀을 먹으며

벙어리가 되어버리는 사람은

얼마나 굶주렸을까

 

말이 가득히 메워버린 그의 입가를

맴돌다 사라지는 언어들

나는 사람에도 증오에도 불만이다

민주주주의에도 불만이다

나는 떠벌이고 다녀야겠다

눈을 말똥말똥하게 켜고

지금 불만 중인 꼬마들아

너희는 만족하지 마라

만족은 발을 꼭 묶어놓는 것이란다

어른들이 내주는 숙제는 그만두고

이 드넓은 세상을 향해

마음껏 소리치고 나아가라

말하라, 불만으로 의문으로

물음표는 낚시바늘을 닮았구나

세상을 새롭게 하라

불만은 뜻밖에도

이성의 밑천이란다

 

-시집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창비, 2007

 

 


 

 

최종천 시인 / 삼각형 만들기

 

 

엄마와 아빠는 잘 싸우는 편인데요.

저는 학교에서 삼각형에 대하여 배우고 나서부터

제가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지요.

요사이는 제법 바쁘답니다.

제가 조금 늘어지게 늦잠을 자기만 해도

엄마와 아빠는 서로의 길이를 잰답니다.

제 역할은 주로 밑변이라 할 수 있어요.

아버지는 화가 나서 방에서 큰소리를 지르시고

엄마의 설거지하는 소리는 유난히 시끄럽고

저는 얼마나 길게 늘어져야 하는지

하지만 비명을 지른 적은 없지요.

저는 엄마를 사이에 두고 아빠와 삼각관계지요.

선생님의 말씀으로는

삼각형은 이 우주보다 더 먼저 있었다고 해요.

그건 정말 그럴 것 같아요.

아빠와 엄마가 나를 만드신 것은

하느님보다 더 잘한 일이죠.

 

-시집 <그리운 네안데르탈>에서

 

 


 

 

최종천 시인 / 희망

 

 

재앙은 희망의 강대한 지지자

인간이 이룩한 것을 재앙이 씹어먹지 않는다면

인간은 창조할 근거가 없어질 것이다

인간이 재앙을 즐기는 한가지 이유는

인간의 권태를 재앙이 달래준다는 사실에 있다

희망은 어떻게 공포와 연결되는가

인간은 환상으로 희망을 양육하고

희망에게 선동당하기도 한다

축제와 전쟁의 밑천인 희망이 있다

고난과 비참에 혼합된 희망을 가려내어

희망을 버리고 고난과 비참을 마시는

자결을 결행하지 못하는 인간

모든 결핍과 파경의 주(主)이신 희망

인간은 희망을 위하여 살고 죽어간다

욕망의 주인 희망

희망이란 인간의 상징능력이

악에게 씌워준 가면이다

 

-시집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에서

 

 


 

 

최종천 시인 / 경계인

 

 

발터 벤야민은 도망치다가

국경을 딛는 순간 망설이면서 죽어갔다

누구도 경계선을 딛고 서서

버티는 자는 살아남지 못한다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키스는 경계이다 이 경계선을 넘어

월북을 하면 섹스를 한다

 

난 이 경계에서 서성거리고 있다

이 경계에서 수많은 여자들이 떠나갔다

나는 여전히 키스까지만 할 것이다

나는 경계인이다

이 칼날 같은 경계를 딛고 서서

보초병이 되어 사랑의 보초를 설 것이다

 

넘을 때마다 넘어지는 나를, 이 허수아비를

여기가 경계라고,

여자들은 꼭 일으켜 세워 두고 떠난다

허수아비 저 홀로 경계를 딛고 서 있다

 

그녀는 또 어디에 경계를 긋고 있을까?

그녀가 벗어 놓은 허수아비가 일어서고 있다

 

 


 

최종천 시인

1954년 전남 장성 출생. 1986년 《세계의 문학》과 1988년 《현대시학》에 시를 발표하며 작품활동 시작. 시집 『눈물은 푸르다』 『나의 밥그릇이 빛난다』. 산문집 『노동과 예술』. 2002년 신동엽 창작상과 2012년 오장환 문학상, 2011년 최우수 도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