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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손현숙 시인 / 멀어도 걷는 사람 외 9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3.
손현숙 시인 / 멀어도 걷는 사람

손현숙 시인 / 멀어도 걷는 사람

 

 

 당신의 왼손은 나의 오른손이다 우리는 손을 잡고 반대쪽으로 걷는다 가끔은 당신을 잃어버리기도 하는데, 들판을 가로지르는 나무들 하얗게 손사래 친다 생 각난 듯, 이름을 부르면 모르는 얼굴이 뒤돌아다 본다

 

 당신은 어깨를 찢어서 부글거리는 흰피, 휘파람을 불면 꽃들은 만발한다 가을 개 짖는 소리는 달의 뒷면에서 들려오고 눈을 뜨지 못한 강아지는 꿈 밖으로 나 가서야 젖꼭지를 물 수 있는데

 

 담장 밖에 둘러쳐진 오죽의 둘레는 그림자가 없다 대나무숲으로 돌아가야 이 름이 돌아오는데, 당신은 멀어도 걷는 사람 도무지 말을 므르겠는 여기, 눈빛으 로 기록된 말들 속에서 없는 당신은 다정하다

 

 


 

 

손현숙 시인 / 못, 준다

 

 

 연애 고수에게 비결을 물었더니 잘 주고받기란다 피구 게임에서도 몸을 살짝 뒤로 빼면서 공을 받아야 하는 것처럼 주고받기만을 잘하면 쇳덩이라도 가벼운 법이라는데,

 

 나무껍질처럼 생긴 목수 아저씨 못 하나 입에 물고 한참을 중얼거린다 장미나무 찻장을 앞에 세워놓고 “꽃 줄게, 꽃 받아라” 문짝을 달랜다, 나무의 결 따라 못질한다

 

 심하게 어깃장 놓던 장미 찻장이 거짓말처럼 부드럽다 못은 망치로 때려 박는 것이라는 고정관념이 깨지면서 당신아, 어쩌자고 우리는 몸을 주고받아 새끼를 나눠 갖게 되었을까

 

 그나저나 눈 깜짝할 새 방바닥에 쓰러져서 돌아가신 아버지 어디 가서 도로 몸을 받아 오나 너를 덜어 나를 채우는 여기, 꽃잠이 밀려와 하품한다, 생글거리며 횡격막을 연다

 

 


 

 

손현숙 시인 / 너는 왜 내게 등을 보이니?

 

 

입산금지 팻말을 무시하고

정광산 비탈길로 발 들인다

가쁜 스틱이 호흡을 가파르게 끌고 간다

어휴, 무슨 산길이 낙엽으로 길을 지워놓는 걸까

바람이 나뭇가지를 들어 허공을 회초리 칠 때

왼발이 중심을 아찔, 엎지른다

호신용 내 등산 스틱이

다급하게 산을 깨운다

산등을 찌르려는 것은 아니었다

허둥지둥 공기를 찢고 낙엽을 흩으며

벼랑길로 도망치는 고라니 새끼

나는 저를 겨냥한 적 없는데

등이 슬픈 목숨이 뛴다

본능을 끌고 가는 시퍼런 맹렬

목숨을 튀기며 사라지는 발자국이다

저도 모르게 갈겼던 애인의 귀뺨처럼

달아나는 짐승의 내장 같은 공포

 

 


 

 

손현숙 시인 / 목련이 피었는데 죄나 지을까

 

 

하필이면 당신 방 창문 앞에

펑, 폭탄처럼 귀신처럼

허공을 말아 쥐는 나의 몰입

그것은 유혹이 아니라 발정이다

얌전하게 입술 다물어 발음하는

봄 따위, 난간 위를 걷는 고양이 걸음으로

한바탕 미치면 미치는 거다. 뭐

오늘이 세상 끝나는 날이다 몸을 열어

한순간에 숨통 끊어져라 하얗게 할퀴는

꽃, 곱게 미쳐서 맨발로 뛰어내리는데

모가지가 허공에 줄을 맨다

 

-시집 <일부의 사생활> 시인동네

 

 


 

 

손현숙 시인 / 바람의 족보

 

 

 그녀는 한 가지의 방법으로 온다 한 생이 하나의 내용이다 발목도 없으면서, 저승길에서 비 맞고 돌아온 창백한 불꽃이다 새의 혼돈이다 날숨으로 호흡하는 숨소리,

 

 파란 대문 집 종소리에 빗장도 지르지 못하는데 새는 죽음을 몰고 온다 유리창에 생명선이 긴 손금을 깊게 새겨 넣었지만 시작과 끝을 붙들고 사라지는 내일, 이미 지나간 시간의 장면들에 새점을 친다

 

 그것은 소리였다가 휘어지는 나무였다가 바다를 뒤집는 악의 힘이다 지붕을 삼키는 신들의 한 끼 식사, 도라지 보랏빛깔 속으로 걸어 들어가는 명랑한 속보,

 

 세상을 뿌리째 뽑는 오늘의 향연은 말없이도 숨통을 죄는 새의 점괘이다 그러나 누구나 잊고 가는 달의 반란, 시퍼렇게 숨 쉬는 아가미처럼 실컷 살다 간 바람의 족보, 찢어진 내용을 땅 위에서 읽는다

 

 


 

 

손현숙 시인 / 산사나무에는 붉은 귀신이 있다

 

 

 산사나무에 꽃이 피었다고 손가락을 치켜올리자 붉은 꽃잎이 떨어졌다 손바닥에 꽃잎을 받아내지 못했으므로 나는 그와 이별 중이다 끝과 끝이 닿아서 무슨 모양을 이룰 것인가, 겨울나무의 직립에 대하여 오래 생각한 적 이 있다 이별은 그 어느 부근쯤에서 왔지, 싶다

 

 과거로 돌아가는 빨간약을 삼킬까, 고민했던 흔적, 나는 거기서 살기나 살았었는지 별점을 치러 문을 나서다 말 고 전생을 지금 또 살고 있다는 생각, 너는 그때도 등을 보였고, 또 서성이면서 산사 꽃그늘 아래로 몸을 들인 다 새들이 자꾸 봄을 물고 와서 물방울 같은 무덤을 짓고 간다

 

- 시집 『멀어도 걷는 사람』 (리토피아포에지) 중에서

 

 


 

 

손현숙 시인 / 본문보다 긴 각주

 

침대에 모로 누워 수면내시경 한다

주사 바늘 꽂고 하나, 둘, 다음은 기억이 없다

셋은 허방에 든 완전 숫자

부전승으로 승리한 오픈 게임 같다

 

두 팔을 쭉 뻗어 가위 바위 보를 할 때도

삼 세 판을 넘어서기 어렵다

‘세 밤만 자면 엄마가 데리러 올게’

손톱이 뾰족한 이모 집에 맡겨졌던 날

약속은 새빨간 거짓말로 발이 저렸다

 

‘가을이 와서 아프다’로 써내려간

문간방 언니의 유서를 본 적 있다

과꽃의 둘레만큼이나 글씨는 흐려서

검지의 세 째 마디가 깊고 음하다

찬밥에 물 말아 삼켰을 밥알의 곤두박질은

산자의 생을 송두리째 흔든다

 

섰다판의 파투처럼 어지럽게

단잠을 잔 것인지, 죽음의 손아귀에 붙들렸던 것인지

간호사는 내 어깨를 노크처럼 두드린다

돌아오는 길을 놓친 나는 하나, 둘,

셋은 찾지 못해 헛발질이다

 

-계간 『시와 산문』 2024년 가을호 발표

 

 


 

 

손현숙 시인 / 열꽃이 피었다 진다

 

 소리가 귀에서 멀어지면서 고개 한번 들었을 뿐인데 꽃이 오고 또 꽃이 갔다 먼 생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던 것도 같고 모습 없는 모습이 스쳐간 것도 같다

 

 너에게 가는 길 참 멀고 험했어도 꽃 내 하나는 지천이어서 세상 속에서 소리가 사라진다는 건, 내 머리 위로 지나간 바람이 흔적을 지운다는 건,

 

 지금 나는 죽어서 생것의 말을 한다

 

 미안하다는 말도 못했는데, 눈 깜빡거릴 때마다 너는 왜 배경에서 짙어지고 내 죄는 먼 꽃잠 속에서도 수런거릴까, 어린 솔방울 하나가 가지에서 툭, 땅으로 떨어진다

 

 지금은 물까치가 새끼를 낳는 계절 허밍처럼 들려오던 소리의 세상이 사라진 지금 내 쇄골에서는 파랗게 열꽃이 피었다 진다

 

-계간 <예술가> 2024년 가을호 발표

 

 


 

 

손현숙 시인 / 블랙커피

 

 

 올해도 과꽃은 그냥, 피었어요 나는 배고프면 먹고 아프면 아이처럼 울어요 말할 때 한 자락씩 깔지 마세요 글쎄, 혹은 봐서, 라는 말 지겨워요 당신은 몸에 걸치는 슬립처럼 가벼워야 해요

 

 천둥과 번개의 길이 다르듯 짜장면과 짬뽕 사이에서 갈등하는 거 흙산에 들면 돌산이 그립고, 가슴의 A컵과 B컵은 천지차이죠 한 생에 딱 한목숨 몸뚱이 하나에 달랑 얼굴 하나, 해바라기는 장엄하기도 하죠

 

 비 갠 뒤 하늘은 말짱해요 당신이 나를 빙빙 돌 듯 지구 옆에는 화성, 그 옆에는 목성, 또 그 옆에는 토성 톱니바퀴처럼 서로 물고 물리면서 우리는 태양의 주위를 단순하게 돌아요

 

 당신, 돌겠어요?

 

 시간을 내 앞으로 쭉쭉 잡아당기다 보면 올해도 과꽃은 담담하게 질 것이고, 때로는 햇빛도 뒤집히면서 깨지기도 하지요

 

- 리토피아, 2009년 봄호 -

 

 


 

 

손현숙 시인 / 샤갈 마을 우체통

 

 

너도 없는 집에 너를 찾는 편지 한 통

쿵쿵 가슴이 뛰네

 

망설이고 망설이다 쓴 듯한

여자 친구의 깨알 같은 글씨

보고 싶다 하네

잊을 수 없다 하네

 

몇 달이 지나도록

오지 않는 너의 부재로

끝없이 이어지는 저녁

 

이것은 꿈이라고 지금도 되뇌이는데

심장이 멈추는 악몽은 깨어날 줄 몰라

길고 긴 하루가 지나가지 않아

 

샤갈이 꿈꾸던 마을

꿈길에서나 찾아가는 자유로운 그곳

하늘을 날면 네가 보일까

 

오늘도 편지 한 통 가슴에 품고

꿈길로 들어서서

샤갈마을 우체통을 찾네

 

 


 

손현숙 시인

1959년 서울에서 출생. 신구대학 사진과와 한국예술 신학대학 문창과 고려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 졸업. 문학박사. 1999년 《현대시학》에 시 <꽃들은 죽으려고 피어난다> 외 4편으로 등단. 시집 『너를 훔친다』 『손』. '국풍' 사진공모 수상, 토지문학제 '평사리문학상' 수상. 2002년 문예진흥기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