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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김수정 시인 / 기나긴 여름을 보내며 외 7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3.
김수정 시인 / 기나긴 여름을 보내며

김수정 시인 / 기나긴 여름을 보내며

 

 

한바탕 소나기가 지나갔다

땅 내음이 흠뻑 올라오는 순간이다

 

한여름을 뜨겁게 달구던 태양도

쏟아지는 빗줄기에 잠시 쉬어간다

 

이글거리던 수많은 날

목마름에 까맣게

애를 태우던 산천초목들도

한숨 돌릴 수 있음에

힐링하는 시간이다

 

어느새 귓전에 바람이 깊어지고

가슴엔 가을이 와 있음이다

 

가슴은 허공을 맴돌고

무성하게 깔아놓았던

열정의 날들 위에

초연히 섰다.

 

 


 

 

김수정 시인 / 부디

 

 

부디 우리가 슬프기를

아주 조금만 슬프기를

비 온 날 연잎처럼 슬퍼서

금세 비워내고 다시 일어서길

 

부디 우리가 아프기를

아주 조금만 아프기를

늘 푸른 동백처럼 아파서

새잎 돋아나고 더욱 반짝이길

 

우 우

 

부디 우리가 외롭기를

아주 뜨겁게 외롭기를

산기슭 꽃무릇처럼 외로워서

선연히 붉은 노래로 피어나길

 

부디 우리가 외롭기를

아주 뜨겁게 외롭기를

산기슭 꽃무릇처럼 외로워서

선연히 붉은 노래로 피어나길

 

 


 

 

김수정 시인 / 어떤 포란

 

 

고향을 잊었다. 나처럼

날개 다친 그를 만났다.

나는 오른쪽, 그도 오른쪽

비익조比翼鳥가 될 수 없어

한 쪽 날개마저 잊었다.

몽골에서 보낸 누런 엽서가

서울 하늘을 떠돌다

편서풍에 실려 반송되었다.

가끔씩은 내 시선이 철망을 빠져나가

서쪽으로 날아가는지

상처투성이의 그가 물어다 준

나뭇가지, 여기가 고향이다.

 

둥근 알을 품는다.

사람들이 돌멩이라 이름 지은,

먼 훗날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바람을 타고 날아다닐

새의 후예

 

따끈해진 돌멩이, 꿈틀거린다.

 

-계간 『시인플러스』 2012년 봄호 발표

 

 


 

 

김수정 시인 / 아리바다

 

4천 킬로미터를 헤엄쳐

암컷 바다거북들이 돌아오면

코스타리카 오스티오날 해변은

수백 개의 모래 구덩이를 낳는다.

그물과 비닐에서 살아 돌아온 바다거북이

온몸의 소금기로 빚은 끈적한 눈물과

거친 숨소리를 밀어 넣는

구덩이

어미들의 신음으로 달이 기운다.

가쁜 숨을 내쉬는 바다거북 옆에서

거북알 칵테일을 마시는 사람들,

입가에 노른자를 흘리는 이구아나와

까만 대머리독수리들이 벌이는

뜨거운 모래판의 축제

알을 뺏긴 어미들이 떠나고

암컷만 품는 모래* 둥지에서

60일 만에 깨어난 새끼 거북들,

눈도 뜨지 못한 채

바다로 간다.

나자마자 죽을힘으로 간다.

*바다거북은 온도에 의해 성별이 결정되는데, 29.7도를 넘는 환경에서는 암컷이 된다.

 

 


 

 

김수정 시인 / 꽃다발 묶는 것처럼

 

 

너무 느슨하지 않게

너무 조이지도 말게

새 한 마리 손안에 쥐었다 하자

내 삶에 꽃같은 사람을 만날 때

그 인연과 오래오래 나를 묶고 싶을 때

 

 


 

 

김수정 시인 / 애가

 

 

당신의 우산이 우리의 첫 시집이다

벚꽃비 날리는 호숫가

비에 젖은 연분홍 꽃잎들의 단칸방이다

 

매일 떠나고 매일 돌아오는 당신과 나의

 

까치발 작은 창이 밤하늘을 읽던 집

빗방울이 동당동당 피아노를 치던 집

버드나무의 노래가 강물 따라 흐르던 집

새들의 하늘을 빌려 허공에 지은 집

 

우리 것이 아니지만 우리만의 것이었던

많은 거처들....

 

어느 날 내가 먼저 우주로 날아가면

당신은 나를 찾아 어느 집을 헤맬까?

주소를 알려주지 않아도 당신이 찾아와

캄캄한 방 밝혀두고 기다리고 있을까?

 

 


 

 

김수정 시인 / 아스피린

 

 

둘러보니 썩은 서어나무 속이다

내가 잎이었는지, 잎의 언저리에 피는 헛꿈이었는지

불우한 생각이 각설탕 태우는 냄새 같은

 

기억 같은 건 믿지 말라, 그 말을 새가 물고 있는 동안 네가 내 안에 멈추어 있었는지, 비어 있었는지 있다가 사라져버린 것이 나에게 묻는

 

눈발이 내리는 날

서어나무 발자국은 길 가운데 멈추고, 서쪽 뿌리에서 어떤 처연한 결기가 걸어나온다

 

수첩에 적어 둔 계절은 느리게도 오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네가 내 안에서 눈에 덮여 있는 저녁은 갈까마귀 목덜미 빛이다

 

아침에 먹는 아스피린으로 내 피는 멈추지 않는다

그렇게 흘러 너에게 가다보면 나는 조막만 해진 밀랍인형이 될 것이다

결국, 이란 허공의 말이 천천히 지혈되고 있었다

 

 


 

 

김수정 시인 / 미역국을 끓이며

 

 

방문 잠그는 날이 많아졌다

너는 갯바위처럼 웅크려있고

미역귀만큼 오글쪼글 접힌 말들이

문턱 앞에 툭 툭 던져져있다

 

문지방이 갈라놓은 저편에서, 너는

무슨 꿈을 꾸느냐

 

시원의 바다를 헤매고 있느냐

너를 낳고 가끔씩, 앨버트로스처럼

날고 싶어 퍼덕일 때 있었다 그때마다

신열로 축축 늘어져 내 발목을 휘감던

 

너의 열일곱 번째 생일상을 차린다

나를 키워준 바다를 향해

바락바락 대들던 내 열일곱에도

뜨끈한 미역국은 놓여있었다

 

무겁게 드리운 커튼을 열자

이마로 쏟아지는 햇살,

오랫동안 말라있던 기억을 불려

돌미역 같은 아침을 주물러 씻는다

 

 


 

김수정 시인

1969년 대구에서 출생. 경북대 사범대학 지리교육과 졸업. 경북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2011년 《21세기문학》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언 땅의 꽃씨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