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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숙 시인 / 어머니
부엌 천정에 매달린 형광등 스위치를 당겨도 쉽게 스파크가 일지 않는다 빛이 다 빠져나가고 껍데기만 남아 깜박거린다 하얗던 몸속으로 검은 시간이 스민다
양 모서리가 캄캄해져 온다 긴 시간 나를 굽어보며 내 모퉁이를 환하게 비추던 한 생애가 속절없이 저물고 있다
문숙 시인 / 겨우살이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우리 집에 입양되어 왔다 낯선 품에 깃드느라 먹이를 토하고 집안에 오물을 묻히며 병든 날을 살고 있다 나도 아픈 강아지를 품느라 함께 몸살을 앓는다 먼 길을 돌아서 내게로 온 인연 병이 깊어 숨을 할딱이는 강아지를 안고 부처님 하느님을 분별없이 찾는다
거친 시간을 지나 강아지가 조금씩 죽음을 밀어내며 꼬리를 흔든다 시든 풀잎 같은 한 생명이 품속을 파고들며 내 숨소리에 기대어 잠이 든다 생명 하나가 겨울을 뚫고 내 영혼 깊숙이 발을 내렸다 허공같은 내 가슴팍에도 새둥지만 한 봄이 파랗게 얹혔다 종이 다른 것끼리 서로 가슴팍을 붙이고 지금 지구 종말 같은 겨울을 팔딱팔딱 살아내는 중이다
문숙 시인 / 수종사 부처
절 마당에 검은 바위처럼 엎드려 있다 한 자리에서 오전과 오후를 뒤집으며 논다 단풍객들이 몸을 스쳐도 피할 생각을 않는다 가면 가는가 오면 오는가 흔들림이 없다 산 아래 것들처럼 자신을 봐달라고 꼬리를 치거나 경계를 가르며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는다 생각을 접은 눈동자는 해를 따라 돌며 동으로 향했다 서로 향했다 보는 곳 없이 보고 있다 까만 눈동자를 따라 한 계절이 기침도 없이 지나간다 산 아래 세상은 마음 밖에 있어 목줄이 없어도 절집을 벗어날 생각을 않는다 매이지 않아 지금 이곳이 극락인 줄 안다 지대방을 청소하는 보살에게 개 이름을 물으니 무념이라고 한다
문숙 시인 / 산청곶감
스님과 함께 곶감을 먹는다 청도감이 말라서 조글조글하다 얼굴색은 환한 주홍빛이다 씨 없는 몸이라고 봄날에 꽃 피지 않았으랴 속을 가르니 황 설탕처럼 반짝거린다 감추며 삭혀온 저 마음 빛깔 바람경전을 읽으며 일생 몸 닫고 마음 열고 산 세월이 고스란히 익어 달디 단 감로법이 되고 있다 애시 당초 씨마저 버린 감의 무게가 한없이 가볍다 걸림 없이 한입 곶감으로 마무리 되는 삶이다 예불 올리는 스님 뒷모습이 춤사위처럼 가뿐하다
문숙 시인 / 울돌목
둘이 합쳐지는 곳엔 언제나 거친 물살과 울음이 있다 서해와 남해가 만나 수위를 맞추느라 위층이 시끄럽다 늦은 밤 쿵쿵 발자국 소리와 새댁의 흐느낌이 들려온다 한쪽이 한쪽을 보듬는 일이 아프다고 난리다 마음 섞는 일이 전쟁이다 우루루 우루루 가슴 밑바닥으로 바위 구르는 소리를 토해낸다 돌덩이들이 가슴에 박혀 암초가 되어가는 시간이다 수면을 편편하게 하는 일 부드러운 물길만이 아니어서 부딪혀 조각난 것들 가라앉히는 시간만큼 탁하고 시끄럽다 저 지루한 싸움은 서로에게 깊이 빠져 익사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문숙 시인 / 장마철을 나는 법
"얘야, 잘 여문 곡식도 장마철엔 벌레 슨다 바깥 공기 들지 않도록 잘 묶어라 차고 서늘한 곳에 두는 것도 잊지 말고 자칫 구멍 나면 다 버려야 한다"
어머니는 오늘도 전화로 나를 보관하는 법 조용히 일러주신다 귀 닫고 입 닫고 제 숨통 틀어막고 버티는 일이 온전하게 잘 사는 것이라고 숨이 막히고 가슴이 끓어도 어머니가 계시는 한 나는 내 삶의 봉지를 구멍 낼 수 없다
문숙 시인 / 인연
내 치맛자락에 묻어와서 운다 잘못 든 길이라고 운다 고층아파트 목욕탕에 숨어서 운다 낯설다고 운다 혼자라고 운다 무섭다고 운다 속았다고 운다 잘못된 만남이라고 운다 옛 인연이 그립다고 운다 제 발등 제가 찍었다고 운다 가을이 다 간다고 운다 자신을 버릴 수 없다고 운다 희망이 절망이라고 운다 제 마음 알아달라고 운다 끝없이 시를 쓰며 운다 내가 운다 귀뚤귀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10월호 발표
문숙 시인 / 전우애
수일 간 부엌을 떠났다 돌아와서 보니 조리대에 걸려있는 국자가 심하게 낡아 보인다 단단하게만 보이던 저것도 별수 없이 나와 함께 나이를 먹고 있었구나 신혼살림에서 시작해 수십 년 함께하며 세상의 쓴맛 매운맛 짠맛 다 보며 살았다 태어나서 엄마의 손을 잡고 산 날보다 저것을 붙들고 산 날이 더 길다 때로는 쉬이 뜨거워지는 저것 때문에 자주 영혼을 데이며 동지가 적이 되는 시간을 살기도 했다
등 돌리고 싶은 마음을 눌러 앉히는 동안 아이들은 무사히 잘 자라 어른이 되었고 그동안 너도 별난 내 입맛 때문에 마음을 긁히며 살았으리란 생각에 뒤통수가 가렵다 너무 가까워서 제대로 볼 수 없었던 존재 식구들을 위해 오래도록 뜨거운 세상과 맞서느라 반짝거림이 사라진 모습에 짠함이 앞선다 이리저리 흠이 많아도 이 나이엔 새것보다는 오래도록 손에 익은 저것이 백번 낫지 또다시 내일을 살며 동지가 적으로 보일 때는 약간 떨어져서 바라보기도 하면서
-계간 『문학과 창작』 2022년 가을호 발표
문숙 시인 / 여자의 온도
거북이알은 25.7도 이하면 수컷이 되고 그 이상이면 암컷이 된다고 한다 생명을 품어야 하는 것들은 따뜻함이 바탕이라서 남녀 온도 차가 존재하는 이유일 것이다 제 새끼를 버렸다거나 학대했다는 뉴스가 이어진다 처음부터 어미 되기를 내던지는 경우도 늘고 있다 새끼 때문에 어둠을 견딘다는 여자도 드물어졌다 지금 여자의 온도가 빠르게 식어가는 중이다 세상 남자들은 페미를 향해 뿔만 세울 때가 아니다 무조건 여자를 따뜻이 보듬어줘야 한다 인류의 멸망이 여자 온도에 달렸기 때문이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2년 3ㅡ4월호 발표
문숙 시인 / 껍질의 내력
내려오다 굳은살이 박였다 평지에서는 적당히 맞았던 신발이 내리막길에선 헐렁해졌다 기울어져봐야 틈을 알 수 있다
몸을 세우려다 쓸리고 쓸려 짓무르기를 반복했다 내 것이 아님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굳은살의 시작은 상처다 여린 것들은 이렇게 껍질을 입는다
이젠 내 껍질에 내가 찔려 아프다 방패가 나를 향한 무기가 되고 있다 너를 신고 너무 오래 버틴 탓이다 이제 와서야 부처의 맨발을 생각한다
-격월간 『현대시학』 2022년 3월~4월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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