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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도 시인 / 뇌 먹는 아메바
확대 현미경에 나타난 모습이 꼭 메기 같네 뱀의 혀를 날름거리며 물에서 서식하다가 물놀이하는 소녀의 코로 들어가 단숨에 뇌를 갉아먹었다니
감염 치사율이 십억 분의 일이라고 익사에 비하면 희박한 확률이라고 방심하는 사이 그런 흉측한 미물까지 창조되는 저의에 몸서리친다 유인원의 두개골을 따고 숟가락으로 뇌를 파먹는 잔인한 종에게 내리는 천벌이다
혹이라도 당신의 뇌가 그 아메바에게 파먹히지 않으려면 수상한 공장 폐수나 짐승의 뇌를 파먹은 배설물로 오염된 하천에서 멱을 감지 말라 멱을 감으려거든, 그런 오염을 방관하지 말라
정원도 시인 / 마부의 길
금호강물도 잠에 빠진 이른 새벽 젊은 마부들 떼 지어 말안장을 채우고 구유를 챙기면
내딛는 말발굽 소리들이 곤히 잠든 신작로를 깨웠다
동터오는 반야월역* 인적 없는 적막을 딛고 긴 그림자 끌며 이랴! 서둘러 고삐를 낚아채면 힝힝대는 말울음과 경쾌한 말발굽 소리가 윤슬처럼 강물 위로 여울졌다
-시집 <마부>에서
정원도 시인 / 마부 군소리가 담을 넘었네
심심한 콧김에, 휘두르던 말총 피해 말 귀나 매만지던 사이 여물 씹던 말과 소년의 누런 이빨이 마구간 거미줄 거쳐 온 햇살에 반짝였네
말구유에 떨어진 잔별처럼 허기나 삼키다가 귓불 부어진 말 타고 죽은 엄마 찾아 헤매다 돌아온 밤이면 요령 소리 다그치는 마부 군소리가 그믐달보다 먼저 담을 넘었네
정원도 시인 / 야간 정비복
후줄근한 야간작업에 축 늘어져 달조차 반쪽이 된 얼굴로 중천을 넘는 밤
속눈썹에, 콧구멍까지 흙먼지 기름때로 스컹크가 된 정비복에 사타구니에 모래가 서걱대도 기계 뒤편에 쪼그리고 앉은 고들빼기들도 온몸에 쓰디쓴 노랑물이 들었을까
불량 채권자 같은 야음에 때 찌든 정비복이 포위당해도 좋아 나는 끝끝내 우울할 틈조차 없이 기계와 한 몸이 되어 얼싸안고 뒹굴어야 했네
정원도 시인 / 물은 언제나 수평을 지향한다
기계 수평 검사를 하다 보면 알게 된다
물은 언제나 수평을 지향한다는 것을 여기 바닥에서 저기 높이까지 거리가 아무리 멀거나 굽이굽이 꺾여져 있어도 물은 어김없이 수평을 지향한다
투명 호스의 물이 통로를 따라 움직이며 호스가 높아지면 저를 낮추고 호스가 낮아지면 저를 높여 서로의 가슴 높이를 맞추려 한다
파도가 뭍으로 뭍으로만 밀려드는 짓도 먼바다에서 가장자리로 됫박을 쓸듯 가차 없이 수평을 맞추려는 짓도
불멸을 터득한 종(種)들의 팔만대장경이다
정원도 시인 / 초승에서 그믐까지
달도 차면 기운다는 말 어둠 이슥한 초승에서 그믐까지
무소의 뿔처럼 어둠 뚫고 나아가느라 제 몸이 오른편에서 왼편으로 먹히는 줄도 몰랐지 밤 깊어 적막하면 그믐달이 어둠 보듬느라 제 몸이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먹히는 줄도 몰랐지
차고 기우는 달이 서산에서 기꺼이 제 몸을 내어주는 까닭 우리도 아프게 저리 내어주며 살라는 거지 곡절 많은 슬픔 크게 함께 울어주라는 거지
정원도 시인 / 목울대 걸리는 울음 하나씩
까치는 식전 아침부터 잘 익은 감 주렁주렁 달라붙은 감나무 가지 끝에서 울고
난데없이 날아온 까마귀는 뚜껑 닫힌 음식물 쓰레기통 앞에서 우는데
힘겹게 철야정비를 마친 기계 옆에서 초조하게 추위에 떨며 소름 돋는 내 속울음이 닮았네
저 울음들 간절한 기도라는 것 알고 난 후부터 까치와 까마귀와 나는 목울대에 걸리는 울음 하나씩 속으로 키우며 사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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