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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말선 시인 / 내세울만한 얼굴
내세울만한 얼굴을 가지고 식이 진행되고 있다 내세울 수 있는 의견도 없이 이미 식장의 앞줄을 장식하고 있다 급하게 얼굴만 끌어 모아오느라 나머지는 포장지로 장식했다
급하게 얼굴만 끌려오지 않으려고 내세우고 싶은 얼굴들은 오지 않았다 리본을 달아주는 안내원의 당부대로 내세울만한 얼굴들은 근사한 포장품처럼 앉아있다 딱 한 시간만 견딜 수 있도록 뒷목에 링거를 주입하고 있는 얼굴 웃는 얼굴이 미워서 입을 꼭 다문 얼굴 마냥 웃기만 하도록 부탁받은 얼굴은 곧 얼굴이 뭉개질 것 같다 안내원이 안내한 좌석에 앉자마자 내세울만한 얼굴들은 내세운 얼굴이 된다
조말선 시인 / 고향
벗어놓은 외투가 고향처럼 떨어져 있다 내가 빠져나간 이후에 그것은 고향이 되었다 오늘 껴입은 외투와 나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하면 한 번 이상 내가 포근하게 안긴 적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비로소 벗어놓은 외투를 찬찬히 살펴보는 것이다 내가 빠져나가자 그것은 공간이 되었다 후줄근한 중고품 더 이상 그 속에 있지 않은 사람의 언어
조말선 시인 /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피가 번질까 봐 테두리를 그렸다 바닥으로 떨어질까 봐 바닥으로 내려놓았다 너를 만들고 보니 더 외로워졌다 매달리면 추락을 염려했다 장미는 나와 같이 피지 않았다 맨드라미는 혼자 흘러내리고 있었다 재스민 향기는 어두운 두 개의 콧구멍을 지나서 탄생했다 테두리를 그리자마자 지울 궁리를 했다 입구를 원하는 자가 생기자 출구를 원하는 자가 생겼다 남겨둔 부분에 대한 연구는 성과가 컸지만 남겨진 부분이 계속 나타났다 손가락이 사라지도록 장갑을 꼈다
얼굴이 지워지도록 모자를 썼다 삭제키를 눌러서 모두 지웠다 강물은 어둠 속에서도 바닥이었다 노을은 너무 멀어서 계속 남겨졌다 문을 열었지만 문 안에 있거나 문밖에 있었다 늪에 다다랐지만 전망대에서 조금도 나아가지지 않았다
조말선 시인 / 외지인
외지인은 터미널이 가까운 곳에서 비처럼 내리거나 내리지 않았다 외지인은 빗물이 고여 있는 버스 승강장에서 현지인의 장화를 신거나 신지 않았다 먼지를 덮은 식탁에서 밥을 먹기 위해 전에 갔던 그 집을 찾거나 찾지 않았다 한 집 옆에 한 집이 있어서 그 집이 보이거나 보이지 않았다 한 집은 집 앞까지 나와서 하던 일을 멈추고 화환처럼 외지인을 뚫어지게 외면하거나 외면하지 않았다 한 집은 입구에서 계속 들어 오시라고 해서 외지인을 모르거나 모르고 있었다 검은 뿔테 안경을 고쳐 쓰고 찾아보았지만 그 집은 안경 안으로 들어오거나 들어오지 않았다 아무래도 안경을 바꿔 쓰고 왔다고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았다 한 집은 셋이서 입구에 앉아 오래된 갑각류의 껍질에 솔질을 하면서 최선을 다해 외지인의 기억을 꺼내거나 꺼내지 않았다 한 집은 구조가 달라서 바꾼다 해도 소용이 있거나 소용이 없었다 외지인은 현지인의 형식과 달라서 꽃병의 꽃처럼 눈에 띄게 색깔이 희미하거나 희미하지 않았다 외지인은 아무래도 시들어 버리기 전에 한 집으로 걸어 들어가거나 걸어 들어가지 않았다 한 집은 입구에서 계속 들어오시라고 해서 안에서 벌어지는 일은 그 집의 일이라고 생각하거나 생각하지 않았다 한 집은 최선을 다해 어렴풋한 표정으로 그 집을 모방하거나 모방하지 않았다 한 집은 한 집과 비슷하거나 비슷하지 않았다 한 집 옆에 한 집이 계속 있어서 그 집은 찾을 수 없었으므로 그 집은 먼지가 가득 쌓이거나 쌓이지 않았다 외지인은 얇은 종이를 씌운 식탁 위에서 여기, 그 집 일인분이요 하고 주문을 하거나 주문하지 않았다 한 집은 그 집을 한 집처럼 차리거나 차리지 않았다.
조말선 시인 / 아버지는 종묘상에 가셨네
아버지는 종묘상에 가셨네 동생들을 사러 가셨네 아버지는 자식 욕심이 많다네 혈기왕성하다네 어머니의 배는 비닐하우스처럼 불룩하였네 나는 동생들을 업고 걸리고 하루종일 마을을 배회하네 정관수술을 받은 아버지 정자은행에 가셨네 일년 내내 씨를 뿌리시는 아버지 어머니는 일년 내내 만삭이라네 종묘상인은 마침내 다수확 품종을 구해오네 종묘상 미닫이를 밀 때마다 아버지는 발기한다네
조말선 시인 / 행렬
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긴 행렬이 있다 나는 암탉을 키우지 않는다 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순행하는 자연이 있다 암탉이 밀어낸 알들의 차례가 있다 어제의 달걀판은 오늘의 달걀판을 받든다 총상꽃차례의 꽃대에서 어제의 꽃송이가 오늘의 꽃송이를 받든다 보이지 않게 세계는 부패하고 있다 믿음을 잃지 않기 위하여 암탉 한 마리와 나 사이에 긴 행렬이 있다 마침내 내게 당도한 꽃다발이 안심하고 냄새를 피우고 있다
-『서울경제/시로 여는 수요일』2023.08.02. -
조말선 시인 / 앞치마를 두르고
앞치마를 두르고 시를 쓴다 앞치마를 두르고 독서를 한다 전문가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앞치마를 두른 생선장수 앞치마를 두른 생닭장수 앞치마를 두른 화가 앞치마를 두른 엄마 앞치마를 두르면 피를 튀긴다 피 튀기게 열중이다 앞치마를 두르면 함부로 버젓이 칼을 휘두른다 앞치마를 두르고 하는 짓은 앞치마가 다 받아준다 피를 보고야 말 사람들은 앞치마를 두른다 살아 있는 것을 죽이고 죽어 있는 것을 또 죽이고 죽어서 살아가는 전문가의 작품들 전문가용 앞치마는 뒤가 트여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간혹 눈요기용 프릴이 있다 전문가용 앞치마는 팽개치기 간편하다 피가 잔뜩 묻은 앞치마 오물이 깊이 있게 얼룩진 앞치마 앞치마를 벗으면 시는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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