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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최진엽 시인 / 우울함에 대하여 외 6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2.
최진엽 시인 / 우울함에 대하여

최진엽 시인 / 우울함에 대하여

 

 

등을 뚫고 나온 지느러미가

왼쪽으로 기울게 해요.

하루에도 몇 번씩 신발을 바꿔 신었어요.

대답 대신 벽이거나 그늘이군요.

모호함에서는 울음 냄새가 나요.

내가 부푼 골판지에 대하여 이야기한 적이 있나요?

흰긴수염고래가 돌아온다면

잠든 시간은

오늘보다 길지 않을 거예요.

둥글게 그려진 것들은

깨지지 않아요.

날이 어두워지면 코르크 마개를 열고

이제야 도착한 멍청한 별빛을 넣어야 해요.

우울해서 미안하다고요?

개미는 더듬이가 없어도 우울하지 않아요.

나에 관한 우울함에 대하여

우울해서 미안해요.

 

 


 

 

최진엽 시인 / 공항

 

 

기울어진 그림자에는

진주 목걸이를 채울 것

 

4시 방향에 있는

달팽이관을 따라

최대한 늦게 돌아올 것

 

목이 긴 병과

말문 닫힌 컵 사이에서는

낮은‘시’음을 누를 것

 

아홉 개의 시계 중

두 개는

파란색으로 칠할 것

 

그믐달이 던진

소식은

전하지 말 것

 

A구역

네 번째 의자에 앉아

지나온 발자국을 지울 것

 

흩어진 다섯 개의

진주 알은

익숙한 전광판에

꿰지 말 것

 

계단을

오르다

엘리베이터

6층 버튼을 누르지 말 것

 

갈 수 있는 한

멀리

떠날 것.

 

 


 

 

최진엽 시인 / 눈 먼 남자의 식사

 

 

수탉은 예전에도 있었어요

그림자에는 소리가 있어요

풀 위에 신문지 깔고 오줌 누던 아이는

조심스레 속곳을 올렸는데

절벽은 종일 흐리다 내내 맑음

푸른 옷에 기어가는 것은 거미 맞지요

왼손은 왼쪽만 더듬거리는데

빵은 약간 시든 채로 빵일 뿐

열 명의 신들처럼

무엇으로나 의식을 행해야 했으니까요

눈이 멀어야 황금방울새가 노래해요

일단 이름들을 끊어요

소금밭에 푸른 치마를 입혀요

짐짓 속아보는 손은

끝내 목 좁은 물병만 기억해요

 

 


 

 

최진엽 시인 / 노을

 

 

텅빈 바다를

마당비로 쓴다는

작은 절집에 앉아

말없이 지는 해를

바라보다가

 

고운 노을빛

잠시 머문

그대 손 등에

내손가만

머물고 싶은데

 

갯벌마당 끝에서 불어오는

저녁 바람에

 

그만,

 

붉게 물든 하늘만

바라봅니다.

 

 


 

 

최진엽 시인 / 인디언 썸머

 

 

왜 함께 떠날 수 있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아.

 

채송화를 좋아하고

커피에 설탕 두 스푼을 넣는다는 것도

그제야 알았어.

 

가까이서 숨소리를 들었을 때

두 번째 소원을 지웠어.

진저리 치는 그림자로

모든 것을 지울 수 있었지.

 

밤새 강둑에 물이 넘쳐

모두 떠내려갔는데

늘 무심한 표정으로

계절은 나에게 오고 있어.

 

보낸 편지를 아직도 읽고 있다는데

믿을 수 있겠니?

 

-<젊은시인들 / 2015년 9월>

 

 


 

 

최진엽 시인 / 몰도바

 

 

오후 3시에 떠나는 기차는

모두 몰도바행입니다.

숨겨진 남자와

일곱 개의 영혼을 가진 여자도

여우 탈을 씁니다.

그 곳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 어떤 일도

지루합니다.

볼 수 있는 것은

엉켜있는 푸른 혈관들뿐

멈추는 간이역마다

담쟁이 휘감긴 벽입니다.

깊은 우물에서는

탬버린 소리가 납니다.

두 번은 여리게

세 번은 느리게

느슨하게 푸는 것도

당겨 연줄이 끊어지는 것도

나와는 전혀 상관없습니다.

그대의 심장근육을

초록뱀이 먹는 중이니까요

은밀한 침묵은

길고 노란 구실일 뿐

기차에서 내리는

달큰 날큰한 그녀

 

쉿!

몰도바에서는

눈은 닫고 입술만 열어야 해요

 

 


 

 

최진엽 시인 / 공을 쫓는 아이

 

 

공을 따라 운동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하얀 린넨 치마를 입은 채

아이는 그림자의 주인이지만

물론 일부는 그림자가 주인이기도 합니다

이제 막 잠든 비둘기 허파가 자꾸 커집니다

장미는 오늘도 통화중

아이는 세상에서 가장 큰 빗자루입니다

 

바람 소리는 너무 일찍 태어나고

어떤 것은 멀리서 죽었고

어떤 것은 죽어서 멀어졌습니다.

그늘은 청결한 가설

나무는 소리를 내어 웃습니다.

 

잘 마른 모자에서 매미 소리가 그치고

펄럭이는 치마가 그림자에 멈출 때

한 발을 내딛어

공중으로

뛰어 오르는 순간

 

 


 

최진엽 시인

전남 목포 출생. 광주교육대학, 숭실대학교 교육대학원 졸업. 2004<문예한국>수필 , 2007<대구신문>, 2014년 《포엠포엠》에 작품을 발표하며 작품활동. 단대초교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