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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현숙 시인 / 연줄을 끊다
오랫동안 강둑에 서 있었다 바람이 부는 방향을 따라 내 얼레는 부지런히 허공을 감거나 풀어준다 손끝에 잠아 쥔 한 올의 연줄로 아슬아슬한 줄다리기를 하며 매운 강바람 속, 밀고 당긴다 나를 감고 돌고 있는 피의 소망과 무명 밥상보 같은 한 장의 약속을 이제야 툭 끊으며 습지에 못 박힌 골풀 같은 시간을 풀어 놓는다 망연히 바라보는 하늘 속으로 반역처럼 켜 온 허망 하나 꼬리 연이 되어 멀어져 간다 땅속으로 가부좌 튼 내 뿌리의 팽팽했던 안식을 거부한 채 칼날 같은 몸체로 더워지지 않는 공기를 수직으로 가르며 솟구치는 저,
청명한 자유........
유현숙 시인 / 등 뒤가 어둡다
불빛이 연꽃무늬 창살에 번진다 검은 새 한 마리, 차고 목 쉰 소리로 공중을 건너가고 누운 탑 그림자가 길다
남쪽마을에서 사람이 죽었다. 고 남쪽으로 내려가는 사람을 배웅하던 날 밤 그의 등 뒤에는 어렴풋이 조등 빛이 흔들렸다 누운 사람의 그림자가 길다
그는 이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명치아래 독즙이 괴고,
돌아다 본 등 뒤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겹쳐 있다 흔들리는 것은 불빛만이 아니다
유현숙 시인 / 두족류
맞은 편 의자에 앉은 여자의 흰 손이 남자의 허벅지에 붙어 있다 낙지발 같다 전동차 안이 푸르러지고, 풀어헤친 머리칼이 물풀마냥 물결치고 진흙구멍을 막 빠져나온 긴 낙지발이, 여자의 가는 손가락이, 개흙바닥 위를 긴다 폐선처럼 개펄에 빠진 어구처럼 낡아서 삐걱대는 저 남자, 반쯤 잠 들었다 덜컹, 전동차가 흔들리고 남자의 아랫도리에서 덜컹, 낡은 부속품들이 흔들리고 창밖에는 저녁놀이 흐르는데 가압류 딱지가 붙은 섣달 그믐이 붉디붉은 인줏빛이다 고철처럼 남자의 가랑이 사이가 산화하고 여자의 손가락이 흠뻑 녹물에 젖는다 간 여름의, 등이 뜨거워진 왕새우떼들 손등에서 튀어 오르고 남자의 전신에다 흡반을 댄 저 여자 너풀대는 물풀 속에 웅크린 한 마리 두족류다
유현숙 시인 / 머큐로크롬
마른 손가락 같은 너를 만지다가 그만 놓친다 바람 부는 동쪽 끝에서 내렸다 너를 놓는다 치타의 눈 밑 티어마크는 제 몸을 돌아 나온 바코드이다 꿈도 피도 싸늘하던 젊은 날의 바코드가 내게도 있다 치명적 독을 문 전갈처럼 가멸차게 꼬리를 세우며 어둠 속에서 펼쳐지는 낡은 후일담 하나
모든 흔적은 광학적으로 판독되는 막대 기호인가 길의 흔적, 젊음의 흔적, 회한의 흔적, 절규의 흔적..... 머큐로크롬보다 붉고 따가운 소문의 여운 감출수록 드러나는 이진법적 기표인가 주홍빛 촉각인가
유현숙 시인 / 저녁숲에서 이야기하고 싶은 것들
어두워지는 저녁숲에 남은 햇빛이 비치는 것에 대하여, 그 빛 아래서 은사시 나뭇잎들 반짝이며 제 몸을 뒤집는 것에 대하여
혼자 듣는 시냇물 소리에 대하여, 그 물소리 어떻게 저무는가에 대하여
시냇물 소리, 내 몸 구석구석이 다 저문 뒤까지 흘러 서늘한 저녁물빛이 되는 모양이라든가 그런 슬픔이라든가 슬픔보다 더 길게 개망초꽃들이 자라고 있는 것, 그 개망초꽃들 하얗게 흔들리는 난동에 대하여
간간이 들리는 지빠귀 울음소리의 아득한 고적감이나 여뀌 풀 더미에 얹히는 여뀌 꽃 색깔이며, 그 여뀌꽃의 그늘 빛이 어떠한지에 대하여
어두워지는 저녁숲에서 내가 혼자 저물고, 한 사람을 찾아가는 길이 어떻게 긴 기도인가에 대하여
유현숙 시인 / 점멸기
생의 가는 허리를 휘어잡는다 푸드득, 새들 나는 소리 들린다 대추알들 붉게 익고 주둥이 흰 새들 날아와 대추알을 쪼던 새들의 눈빛이 대추빛으로 익던 때가 있었다 기대어 서면 내가 대추나무이던 때가 대추나무 밑동을 걷어차며 또 내가 걷어차이던 때가 지났다
날 저물고 내 안의 빈 마당에 바람 불고 지금은 밑동만 남은 마당 귀퉁이에 돌아와서 후두둑 떨어지는 대추알을 줍는다
왜 나는, 몸이 대춧빛으로 익을 때마다 날 선 톱날이 되어 대추나무 허리를 잘라야 했던지 새들은 떼 지어 날아오르고 마침내 까마득한 하늘로 점멸했던 것인지
내 안에 드리워진 대추나무 그림자가 대추잎새 보다 푸르다
새들은 이제 날아오르지 않는다.
유현숙 시인 / 스테인드글라스
당신을 만나는 일은 혼자 걷는 일이지요, 비우고 오래 기다리는 일이지요
또 '밤 한때 눈발이래요, 콧등이 추운 창가에서 자주 창을 열어보는 일이겠지요
비우는 동안,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무 낡습니다
앙리 미쇼는 메스칼린을 먹었고, 박정만은 두 달 동안 오백 병의 소주를 마셨고, 기형도는 이십여 일 동안 백 병의 소주를 마셨지요. 김관식, 조지훈, 천상병, 조태일...... 생전의 그 이 름들도 제 정신을 내려놓고서야 허무의 면목과 독대 했는가요
의식도 무의식도 끄트머리는 모두 한 점에 닿는 것이겠지요
레이온 치마폭에 묻은 감즙의 얼룩이 다 바래어지고 내가 닳아 조용해지고 나면, 닳아서 조용한 당신과 만날 수 있을는지요
언어가 유리조각 같이 날을 세우는 새벽이 오면
그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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