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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과 시(현대)

하상만 시인 / 자벌레구멍 외 10편

by 파스칼바이런 2025. 10. 23.
하상만 시인 / 자벌레구멍

하상만 시인 / 자벌레구멍

 

 

쳐다보니

떡갈나무 잎사귀에

자벌레가 붙어 있습니다

그저 그러는구나 했다가 한참 뒤에 다시 보니

자벌레는 없고

가늘게, 길다랗게, 그리고 파랗게,

딱 자벌레만한 구멍이

떡갈나무 잎사귀에 뚫려 있습니다

자벌레가 하늘 되는 방법이

그랬습니다

이번에는

내 차례라면서

자벌레가 뚫어놓은 구멍을

찬찬히 봐두라고,

비좁지만 이미 자벌레가 그랬듯이

조심해서 몸을 끼워 넣고는 재빠르게

뒤로 빠져 나가버리라고, 그것이

방법이라고

 

 


 

 

하상만 시인 / 당나귀

 

 

당신의 짐을 멘 사람은 나지만

그 짐을 버리지 않고 운반하는 것도 나지만

운반하고 나서 다음 짐을 메러 돌아오는 것도 나지만

당신 가슴에 새겨진 문장(紋章)은 내가 아니다

 

나는 친절하지만 당신은 매력적인 동물을 좋아한다

길들여진 나보다

길들여지지 않는 사자를 좋아한다

 

당신은 때때로 다치고 흉터를 갖게 되지만

그 흉터를 결국 무늬라고 생각한다

 

나는 당신의 무늬도 다정하게 핥아주지만

당신은 순한 나보다 상처 준 사자를 좋아한다

 

-반년간 『경기작가회의』 2024년 하반기호 발표

 

 


 

 

하상만 시인 / 멀면서 가까운

 

 

양쪽

가장 먼 곳에서

서로 등을 보이며

다른 곳을 가리키는

사람도

둥글게 말아보면

사실은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

 

평면으로 펼쳐진 그림 한 장은

사실 롤러 위의 그림이라서

누가 밀어서 눌러 놓은 그림이었다

 

다른 곳을 가리키는 손은

악수하기 위해 내민

평화의 손이었고

 

여기

한 장의 종이 위에

펼쳐진 세계지도

 

동쪽 끝과 서쪽 끝

그 사이엔 대륙과 바다가 있어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 같지만

사실은

둥근 지구 위에서

가장 가깝게 붙어 있다

 

세상은 펼쳐져 있고

펼쳐서만 보는 사람은

그 너머를 알 수 없다

 

세상을 반지처럼 구부려

손가락에 끼워도 보렴

비밀을 알고 싶다면

 

-월간 『모던포엠』 2025년 2월호 발표

 

 


 

 

하상만 시인 / 색

 

 

색과 색은 서로 섞이면서 검정에 가까워집니다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속이 까매졌고요

 

사람에게 다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런 희망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과는 다른 것은 흡수하고

붉은빛만 반사하죠

 

내가 다정한 것은

다정함에 대한 반사입니다

 

당신처럼 하얀 사람을 만나면 잠시 회색이 되지만

사람들과 섞이면서 다시 어두워집니다

 

무지갯빛을 모두 섞으면 하얀빛이 되는데

무지개색을 모두 섞으면 검정이 되어버립니다

 

우리는 빛으로 존재할 수 없고

색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빛은 그림자가 없고 우리는 그림자를 버릴 수 없으니까요

 

살아 있던 것은 결국 땅에서 섞이는데

모든 것이 섞여 있는 먹먹한 지구에서

여전히 꽃으로 피어나는 것들이 있어요

 

한줄기 아름다운 색이

물관이나 체관을 통해서

올라오고 있습니다

 

-월간 현대문학』 2023년 11월호 발표

 

 


 

 

하상만 시인 / 길

 

 

너를 향해 가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다라고 생각했는데

다른 길이 있을 수 있지

너와 상관없는 길처럼 보이지만

너에게로 향한 길일 수 있지

너를 생각하며 걷는 길은

모두 너에게로 가는 길이야

 

-계간 『시와 산문』 2024년 봄호 발표

 

 


 

 

하상만 시인 / 선線

 

 

산다는 건 점을 찍는 일이다

언젠가 그 점들은 연결된다

 

헛된 시간은 없다

헛된 마음가짐만 있을 뿐

 

웹진 『시인광장』 2024년 3월호 발표

 

 


 

 

하상만 시인 / 설산

 

 

 이런 곳에 와 보면 궁금해집니다 길은 눈 속으로 사라졌는데 처음 걸어간 사람은 누구일까 남은 발자국을 앞장세우고 걷다 보면 원래의 길과 어긋남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산길은 사람이 다녀서 생긴 것 같지만 원래 희미한 윤곽이 있었을 것 같아 그걸 볼 줄 아는 사람들이 다니면서 뚜렷해진 거고 길은 어쩌면 처음부터 길이었을 거야 알아보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거지

 

 나 같은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아서 남이 하던 대로 따라 합니다 양 옆으로 허벅지 높이까지 눈이 쌓여 있고 아무도 밟지 않은 눈 속을 스틱으로 찔러 봅니다 단단해진 길보다 푹신한 눈길이 깊습니다 그 속으로 걸어가고 싶습니다 뒷사람이 따라오는 길이니 눈길을 함부로 밟지 말라는 말씀을 어겨보고 싶습니다 나에게 인류를 위한 큰 사명 따위는 없습니다

 

 오해로 시작한 길도 그 끝이 아름다울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해로 시작되는 사랑도 원하는 사랑에 닿을 수 있을 것 같고 아무도 밟지 않은 곳은 눈이 부십니다 누구도 따라오지 않는, 당신에게로 가는 길을 만들고 싶습니다

 

반년간 『엄브렐라』 2023년 상반기호 발표

 

 


 

 

하상만 시인 / 눈

 

 

눈이 또 왔으면 좋겠다

너에게로 왔던 길이 지워질 수 있도록

너에게로 오는 흔적이 남아서

누군가 그 길로 따라오는 것이 무섭다

너를 본 순서대로 너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니까

처음 발견한 사람이 나라고 외쳐도

소용없을 테니까

 

폭설이 내려서 너와 단둘이

고립되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있는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에서

구조대를 기다릴 필요도 없이

그저 우리에게 남은 것을 먹고

부족하다면 서로를 먹으며 결국

굶어 죽을 수 있다면

 

세상이 망한 것처럼 눈이 내려서

세상이 망했다는 것을 믿으면서

죽어가고 싶다

아무런 희망도 없이

주머니를 뒤집어 보이며

우리에게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고

우리만 남았다고 생각하면서

 

서로의 머리카락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쓰다듬다가 동그랗게 말아보며

그래도 괜찮지 않냐

우리가 함께 있었다는 거

눈이 녹으면 우리가 흘린 눈물이라고

누군가 기억해주지 않아도

우리만 알다가 사라지는

그런 것이 있었다고

마지막까지 생각하면서

사라지는 것도

나는 좋다고 생각합니다

 

계간 『시와 정신』 2023년 봄호 발표

 

 


 

 

하상만 시인 / 연못

 

 

맹꽁이가 시끄럽게 울고 있다

 

내 목소리 멋지지 않아?

암컷들에게 노래를 부른다

 

수컷에게만 울음주머니가 있다

 

울음주머니를 가지고 태어났다는 건

울어야 할 생(生)이 있다는 것

 

아직까지 우는 것들은

제 생을 다하지 않은 것들

 

정해진 대로 살려고 하였으나

정해진 대로 살지 못했을 뿐

 

얼마나 큰 울음주머니이기에

저렇게 비우질 못하나

 

계속 노래하는 것이 벌이 될 줄은

 

 


 

 

하상만 시인 / 세를 들어 살았다

 

 

애가 셋이라고 밝히면

세를 주지 않았다

 

애가 둘이라고 말하고

이사를 한 다음 저녁에 나를 데려왔다

 

주인이 거짓말을 했다고

야단을 쳤다

 

엄마는 그 집 마당을 열심히 쓸었다

 

나중에 우리 집을 갖고 나서야

엄마가 적은 글을 보았다

 

주인집 눈치를 보면서

마당을 쓸지 않아서 좋다고 했다

 

그 집에 개가 있었는데

형이 개에게 물렸던 적이 있다

 

엄마는 형을 안고

병원으로 달려갔다

 

다녀와서

마당을 쓸었다

 

형의 종아리에는

지금도 그날의 상처가 있다

 

 


 

 

하상만 시인 / 흰색 옆에 검정

 

 

흰색에서 검정으로 이어지는 명도표를 좋아해

검정과 흰색이 반대편에 있는데

그걸 쳐다보면 둘은 원래 붙어 있던 거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어쩌면 흰색에서 검정으로 펼쳐져 있는 것이 아니라

실은 둥글게 반지처럼 말려 있던 거라서

흰색과 검정의 거리는 아주 가까운 것이었을 수도 있겠다 싶어

눈이 녹으면 검어지잖아

제대로 된 눈이 내리지 못하고 금방 녹을 땐

흰색과 검정의 경계가 이렇게 가까워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땐 보기 좋게 경계를 잘라서 둘 사이를 멀리 펼쳐두고 싶어

원통인장을 잉크에 찍어 종이에 굴려보는 걸 좋아해

종이에 나타난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가장 멀리 있는 사람이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다는 걸 상상하지 못하지

그건 아는 사람만 아는 사실

양 끝에 서 있는 두 사람은 만난 적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펼쳐진 그것을 눈으로 말아 손가락에 끼울 수도 있지

그렇게 다시 한번 곁에 서보지만

눈은 녹으면서 소리를 남긴다는 말을 좋아해.*

그 소리가 멀리 사라져 가는 것도 좋아해

 

* 한정원.

 

-월간 『모던포엠』 9월호 발표

 

 


 

하상만 시인

1974년 경남 마산 출생. 동국대학 국어교육과 졸업. 2005년 《문학사상》으로 등단. 시집 『간장』 『오늘은 두 번의 내일보다 좋다』 『추워서 너희를 불렀다』 등. 제9회 김구용시문학상 수상. 2013년 제9회 김장생문학상 대상 수상. 현재 경기도 대광중학교의 교사. 수원 청명고등학교 교사. 현재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으로 활동 중.