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종미 시인 / 우리는 바둑처럼
우리는 흰 돌과 검은 돌을 들고 마주보며 앉았지 게임을 즐긴다는 것이 우리의 명분이었으나 누가 누구를 따먹느냐가 진실 아니겠어 하나가 죽어 나자빠질 때까지 세상은 어이없이 아름다운 끝없이 이어지는 교차로 아찔한 킬힐을 신고 또각또각 내 곁으로 다가오는 네 모습 또한 숨이 멎도록 아름답다 나는 무모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안다
향기란 얼마나 깊이 흩날리는지 현관에 내걸린 내 머리통이 한없이 어지러웠다
악셀레이트를 최고로 밟고 이 길을 질주하라고 기어이 최면의 봄이 왔다
나는 죽는 것이 두렵다 나는 죽지 않는 것이 두렵다
부러진 손가락들이 떠도는 세상으로 목련처럼 무너지는 가슴을 벚꽃 잎 하르르 뛰어들며 받아낸다
네가 착해서 나는 화가 난다
김종미 시인 / 사회생활
나를 빤히 쳐다보는 검은 돌 하나를 주워 가만히 만져본다 이름이 뭐니 몇 살이니, 만지고 만졌더니 아빠라고 부른다
나는 농담과 사귀고 있어 농담은 짧은 치마를 입고 가볍고 날카롭지
속도위반을 사랑하고 가죽 재질을 선호하고 절정의 기분에서 커버를 즐기는 그녀가 내 옆구리에 살고 있어
뱉으면 그만이라지만 삼킬 수도 없는 것을 입 안에 넣어주는구나
이내 달지도 않고 끝내 쓰지도 않다면 이때의 불안은 꽤 규칙적이야
정말 내가 낳았을까 이 검은 돌 이토록 보잘 것 없고 이토록 어여쁜
호탕하게 웃으며 깊이 빠져드는 우수 맥주병을 깨니 거품이 사라졌어 다시 주워 담을 수 없는쩡한 상태로 빨갛게 취하는 말
잠이 들면 무생물이 될 거야
김종미 시인 / 생선 요리가 있는 디너
물고기 눈을 감기고 나도 가끔씩 눈을 감으며 생선을 먹는다
눈알부터 파먹는 것은 물고기에 대한 나의 배려이다
섹스 할 때 불을 끄듯
벌거벗고 누워있는 너의 쾌락을 극치로 끌고 가고 싶기 때문이다
아니다 내가 극치로 끌려가고 싶기 때문이다
오늘도 같은 자세 같은 방법
삶과 죽음 두 가닥 젓가락이 우리 사이를 오간다
부드러운 살점을 삼키다가 잘못하여 그만 가시를 삼킨다
고통과 쾌락은 극치에서 표정이 닮는다
오늘은 다른 자세 다른 방법
김종미 시인 / 스켄달
옆 테이블에서 두 남자가 목소리를 죽이고 얘기를 한다 이야기는 토막토막 끊어져 들리다가 제법 길게 한 문장이 들려오기도 한다 아, 그것은 내 얘기다 얘기의 흐름으로 보아 누군가 내 똥구멍을 핥았다는 얘기다 더욱 은밀해진 목소리로 한 남자는 등을 돌리고 앉아있고 또 한 남자는 모자를 깊이 눌러쓰고 있다 내 몸은 옆 테이블로 바짝 기운다 두 귀는 떼어서 옆 테이블로 던져버렸다 니네들 누구야 모자를 벗어 목소리를 높여 봐 제대로 말해보란 말이야 내 귀는 날아가다 말고 돌아온다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똥은 냄새를 풍겼고 똥은 주인을 닮지 않았는데
김종미 시인 / 엘리베이터 속 유령
마주보고 있는 거울 속에 내 죄가 비치지 않는다고 안심할 수 없다 내 죄는 내가 안다는 무서운 암시일까 저렇게 많은 내가 나를 보고 있다니 저렇게 많은 내가 내 뒤통수를 보고 있다니 나에게 내가 철저히 감시당하는 무덤 여기서 필요한 것은 운명을 확정하는 숫자와 단 한 개의 손가락 23층을 초고속으로 이동하는 동안 다만 두려운 것은 내 손가락 하나의 안부 15층에서 알 수 없는 손가락 하나가 동승하고 서로의 손가락이 서로를 경계하기 시작할 때 셀 수 없이 많은 뒤통수들은 두 배로 불어나 벌써 통정을 마쳤나보다 하강하는 속도가 멈출 때 우리는 보다 무거워지고 무거워진 직후 재빨리 가벼워져서 한 개의 손가락 같은 것은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무덤 속을 들락거리며 죄의 무게가 무거워지거나 가벼워지니 아마도 나는 발밑이 허한 유령인지도 모르겠다 죽는 것이 정말 사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뭐, 좀, 잡아서 먹어야겠다
김종미 시인 / 질투
도로 위에서 먹이를 찾는 비둘기에게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질주 할 때 유리창 앞을 아슬아슬하게 날아오르는 작은 그것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다가 우리는 둘 다 살아서 결과는 무승부였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진 것이다
나는 오래 너를 기억할 것이고 너는 즉시 나를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것에 대해 질투를 느끼는 하루다 나를 향해 정면으로 질주해 오는 시시비비 멱살을 잡히기 직전 냉큼 그들 지붕 위의 구름이 되고 싶다 그리고 망각 벽에 부딪치는 것은 상당히 로맨틱한 일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어떤 탈주의 은밀한 행로를 느끼면서
우리는 들려줘야할 무엇을 기억하는가
김종미 시인 / 꽃은 언제나 진다
나를 항복시키려고 꽃이 핀다 어떠한 권력도 어떠한 폭력도 이와 같은 얼굴을 가질 수 없어 며느리밑씻개란 어처구니없는 이름의 꽃도 내 앞에 권총을 빼들었다 총알을 장전한 꽃 앞에 이끌려 나오지 않으려고 이중 삼중 문을 닫고 커튼까지 쳤으나 몽유에 든 듯 여기가 어딘가 깨어보면 꽃에 코를 처박고 있거나 눈동자에 그득 꽃잎을 쑤셔 박고 있다 나는 이미 수형에 든 것이다 네가 꽃인 것이 죄인지 내가 사람인 것이 죄인지 쏟아진 물처럼 살아있는 것은 다 스며야한다 이 지독한 음해의 향기에 수갑 채여 꽃비 촘촘한 창살 속 애벌레처럼 둥글게 몸을 말아 바치며 나는 너를 이길 수 없어 완전히 내가졌다고 생각할 때 꽃이 졌다 나를 항복시켰으면 너는 잘 나가야지 꽃은 언제나 져서 나를 억울하게 한다
|
'◇ 시인과 시(현대)' 카테고리의 다른 글
| 이만섭 시인 / 파적도(破寂圖)를 보다 외 6편 (0) | 2025.10.23 |
|---|---|
| 최준 시인 / 베껴 쓰는 습관 외 6편 (0) | 2025.10.23 |
| 하상만 시인 / 자벌레구멍 외 10편 (0) | 2025.10.23 |
| 김재혁 시인 / 시와 누드 외 6편 (0) | 2025.10.23 |
| 김수정 시인 / 기나긴 여름을 보내며 외 7편 (0) | 2025.10.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