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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홍 시인 / 카지노는 언제나 이긴다*
카드놀이 한판 신나게 즐기다 간다는 시인도 주사위는 탁자 위로 떨어진다거나 혹은神의 놀이와 분리되지 않는다는 철학자도
끓어오르는 욕망의 돌발적인 분출을 돌아가는 숫자판의 순간적인 정지를 총알이 격발되는 불특정의 시점을
지독한 슬픔이 있어 너무나 이기적인 빈틈없는 죽음이 있어 너무나 인간적인
이승과 저승의 차원이거나 지옥과 천당의 윤리거나 현세와 내세의 윤회거나
생은 비천하지도 고귀하지도 않으며** 모든 놀이에는 빈 칸이 있다는 사실을 즐긴다기보다 누린다기보다
욕망의 일상성과 죽음의 항상성과 카드놀이와 주사위 던지기로 흘러가는 것들
시인에게는 자유의 마비를 철학자에게는 사유의 마비를
그러나 또한 흘러가는 것들
*루이 페르디낭 셀린(Louis Ferdinand Céline, 1894-1961),질 들뢰즈, 『앙띠 오이디푸스』 (최명관 역),민음사, 1997, p.492.에서 재인용. **졸시「神이 오지 않는 길목 돌뼈가 되었다」,『주름,펼치는』, 문학수첩, 2017,
김재홍 시인 / 그의, 행장
어제와 다른 오늘을 버스와 버스를 탄 사람이 달려가는 오늘을 열차와 열차를 탄 사람이 달려가는 오늘을 오늘과 다른 내일을 허공의 절벽 혹은 높은 거대한 흐르는 기둥 같은 곳에서 그는 여기저기 구멍 뚫린 곧 무너질 것 같은 큰 평상 두 개를 가리키며, 또 무슨 고기를 분주하게 구우며 “이걸로 장사하면 금방 일어설 것”이라며 호탕하게 웃는 것이었다. 서로를 품으며 모든 것을 품는 언제나 같은, 오늘 언제나 같은 행장(行狀)
-시집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김재홍 시인 /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돈도리는 된섬으로 북적거리는 돼지촌
돼지를 먹은 돼지와 돼지를 버린 돼지가 끼리끼리 위로하며
한 길로 또각또각 울다가 웃다가 뛰고 달리며 사랑을 좇다가
삼십 년 동안 돼지는 죽지도 않고 꽥꽥거리며 꿀꿀거리며
소보다 싸고 소보다 작으며 소보다 빨리 자라고
된섬은 돼지들의 천국으로 꿀꿀거리는 돼지 소굴로
돼지는 돼지를 위하여 울고 돼지는 돼지를 위하여 죽고
-시집 <돼지촌의 당당한 돼지가 되어>
김재홍 시인 / 또한 언제나 반복되므로
희생이라고 말하지 말자 장맛비 지난 뒤 지렁이의 메마른 사체를 지열의 기울기대로 굳은 곡선을
자살이라고 말하지 말자 흡혈욕에 이끌린 모기의 짓눌린 찢어진 육신을 한 분노한 인간의 살의의 현실화를
제의라고 말하지 말자 포유동물의 향(香)을 좇는 진드기의 필사적인 운동을 그 장엄한 추락의 형식을, 반복을
김재홍 시인 / 환영들이 구도를 애워싸는 밤
너를 부르기 위하여 너에게 묻는 밤 너는 무엇이 아니라 너는 어디가 아니라 너는 어떤 술어냐고 질문하는, 너를 부르기 위하여 네가 포함한 모든 어떤을 상상하는 밤
너의 환영들 너는 언제나 우발적이고 너의 내부에 너를 망각한 너의 환영들 무차별적인 외부적 산란 속으로 뒤집히는 혼돈 속으로 사건 속으로 폭력 속으로
네가 쌓은 의미들 표면들 망각들 너는 안개 속에서 안개의 입자들 사이로 스며드는 밤으로 모든 어떤들이 너를 관통하는 순간들 속으로 사라지는 너는, 누구냐, 텅 빈
김재홍 시인 / 메히아*
중남미의 어느 공화국 시민인 그는 동란과 쿠데타를 딛고선 아시아의 작은 공화 정부의 취업비자를 받아 뜨끈뜨끈한 잠실야구장 타석에 섰다 (왜 중남미 선수들은 교범에도 없는 말타기 자세를 하는지 몰라)
메시아가 어디 사는지도 모르면서 검게 붉게 얽은 얼굴을 하고 그는 처음에 야구공과 방망이를 손난로처럼 품고 한겨울 국제공항 청사를 두리번거리며 어슬렁거리며 나왔을 것이다 (머리통이 얼마나 작으면 헬멧 속에 모자를 또 썼을까)
그는 당당하게 2루타를 쳤다 베이스를 밟고 선 두 다리가 덜덜 떨렸다 수천 개 눈동자가 일순간 그의 몸을 향해 함성을 지르고 파도처럼 술렁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거대한 솥단지가 되어 펄펄 끓다가 더 작은 체구의 다음 타자가 안타를 칠 수 있을지 의심한다 (관중석에 앉으면 왜 선수들은 모두 야구공처럼 보일까)
비쩍 마른 붉은 눈의 게바라를 읽고 싶었다 국경을 뛰어넘는 공화국의 깃발을 보고 싶었지만 그는 너무 작았고 액정 화면에 잡힌 그의 헬멧에는 국적 불명의 독수리 이니셜만 코를 벌름거리며 박혀 있었다
멕시코와 푸에르토리코와 쿠바 출신의 운수 좋은 메이저리거들도 타석에 서면 구부정하게 허리 굽히고 꼭 말 타는 자세로 방망이를 든다
*국내 프로야구팀 ‘한화 이글스’의 외국인 선수(2003년)
김재홍 시인 / 초월성이 내재적인 것 안에 있다고 생각하는*
바이러스가 온 나라에 퍼져 수백 명 목숨을 앗아간 이 계절은 초록이라고 눈부시다고
거리는 사람들의 행렬 마스크를 낀 색색의 옷깃 나풀거리는 이 계절은 환호성이라고
손을 잡고 걸어오는 초로의 부부와 두 마리 개에 끌려가는 여자와 괴성을 지르며 달려가는 어린것과 젊은 엄마와 버스를 기다리는 한 중년이 서로 반갑다며 서로 기쁘다며 말없이 지나치는
도로는 신호등을 따라 끊어졌다 이어지고 자동차는 달리다 멈추다 사람들은 기다리다 건너다 종점 근처 오후의 정류장에 버스는 오지 않고
바이러스가 온 세계를 덮쳐 수십만 명 목숨을 앗아간 이 계절은 초록이라고 이 계절은 빛난다고
거리는 사람들의 행렬 환호성의 행렬 말없는
*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철학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계간 《시인수첩》 2021년 겨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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